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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인권의 수호자, '진보의 아이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미국 연방대법관이 별세했다

대선이 6주 밖에 남지 않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후임을 임명할 것으로 보인다.

 

1993년부터 미국 연방 대법관을 지내왔던 ‘진보의 아이콘’이자 여성 인권 향상을 위해 평생을 싸워왔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가 18일(현지시각) 별세했다. 향년 87세.

연방대법원은 긴즈버그가 췌장암 전이에 따른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그는 워싱턴의 자택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을 맞이했다.

긴즈버그는 숨을 거두기 며칠 전 손주딸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고 NPR은 전했다. ”나의 가장 강렬한 소원은 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하기 전까지 나를 대신할 사람이 임명되지 않는 것이다.”

존 로버츠 연방 대법원장은 입장문에서 ”이 나라는 역사적 위상을 갖는 법관을 잃었다”고 밝혔다. ”연방대법원의 우리는 소중한 동료를 잃었다. 오늘 우리는 애도하되, 미래 세대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를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기억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지칠 줄 모르는 불굴의 정의의 투사로 말이다.”

연방 대법관 중 최고령인 긴즈버그는 1990년 대장암, 2011년 췌장암으로 치료를 받은 바 있다. 지난 5월에는 담낭 염증으로 입원 치료를 받았고, 7월에도 염증 치료를 받았다. 지난해 8월에는 췌장에 발견된 종양에 대해 3주 동안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2018년 12월에는 폐에 발견된 두 개의 악성 혹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느라 연방대법관이 된 이후 처음으로 구두변론에 불참하기도 했다. 이처럼 여러 차례 치료를 받는 와중에도 그는 병상에서 표결에 참여하는 등 업무를 계속해왔다.

'보수 5 대 진보 4' 구도가 유지된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진보의 기둥'이었던 긴즈버그가 사망함에 따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후임을 지명할 기회를 갖게 됐다. 대법원이 한층 보수적으로 변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자신에게 지명 기회가 주어지면 임신중단(낙태)에 반대하는 사람을 대법관에 임명하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그는 취임 이후 이미 두 명의 대법관을 지명하는 '행운'을 누렸다.
'보수 5 대 진보 4' 구도가 유지된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진보의 기둥'이었던 긴즈버그가 사망함에 따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후임을 지명할 기회를 갖게 됐다. 대법원이 한층 보수적으로 변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자신에게 지명 기회가 주어지면 임신중단(낙태)에 반대하는 사람을 대법관에 임명하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그는 취임 이후 이미 두 명의 대법관을 지명하는 '행운'을 누렸다. ⓒASSOCIATED PRESS

 

‘공화당 대통령 지명 5명(보수)대 민주당 대통령 지명 4명(진보)’ 구도가 유지되어 온 연방대법원에서 진보에 속했던 긴즈버그가 사망하면서, 이제 연방대법원은 ‘보수 5 대 진보 3’이 됐다. 대선이 두달도 채 남지 않은 상황에서 후임 대법관 지명은 뜨거운 쟁점으로 부상하게 됐다.

미국 연방대법관은 종신직이어서 본인이 사임(은퇴)하거나 사망하지 않는 한 교체되지 않는다. 이렇게 결원이 발생할 경우에만 대통령이 후임을 지명할 수 있는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첫 임기 동안 이미 두 명의 대법관(닐 고서치, 브렛 캐버노)을 지명하는 ‘행운’을 누렸다.

긴즈버그의 사망으로 트럼프는 세 번째 대법관을 지명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이 재임 8년 동안 고작 한 명을, 조지 H. 부시와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각각 8년 동안 두 명을 지명할 수 있었던 것과 비교하면 매우 드문 일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이 후임자 지명과 인준에 나설 경우, 최종심(3심)을 다루는 미국 최고(最高) 법원이자 한국의 헌법재판소 기능까지 담당하는 연방대법원에 트럼프의 손에 임명된 대법관 세 명이 앞으로 수십년 동안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는 의미다.

2016년 2월, 보수 성향인 앤토닌 스칼리아 대법관이 갑자기 사망하자 민주당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워싱턴DC 항소법원의 메릭 갈랜드 판사를 후임으로 지명했다. 그러나 당시 상원 다수당이었던 공화당은 (곧 퇴임할 오바마 대통령이) 대선이 실시되는 해에 후임을 지명해서는 안 되고, 그 기회를 후임 대통령에게 넘겨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인준을 부결시켰다.

그러나 대선이 불과 6주 밖에 남지 않은 지금,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 미치 매코넬은 긴즈버그 사망 이후 그 때와는 전혀 다른 입장을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의 지명자가 미국 상원에서 표결에 부쳐질 것이다.”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 척 슈머는 4년 전 매코넬이 했던 말을 토씨 하나 고치지 않고 그대로 트위터에 올렸다.  

″다음 연방대법관 지명 미국인들의 의견이 반영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새 대통령이 선출되기 전까지는 빈 자리가 채워져서는 안 된다.”

