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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윤미가 돌연 브루클린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다

[소설 '리셋'챕터⑫]

ⓒhuffpost

조광희 작가의 미발표 신작장편 ‘리셋’은 새로운 감각의 스릴러 소설로, 현직 서울시장의 요청을 받고 전임 시장이 연루된 비리를 파헤치는 변호사의 이야기를 속도감 넘치는 필치로 그리고 있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은 뜻하지 않은 음모에 휘말리면서 21세기 한국사회의 다양한 민낯과 부패의 심연을 들여다보게 된다. 매주 월, 수, 금 오전에 업데이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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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벨이 연신 울렸다. 겨우 눈을 뜬 동호는 어젯밤에 반쯤 마시다가 남긴 스페인산 와인이 탁자 위에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라벨 속에 그려진 닭이 빨리 일어나라고 울어대는 것 같았다. 머리맡의 스마트폰을 들었다. 오전 여덟 시였다. 전화를 받자 정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통화 괜찮으세요?”

“무슨 일이야?”

“편윤미가 지금 공항으로 가고 있어요. 어제 주소를 확인하고 남 사무장님이 새벽에 집 앞에 가서 살펴보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여행용 가방을 들고 나왔대요. 택시 타고 근처 호텔로 가더니 공항으로 가는 리무진버스를 탔어요.”

“무슨 비행기를 타려는 거지?”

“가방 크기로 봐서 국내는 아니래요. 이 사무장님이 버스에 같이 탔는데, 인천공항에서 확인한대요. 어느 카운터에 줄을 서는지 보면 대략 알겠죠.”

“오케이. 수고.”

동호는 탁자 위에 놓인 와인병과 육포를 치웠다. 스마트폰 트위터 앱을 열었다. 편윤미의 계정을 들어가려 했으나 사라지고 없었다.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동네 마실 나온 사람처럼 편안한 복장을 한 기태는 편윤미가 앉은 자리에서 뒤로 떨어져 앉았다. 그는 스마트폰을 보는 척하며 편윤미의 동태를 살폈으나, 그녀는 미동도 없이 계속 거리를 바라보았다. 지루해진 기태가 깜박 조는 사이에 버스는 인천공항으로 들어섰다. 그는 편윤미를 따라 내린 후, 그녀가 버스 짐칸에서 가방을 꺼내는 동안 건물 기둥에 기대어 기다렸다. 편윤미는 가방을 끌고 공항 안으로 들어가더니 아시아나항공사 앞에서 줄을 섰다. 기태는 그녀를 주시했다. 안내 모니터에는 파리행, 방콕행, 뉴욕행 비행기의 일정이 뒤섞인 채 표시되고 있어서 그녀의 행선지가 어디인지 알기 어려웠다.

기태는 편윤미가 카운터에서 발권을 하며 짐을 부칠 때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그녀는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다 말고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기태는 슬쩍 비켜서 지나간 후에 다시 근처에서 편윤미를 지켜보았다. 그녀는 발권을 한 후 여권에 티켓을 끼우고 걸었다. 망설이던 기태가 그녀에게 다가가서 일부러 부딪쳤다.

“어, 죄송합니다.”

기태는 여권과 티켓을 주워 주며 행선지를 순식간에 살폈다. 그녀는 화를 내지 않고 무심히 여권과 티켓을 돌려받았다. 기태는 전광판으로 가서 뉴욕행 아시아나 비행기의 이륙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11시 30분에 출발하는 비행기였다.

 

니나는 캐주얼한 펍에서 동료들과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전화벨이 울리자 그녀는 밖으로 걸어 나가서 전화를 받았다.

“서울은 어때? 잘 지내고 있어? 잘 안 들려. 아, 잘 지낸다고. 뭐? 누가 뉴욕에 온다고?”

펍 앞의 다소 어두운 골목으로 대학생 몇 명이 맥주병을 입에 물고 지나갔다.

“그럼 자세한 내용은 메시지로 보내줘. 내가 집에 돌아가서 읽어보고 응답할게. 아무튼 내일 존 에프 케네디 국제공항에 가서 어떤 여자를 쫓아가라는 이야기지? 언젠가는 한번 이런 일을 해보고 싶었어. 공항에서 나오는 거니까 총은 없겠지?”

니나는 다시 펍으로 들어가서 하이네켄 맥주를 병째로 들이켰다. 오전에 짧게 친 단발이 잘 어울렸다.

