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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뭐라건, 노무현의 길

한겨레 아카이브 프로젝트 : 시간의 극장 - 제1화 바보 노무현

<한겨레>가 지령 1만호를 맞아 ‘시간의 극장―한겨레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선보입니다. 33년 기사와 사진 아카이브를 활용하여, 중요 사건과 인물을 현대사 콘텐츠로 재탄생시키는 작업입니다. 해당 주제를 잘 아는 해설자가 ‘시의성 있는 과거 한겨레 사진과 기사’를 선정하고 독자에게 해설합니다. 한번도 소개된 적 없는 비컷 사진 필름도 발굴하여 공개합니다. 르포, 전문직 소재 웹소설 기획사 팩트스토리가 기획하고 한겨레와 공동으로 제작합니다. 

제1화 바보 노무현

제1화 바보 노무현
제1화 바보 노무현 ⓒ한겨레

노무현은 앞선 사람이었다. 남과 달랐다. 사람들이 싸우기 주저할 때 투쟁에 앞장섰고, 싸움에 몰두할 때는 통합을 주장했다. 그런데 “튀어나온 못이 망치를 맞는다”는 말이 있다. “웃자란 가지가 먼저 베인다”고도 한다. 그에게 일어난 일이 그랬다. 노무현에게 마음의 빚을 진 사람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정치인 노무현과 우리가 함께한 시간은 1988년부터 2009년까지 20년 남짓이다. 한겨레 30년치 기사와 사진을 모은 아카이브를 찾아보았다. 노무현과 만난 사람, 노무현과 특별한 인연을 맺은 지역이 눈에 띈다. 해설 김태권

 

‘5공청문회’와 초선의원 노무현

한겨레 사진 아카이브에는 강재훈 기자가 1988년에 찍은 초선의원 노무현의 사진이 있다. 노무현을 투사의 이미지로만 떠올리는 사람이 많은데 이 사진은 다정하고 품격 있는 신사의 모습이다. “저들이 그토록 매도하던 운동권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국민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11월11일치 인터뷰에서 노무현은 말했다. 청문회 스타가 된 노무현 의원이 1988년 최일남 선생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한겨레 사진 아카이브에는 강재훈 기자가 1988년에 찍은 초선의원 노무현의 사진이 있다. 노무현을 투사의 이미지로만 떠올리는 사람이 많은데 이 사진은 다정하고 품격 있는 신사의 모습이다. “저들이 그토록 매도하던 운동권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국민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11월11일치 인터뷰에서 노무현은 말했다. 청문회 스타가 된 노무현 의원이 1988년 최일남 선생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한겨레

젊은 초선의원 노무현이 온 나라 사람의 눈에 든 사건은 1988년의 ‘5공청문회’였다. 전두환 일당은 자리에서 물러난 다음에도 뻔뻔하였다. 텔레비전 중계로 청문회를 보던 시민이 화가 나 심장마비로 숨질 정도였다(한겨레 1988년 11월9일치). 이때 온 국민이 보는 앞에서 전두환과 부하들을 꼼짝 못 하게 만든 사람이 노무현이다. 빈틈없는 논리가 그의 무기였다.

1988년 11월11일치 한겨레에 노무현의 인터뷰가 실렸다. 노무현은 어떻게 ‘청문회 스타’가 되었나. 증인으로 나온 5공인사들이 “불합리하고 모순된 진술을 하도록 끌고 가는” 것이 비결이었다. 그가 처음부터 논리적인 모습 때문에 주목받았음을 알 수 있다. 끈질기게 그를 따라붙던 ‘선동적’이라느니 ‘감정적’이라느니 하는 비난과는 다르다.

1988년 11월11일치 한겨레에 노무현의 인터뷰가 실렸다. <a href='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817165.html' target='_blank' rel='noopener noreferrer'></div>· 29년 전 오늘, 노무현을 세상에 알린 헌정사 첫 청문회가 열렸다 / 2017.11.2</a>
1988년 11월11일치 한겨레에 노무현의 인터뷰가 실렸다. · 29년 전 오늘, 노무현을 세상에 알린 헌정사 첫 청문회가 열렸다 / 2017.11.2 ⓒ한겨레

· 29년 전 오늘, 노무현을 세상에 알린 헌정사 첫 청문회가 열렸다 / 2017.11.2

 

“국민을 ‘졸’로 보는 세력과 같이 할 수 없다”

세상이 김영삼을 따르던 1990년대 초에 노무현은 그에게 맞섰고 세상이 김영삼에게 등을 돌린 2002년에 노무현은 그를 챙겼다. 남들이 뭐라건 노무현은 소신대로 움직였다.