민주당 대선후보 조 바이든도 ”유권자들이 대통령을 선택하고, 그 대통령이 긴즈버그 대법관의 후임을 선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 내 여성 인권 향상에 중요한 판결을 이끌어내왔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는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여성 대법관의 숫자'를 묻는 질문에 '9명 (전원)은 왜 안 되냐'고 답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미국 내 여성 인권 향상에 중요한 판결을 이끌어내왔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는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여성 대법관의 숫자'를 묻는 질문에 "9명 (전원)은 왜 안 되냐"고 답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Sarah Silbiger via Getty Images

 

로스쿨 졸업 후인 1960년에 연방대법원 서기직 자리에 추천됐으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면접조차 보지 못했던 긴즈버그는 산드라 데이 오코너 이후 미국 역사상 두 번째 여성 연방대법관이자 유대인 여성 최초의 대법관이 된 인물이다. 1993년 빌 클린턴 대통령(민주당)은 1980년부터 워싱턴DC 항소법원에서 근무하던 긴즈버그를 대법관에 지명했다. 2006년부터 2009년까지, 긴즈버그는 대법관들 중 유일한 여성이었다.

긴즈버그의 의견은 연방 대법원이 내리는 판결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해왔고, 그건 그가 다수의견 편에 서든 소수의견 쪽이든 마찬가지였다. 일례로 2007년 ‘릴리 레드베터 대 굿이어타이어’ 사건에서 연방대법원은 5대 4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퇴사한 여성 직원인 레드베터가 남성 동료직원보다 더 적은 임금을 받았다 하더라도 차별을 당했다는 이유로 전 고용주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없다는 게 판결의 핵심이었는데, 법이 정한 180일 기한 내에 소송을 내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다른 세 명의 대법관들과 함께 소수의견을 낸 긴즈버그는 그와 같은 법 조항은 터무니가 없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여성 직원이 임금차별 사실을 인지하는 데까지 180일이 넘게 걸릴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소수의견에서 그는 의회에 직접 법 개정을 요청하기도 했다. 

의회는 이를 받아들여 2009년 ‘릴리 레드베터 공정임금법’을 통과시켰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서명으로 그 해부터 법이 시행됐다. 임금을 지급받는 주기(월급, 주급 등)마다 임금차별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180일의 기한이 매번 새롭게 부여되도록 한 것이다. 

긴즈버그는 여성 인권에 관한 여러 사건에서 목소리를 냈다. 1996년, 그는 남성의 입학만 허가하는 버지니아군사학교의 정책이 헌법의 평등권 조항에 위배된다는 다수의견문을 작성했다. 소위 ‘부분 출산(partial-birth) 임신중단(말기 낙태)‘을 금지한 연방법을 존속시킨 ‘곤잘레스 대 칼하트’ 판결, 고용주가 종교적인 이유를 들어 직원들에게 특정 피임 및 임신중단에 대한 건강보험 혜택 제공을 거부하는 것을 용인한 ‘버웰 대 하비 로비 스토어’ 사건에서는 강력한 소수의견을 냈다.  

″현재 인정되고 있듯, 여성에게는 이 나라에서 (남성과) 동등하게 경제적, 사회적 삶에 참여할 수 있는 재능과 능력, 권리가 있다. 법원이 공인한 바 있듯, 여성들이 자신의 잠재력을 모두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은 스스로 재생산권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과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긴즈버그가 당시 소수의견문에서 주장했다. ”그러므로 임신중단 절차에 관한 과도한 제한에 대한 법적 소송은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것처럼 프라이버시의 정당성을 입증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여성의 자주성을 핵심으로 두어 동등한 시민권 자격을 누리고자 하는 것이다.”

긴즈버그는 작은 체구를 지녔지만 강인함과 운동 습관, 맹렬한 레토릭 덕분에 래퍼 Notorious B.I.G.에게서 따온 ‘노터리어스(Notorious) R.B.G’라는 별명을 얻었다.  

긴즈버그는 여러 차례의 암 투병과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꾸준한 운동과 철저한 자기관리로 건강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병원 치료가 잦아졌다.
긴즈버그는 여러 차례의 암 투병과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꾸준한 운동과 철저한 자기관리로 건강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병원 치료가 잦아졌다. ⓒIra L. Black - Corbis via Getty Images

 

1933년 뉴욕에서 ‘루스 조안 베이더’로 태어난 긴즈버그는 코넬대학에서 첫 학위를 땄으며, 이곳에서 남편이 될 마틴 긴즈버그를 만났다. 두 사람은 긴즈버그가 대학을 졸업하던 1954년에 결혼했다. 긴즈버그는 하버드대 로스쿨에 진학했다. 500명의 학생 중 여성은 그를 포함해 단 9명이었고, 긴즈버그는 딸을 키우면서 수업을 들었다. 하버드에서 2년을 보낸 뒤 남편이 뉴욕에서 일자리를 얻게 됐고, 긴즈버그는 컬럼비아대에서 학위를 마쳤다. 수업 과정 대부분을 이수했음에도 하버드대는 학위 수여를 거부했고, 긴즈버그는 컬럼비아대에서 법학 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는 2011년에 긴즈버그에게 명예 학위를 수여했다.