노무현을 정치권에 영입한 사람이 김영삼이었다. 그런데 1990년에 김영삼은 충격적인 결정을 한다. 노태우와 김종필과 당을 합친 것이다.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에서 민주진영에 유리하던 국회의 의석수는 하루아침에 역전되었다. 악명 높은 ‘3당합당’이다. 많은 정치인이 김영삼을 따라 거대 여당에 들어갔다. 노무현은 이들과 갈라섰다. 어려운 길을 택했다.

2002년에 김영삼을 찾은 노무현. 김영삼과 그 측근 박종웅 사이에 서서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다. 별세한 김종수 기자가 찍었다. 처음 공개하는 사진이다. 한겨레신문사 서가에 필름 상태로 보관돼오던 것을 팩트스토리가 발굴했다.
2002년에 김영삼을 찾은 노무현. 김영삼과 그 측근 박종웅 사이에 서서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다. 별세한 김종수 기자가 찍었다. 처음 공개하는 사진이다. 한겨레신문사 서가에 필름 상태로 보관돼오던 것을 팩트스토리가 발굴했다. ⓒ한겨레

3당합당의 나쁜 결과 하나는 지역 갈등이다. 한때 영남과 호남은 민주주의를 위해 힘을 모았다. 그런데 3당합당 이후 부산과 경남은 김영삼을, 호남은 김대중을 편들며 다퉜다. 노무현은 두 세력의 통합을 바랐다. 2002년에 대통령 후보가 되자마자 김영삼을 찾은 것도 그래서다. 그러나 당시는 김영삼이 비난받던 시절이었다. 노무현의 지지율이 떨어졌다. 후보를 사퇴하라는 말까지 들어야 했다.

· [한겨레21] 3김…계산기를 두드려라 / 2002.5.2

 

세번의 낙선…‘바보 노무현’

노무현은 김영삼과 헤어진 뒤 김대중이 이끌던 야당에 합류했다. 약은 사람이라면 지역구를 부산 말고 다른 곳으로 옮겼을 터. 그러나 노무현은 우직하게 지역주의와 싸웠다. 1992년 국회의원 선거도 1995년 시장 선거도 부산에서 출마하고 낙선했다. 중간에 한번, 서울 종로에서 국회의원이 되었다가 2000년 총선 때 다시 부산에 갔다. 그리고 낙선했다. 쉬운 길을 놔두고 굳이 어려운 길로 가는 그를, 사람들은 “바보 노무현”이라 불렀다.

‘바보 노무현’의 탄생. 2000년 총선 때 노무현은 다시 부산에 출마하고 낙선한다. 유세장에서 신이 난 어린이들의 모습을 이용호 기자가 찍었다.
‘바보 노무현’의 탄생. 2000년 총선 때 노무현은 다시 부산에 출마하고 낙선한다. 유세장에서 신이 난 어린이들의 모습을 이용호 기자가 찍었다. ⓒ한겨레

1995년 지방선거. “자정 무렵. 개표 방송을 보며 펜을 들었다.” 노무현이 직접 쓴 글이다. 여론조사에서 앞서가던 노무현은 지역주의의 바람을 맞고 휘청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역바람을 차단하고 승리를 보장할 비책으로 ‘탈당’ 유혹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원칙을 지켰다. 나의 자존심도 탈당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무엇보다도 나를 지지한 많은 분들에게 실망을 드릴 수는 없었다. 뿐만 아니라, 당락에 연연하여 비겁하게 지역대결구도와의 정면승부를 회피할 수는 없었다.”

1992년 총선. “만약에 유권자들이 오도된 지역감정에 묻혀버린다면 선거의 의미는 실종되고 만다. 선거는 정권과 정당과 국회의원 또는 후보자 개인에 대한 심판이다.” 교과서 문장 같다. 틀린 말 하나 없이 답답할 정도로 정론이다. 1992년 3월13일치 한겨레에 실렸다. “부산 시민들은 민자당의 정치행태를 따끔하게 심판하여야 할 것이다.” 누가 썼을까? 부산의 활동가였던 문재인의 글이다.
1992년 총선. “만약에 유권자들이 오도된 지역감정에 묻혀버린다면 선거의 의미는 실종되고 만다. 선거는 정권과 정당과 국회의원 또는 후보자 개인에 대한 심판이다.” 교과서 문장 같다. 틀린 말 하나 없이 답답할 정도로 정론이다. 1992년 3월13일치 한겨레에 실렸다. “부산 시민들은 민자당의 정치행태를 따끔하게 심판하여야 할 것이다.” 누가 썼을까? 부산의 활동가였던 문재인의 글이다. ⓒ한겨레
1995년 7월6일치 한겨레21에 실린 노무현의 글. 글에 열정이 있다. 노무현과 문재인, 두 대통령의 문체를 비교해본다.
1995년 7월6일치 한겨레21에 실린 노무현의 글. 글에 열정이 있다. 노무현과 문재인, 두 대통령의 문체를 비교해본다. ⓒ한겨레

· [한겨레21] ‘바보 노무현’의 외길 / 2002.4.24
· ‘바보 노무현’의 도전, 지역주의 허문 씨앗이 되다 / 2019.5.20
· 보듬어준 종로서 꿈꾼 선거개혁…20년 지나 되살아나 / 2019.5.21


노무현을 두려워한 사람들

노무현을 마음에 담아둔 사람은 일찍부터 많았다. “문화방송 텔리비전의 ‘퀴즈 아카데미’ 시청자퀴즈 공모에서 올해의 ‘한국의 인물’로 노무현 의원이 선정됐다.” 1988년 12월25일치 한겨레에 실린 기사다.(그때는 ‘텔리비전‘으로 썼나 보다) 한겨레21은 1999년과 2000년에 호감 가는 정치인이 누구인지 시민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했다. 두번 다 1위는 노무현. 정치인들 사이에서는 이회창과 이인제가 ‘차기 대권’이라 불리던 시절인데 그랬다.

노무현이 표지 인물로 처음 등장한 <한겨레21> 1999년 7월1일치(왼쪽). 노무현은 2002년 3월28일치에 다시 표지에 등장했다. 제목은 무려 “노무현 대통령?”이다.
노무현이 표지 인물로 처음 등장한 <한겨레21> 1999년 7월1일치(왼쪽). 노무현은 2002년 3월28일치에 다시 표지에 등장했다. 제목은 무려 “노무현 대통령?”이다. ⓒ한겨레

노무현을 두려워한 이들도 일찍부터 있었다. 노동자 집회에서 한 말이 앞뒤 맥락 잘리고 악의적으로 보도된 사건이 일어나 노무현이 항의했다는 기사가 1988년 12월29일치 한겨레에 실렸다. “<주간조선>이 허위사실을 보도해 노무현의 명예를 훼손하였다”는 기사는 1992년 12월5일치. 재계에서 노무현을 “친노동계 정치인”으로 분류해 견제한다는 2000년 4월8일치 기사도 있다.

· [한겨레21] 떴다, 노무현! / 2002.3.20
· [한겨레21] 한겨레21, 노풍을 처음 예보하다 / 2002.12.27  

 

종로, 이명박…‘악연’의 시작

한국의 정치지형에서 제3세력은 가능한가? 노무현도 한때 이 문제를 고민했던 것 같다. 1996년 국회의원 선거 때 노무현은 김영삼과 김대중의 ‘거대 양당’에 거리를 둔 채 독자세력으로 서울 종로에 출마한다. 결과는 낙선. 이때 그를 꺾고 당선된 사람이 이명박이다.

1996년 국회의원 선거 때 서울 종로에 출마한 노무현과 이명박. 후보 등록 하러 온 두 사람이 악수하는 장면을 이종근 기자가 찍었다.
1996년 국회의원 선거 때 서울 종로에 출마한 노무현과 이명박. 후보 등록 하러 온 두 사람이 악수하는 장면을 이종근 기자가 찍었다. ⓒ한겨레

그런데 얼마 뒤 이명박은 선거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는다. 수를 쓴다. 의원직을 잃기 전에 사퇴를 선언한 것이다. 1998년에 보궐선거가 열리고 노무현이 당선된다.(이때는 김대중이 이끄는 새정치국민회의에 몸담고 있었다) “종로는 정치1번지”라는 말을 소개할 때 거론되는 일화다. 노무현과 이명박, 두 사람의 악연이 종로에서 시작했다는 사람도 있다.