1959년 로스쿨을 졸업하고 자격을 갖췄음에도 긴즈버그는 일자리를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여성이기 때문이었다. 하버드는 당시 연방대법관 펠릭스 프랭크푸르터에게 긴즈버그를 서기(law clerk)로 채용하라는 추천서를 보냈지만, 프랭크푸르터는 긴즈버그의 이력이 인상적이긴 하나 여성을 채용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 답했다.

긴즈버그는 결국 뉴욕 연방판사의 비서로 일하게 됐고, 러트거즈대학 로스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1972년 컬럼비아대 최초의 여성 종신교수가 됐다. 같은 해 그는 ACLU(미국자유인권연맹) 내에 ‘여성의 권리 프로젝트’를 설립했고 1980년까지 ACUL의 법무 자문위원을 지내는 동안 법원을 상대로 성별에 따른 차별을 용인하는 법 조항 폐지를 위해 싸웠다.

1970년대 초, 긴즈버그는 유족 중 남성에게 재산관리인이 될 우선권을 부여하는 주 법이 헌법에 반한다며 아이다호주의 한 여성이 낸 소송이 연방대법원으로 올라가자 ACLU의 법률검토서 작성을 담당했다. 긴즈버그는 이 법이 남성과 여성을 다르게 취급하고 있으므로 수정헌법 14조의 평등 보호(equal protection) 조항에 위배된다는 논리를 펼쳤다. 연방대법원은 ‘리드 대 리드’로 알려진 이 사건에서 긴즈버그의 의견을 따라 여성의 손을 들어줬다. 성별에 따른 차별에 관한 사건을 다루면서 연방대법원이 수정헌법 14조를 적용한 건 이 사건이 처음이었다. 

긴즈버그는 당시만 해도 전원 남성이었던 대법관들이 심정적으로 동조할 만한 사건들을 신중하게 골라 연방대법원으로 끌고갔고, 작은 것부터 하나씩 성차별적 법을 바꿔냈다. 그 중 하나는 주류 판매 허용 연령을 여성은 18세, 남성은 21세로 정한 오클라호마주의 법률이 헌법에 위배된다는 연방대법원 판결을 이끌어낸 것이었다. ‘크렉 대 보렌’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을 통해 법원은 젠더 차별적 법률을 비롯한 평등권 보호 조항 관련 사건에 대한 ‘중간심사(Intermediate scrutiny)’라는 기준을 수립하는 기념비적 판결을 내렸다. 

(자료사진) 빌 클린턴 대통령이 연방대법관에 지명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가 백악관 기자들 앞에서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1993년, 8월10일.
(자료사진) 빌 클린턴 대통령이 연방대법관에 지명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가 백악관 기자들 앞에서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1993년, 8월10일. ⓒMark Reinstein/MediaPunch/IPx
 

빌 클린턴 대통령은 1993년 긴즈버그를 연방대법관에 지명하면서 그가 법원에 뿌리 깊은 유산을 남겼다고 말했다. 

″일생동안 그는 여러 차례 덜 유복하고 사회에서 배제된 개인들을 대표해서 싸웠고, 우리의 사법체계 안에 그들의 자리도 있음을 알려주고, 헌법과 법률이 힘있는 사람 뿐만 아니라 모든 미국인들을 보호한다는 인식을 심어줌으로써 그들에게 더 큰 희망을 주었다.”

 

긴즈버그는 연방대법원에서 여성들의 수호자로 자리매김해왔다. 그럼에도 그는 임신중단을 금지하는 텍사스주의 법률을 폐지시킴으로써 임신중단 합법화를 이끌어낸 1973년의 기념비적인 ‘로 대 웨이드’ 판결에 비판적 의견을 냈다. 

긴즈버그는 여성의 임신중단 권리를 지지했지만 법원이 이 사건에서 ”너무 멀리, 너무 빨리” 나갔고, (그 반작용으로) 임신중단 반대 운동에 불을 붙였다고 말했다. 그는 법원이 포괄적으로 로의 손을 들어주는 대신 보다 협소한 접근법을 취했어야 한다고 말했다. 쟁점이 된 텍사스주의 법만 폐지하고 다른 주들이 정치적 모멘텀에 따라 안전한 임신중단을 보장하는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도록 했어야 한다는 얘기다.

한편 연방대법관 중 진보 성향이었던 긴즈버그는 이념적으로 정반대편에 있던 동료와 가장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다. 고인이 된 안토닌 스칼리아였다. 두 사람은 사건에 대해 서로 반대되는 의견을 내며 맹렬하게 논쟁을 벌였지만, 오페라에 대한 애정을 공유했다. 두 사람을 다룬 오페라가 쓰여지기도 했다.

긴즈버그의 남편 마틴은 결혼한 지 56년 만인 2010년에 사망했다. 긴즈버그의 유족으로는 두 자녀, 네 명의 손주, 두 명의 새손주, 한 명의 증손주가 있다.

 

* 허프포스트US의 Supreme Court Justice Ruth Bader Ginsburg Dead At 87를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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