별세한 김종수 기자가 남긴 이 사진은 2009년의 잔인한 5월을 잊지 못하게 만들었다. 아직도 이 사진을 볼 때면 마음이 일렁인다.
별세한 김종수 기자가 남긴 이 사진은 2009년의 잔인한 5월을 잊지 못하게 만들었다. 아직도 이 사진을 볼 때면 마음이 일렁인다. ⓒ한겨레

광주의 선택…‘노무현 대통령’을 믿기 시작하다

노무현은 김대중 정부에서 장관을 지내고 2002년에 대선후보 국민경선에 뛰어든다. 노무현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대통령이 되리라 예상한 사람은 적었다. 후보 경선은 이인제가, 대선 본선은 이회창이 이길 것이라고들 생각했다.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광주경선이 있던 3월16일부터였다. 지역주의에 맞서 싸운 그에게 새 미래를 기대했을까? ‘학살 주범’ 전두환 일당을 몰아세우던 청문회 스타를 잊지 않았던 걸까? 광주시민의 선택은 영남사람 노무현이었다. 의미는 컸다. “노무현은 좋지만 설마 대통령이 될까” 의심하던 사람들이 “정말 대통령이 된다”고 믿기 시작했다.

광주경선에서 승리한 노무현. 이종근 기자가 찍었다. 나는 그날 노무현이 활짝 웃었다고만 기억했는데 사진을 다시 보니 여러 감정이 뒤섞인 표정이다. 활짝 웃기만 하던 쪽은 “세상이 바뀐다”며 설레던 그날의 나였을지도 모르겠다.
광주경선에서 승리한 노무현. 이종근 기자가 찍었다. 나는 그날 노무현이 활짝 웃었다고만 기억했는데 사진을 다시 보니 여러 감정이 뒤섞인 표정이다. 활짝 웃기만 하던 쪽은 “세상이 바뀐다”며 설레던 그날의 나였을지도 모르겠다. ⓒ한겨레

2002년 후보 경선 기간에 노무현은 말했다. “아무도 ‘노풍’을 예견하지 못했는데 딱 한군데 노무현을 알아주고 노풍을 예언한 곳이 있다. 바로 <한겨레21>이다.”

노무현이 표지 인물로 처음 등장한 것은 1999년 7월1일치 한겨레21이다. ‘여론조사를 해보니 1등이더라’는 기사였다. 2002년 3월28일치에 다시 표지에 오른다. 제목은 무려 “노무현 대통령?”이다. 후보 경선 초반인데 말이다.

“처음 염두에 두던 표지 제목은 ‘솟는 노무현 대안론’ 정도였다. 광주경선 현장에서 떠오른 제목은 ‘노무현 돌풍’이었다. 머리를 맞댄 끝에 나온 최종 표제는 ‘노무현 대통령?’이었다. 한 후배는 ‘?보다 !가 나았을 것’이라고 농담처럼 건넸다. 민주당 일부에선 너무 나가지 않았느냐는 반응도 나왔다.” 2002년 4월11일치 한겨레21에 임석규 기자가 털어놓은 뒷이야기다.

· [한겨레21] 노무현, 호남 지역주의에 돌진! / 2003.10.7  

 

“노무현과 난 전생에 형제였나 보다”

노무현과 김대중은 어떤 사이였을까. 둘 사이가 서먹하다는 추측이 한때 유행했다. 김대중은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지도자였다. 노무현이 대선후보가 되었을 때도 좋다 싫다 내색이 없었다. 둘 사이가 나쁘다는 주장도 있었다. 김대중이 아끼던 박지원이 2003년에 이른바 ‘대북송금 특검’으로 구속되고,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이 2004년에 갈라서는 상황을 보면서였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는 과연 불편했을까?

청와대를 떠나는 김대중을 노무현이 환송하는 모습. 2003년 2월 취임식 직후 김봉규 기자가 찍었다.
청와대를 떠나는 김대중을 노무현이 환송하는 모습. 2003년 2월 취임식 직후 김봉규 기자가 찍었다. ⓒ한겨레

이제는 그런 오해를 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2008년에 김대중은 밝혔다. “노무현 대통령과 나는 이상하게 닮은 점이 많다. 전생에 형제 사이였나 보다.” 2009년 노무현이 세상을 떠나자 김대중은 “내 몸의 절반이 무너져내린 것 같다”며 괴로워했다. 노무현의 영결식 때 김대중의 슬피 우는 모습을 보며 많은 사람이 따라 울었다. 최근 귀가 솔깃한 증언이 나왔다. “2002년 광주경선에서 노무현이 1위를 할 수 있도록 김대중이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올해 4월17일 <에스비에스>(SBS)에 출연한 박지원의 주장이다. “민주당의 가치관과 정통성은 노무현에게 있다”고 김대중은 생각했다는 것이다.

서울역광장에 마련된 분향소에서 2009년 5월에 김대중은 말했다. “노무현의 유지를 받들어 민주주의를 회복하겠다”고. ‘유지’라니. 먼저 떠난 후배의 ‘유지’를 입에 올리는 손윗사람의 심정이 어땠을까. 그해가 다 가기 전 김대중 역시 세상을 떠났다. 촬영은 이종찬 기자.
서울역광장에 마련된 분향소에서 2009년 5월에 김대중은 말했다. “노무현의 유지를 받들어 민주주의를 회복하겠다”고. ‘유지’라니. 먼저 떠난 후배의 ‘유지’를 입에 올리는 손윗사람의 심정이 어땠을까. 그해가 다 가기 전 김대중 역시 세상을 떠났다. 촬영은 이종찬 기자. ⓒ한겨레

이 증언은 어디까지 사실일까? 2002년 3월25일치 한겨레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노무현에게 밀리던 경쟁 후보 이인제가 “노무현 돌풍의 배후에 김대중이 있으며 둘의 연결고리는 박지원”이라는 주장을 편 것이다. 이때는 지어낸 말이라고들 생각했는데, 웬걸, 박지원의 증언이 나온 뒤 다시 보니 흥미롭다.

· [한겨레21] 의리로 얻어낸 신뢰의 상표 / 2004.1.29
· [한겨레21] DJ와 노무현, 전생에 형제간이려나 / 2009.8.27 

 

노무현과 제주

제주4·3평화기념관에 갈 때마다 나는 노무현의 영상을 본다. 4·3사건 때 국가가 저지른 폭력을 국가원수로서 사과하는 영상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모습이기도 하다.

2006년 제주. 4·3사건 희생자 위령제에 참석해 분향하고 묵념하는 노무현. 현직 대통령으로 처음이었다. 촬영은 장철규 기자.노무현
2006년 제주. 4·3사건 희생자 위령제에 참석해 분향하고 묵념하는 노무현. 현직 대통령으로 처음이었다. 촬영은 장철규 기자.노무현 ⓒ한겨레

문재인이 다시 봉하를 찾는 날

문재인은 부산의 인권변호사였다. 한겨레 지면에 1988년부터 자주 등장한다. 오랜 친구 노무현의 선거도 도왔다. 그런데 의외다. 노무현의 선거 사진은 많은데 문재인이 찍힌 사진이 거의 없다. 여느 정치권 인사들이 노무현과 함께 사진을 박으려고 어떻게든 카메라에 얼굴을 들이밀 때 문재인은 묵묵히 자기 일을 했던 것이다.

그런 문재인에게 언론의 관심이 집중된 것은 2004년부터다. 이른바 ‘노무현 탄핵 정국’ 때 노무현 쪽 대리인단 간사로 활약했기 때문이다. 헌법재판소는 5월14일에 탄핵을 기각했다. 노무현은 대통령직을 지켜냈다.

헌법재판소는 5월14일 대통령의 노무현의 탄핵소추안을 기각했다. 노무현은 대통령직을 지켜냈다. 선고가 나던 날 법정을 나서는 문재인의 표정을 김태형 기자가 사진에 남겼다. 좀처럼 개인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도, 이날만큼은 뭉클한 기쁨을 참지 못했던 것 같다.
헌법재판소는 5월14일 대통령의 노무현의 탄핵소추안을 기각했다. 노무현은 대통령직을 지켜냈다. 선고가 나던 날 법정을 나서는 문재인의 표정을 김태형 기자가 사진에 남겼다. 좀처럼 개인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도, 이날만큼은 뭉클한 기쁨을 참지 못했던 것 같다. ⓒ한겨레

문재인은 대통령이 되자 봉하의 노무현 묘소를 찾았다. 임기 중에 더 오지 않겠다고, 성공한 대통령이 되어 퇴임 뒤 다시 오겠다고 밝히던 일이 기억에 생생하다. 문재인이 다시 봉하를 찾는 날, 그의 웃는 얼굴을 보며 어쩌면 많은 사람이 눈물을 흘릴지도 모르겠다.

· ‘노무현 상주’ 문재인, 10년 전 오늘 조문객들에게 부탁한 말 / 2019.5.24

▶ 1회 해설자인 김태권 작가는 만화가입니다. 글도 쓰고 일러스트도 그립니다. 요즘은 주로 관악산 자락에서 두 아이를 떠메고 다니며 시간을 보냅니다.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와 <히틀러의 성공시대> 등의 만화책을 그렸고, <불편한 미술관>과 <에라스뮈스와 친구들>, <먹히는 자에 대한 예의> 등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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