ⓒCribbVisuals via Getty Images

니나는 동호가 전송한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선글라스를 낀 새까만 머리의 여인은 하얀색 블라우스에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니나는 쏟아져 나오는 승객들을 살폈다. 비행기가 착륙했다는 안내 문구가 전광판에 나타난 지 벌써 사십여 분이 지났다. 이미 청바지의 여인을 놓친 것이 아닐까 걱정됐다. 그때 키가 크고 청바지를 입은 동양인이 나타났다. 선글라스는 쓰지 않았으나 사진에 나타난 은색 여행용 가방을 끌고 있었다. 화장실에 들렀다 나온 편윤미는 건물에서 빠져나와 택시를 탔고, 니나는 대기 중이던 줄리의 혼다 승용차에 탔다. 편윤미가 탄 택시는 브루클린 방향으로 달렸고 프로스펙트 파크 동쪽에 위치한 어느 주택 앞에 멈추었다. 미리 전화를 했는지, 택시가 멈추자마자 한 동양인 여성이 주택에서 나왔다. 두 사람은 반갑게 손을 잡고 집으로 들어갔다. 주택에서 이십 미터쯤 떨어진 차도에 정차를 하고 바라보던 니나가 입을 열었다.

“이제 어떻게 하지?”

“동호씨에게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요?”

니나는 동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바로 회신을 받은 니나는 줄리에게 말했다.

“오늘은 일단 집에 들어가고 내일부터 감시를 해주면 좋겠다고 해서 내가 토요일인 내일만 가능하다고 말했어. 저기 모퉁이 레스토랑에서 아침 열 시경에 브런치를 먹으면 어떨까? 감시하다가 둘이 번갈아가면서 프로스펙트 파크에 산책도 다녀오고.”

“좋은 생각이네. 브루클린 미술관에도 다녀오자.”

“지금 레스토랑에 예약할게.”

 

니나와 줄리는 레스토랑 ‘프로스펙트 이스트’의 바깥 자리에 앉았다. 주말 아침의 햇살이 따사로웠다. 니나는 수프를 떠먹으면서도 계속해서 편윤미가 머무는 주택을 쳐다보았다. 동양인 여성이 주택을 나왔다가 식료품이 든 쇼핑 봉투를 들고 다시 들어갔을 뿐, 편윤미는 내내 집안에만 있는 듯했다. 다른 사람의 출입도 없었다. 줄리가 궁금증을 견디지 못하고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래?”

“그냥 중요한 일이라고만 하고 안 알려주네. 불법은 아니라고 하고. 그런데 저 여자 어때? 매력 있지?”

“왜, 관심 있어?”

“약간.”

“키 큰 여자는 안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사람 나름이지. 참, 브루클린 미술관에서 전시하는 게 뭐야?”

“수묵화를 현대적으로 그리는 중국 작가인데 이름은 잊어버렸어.”

“같이 갈 수는 없고 각각 다녀와야 되겠네.”

둘은 샌드위치를 먹으며 크랜베리 주스를 마셨다. 프로스펙트 파크에서 날아온 아침 새들이 햇빛을 받으며 레스토랑 주위를 날아다녔다. 니나는 종업원을 불렀다.

“저희가 오늘 이 레스토랑에서 하루를 보낼까 해요. 중간에 공원도 다녀오고, 여기서 책도 읽고 할게요. 점심도 주문하고 그때그때 음료도 주문할게요. 저희가 마음 편하게 있으려고 미리 알려드리는 거예요.”

눈썹이 유난히 짙은 웨이트리스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맨해튼에서 오셨나 봐요. 공원 안 호수도 아름다우니까 다녀오세요. 가끔 이 레스토랑에 와서 주말을 보내는 분들이 있지요.”

 

니나는 졸고 있는 줄리를 웃으며 쳐다보았다. 줄리가 낌새를 느꼈는지 눈을 떴다. 니나가 의자에 앉으면서 물었다.

“저녁 먹을까?”

“여기서? 해 질 때까지 있다가 저녁은 집에 가서 먹으면 좋겠는데.”

“그러자. 7시 30분까지만 있다가 집으로 가자.”

줄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테이블에 놓인 폴 오스터의 『브루클린 풍자극』을 들어서 펼쳤다. 니나는 브루클린 미술관의 팸플릿과 미네랄워터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저쪽 테이블에 앉아 있는 중년의 동양인 남자를 보았다. 니나가 미술관에 다녀온 사이에 들어온 이 남자는 깍지 낀 두 손을 머리 뒤로 두른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결연한 턱 선만으로도 매우 강인한 인상이었다. 니나는 줄리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 남자는 언제 왔어?”

“이십 분쯤 된 것 같은데, 왜?”

“일본인일까?”

“저 양복은 긴자의 양복점에서 맞췄을 것 같은 느낌이야.”

니나는 남자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그때 줄리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잠깐만.”

니나는 줄리의 눈길이 머무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어느새 편윤미가 레스토랑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가 니나 쪽으로 걸어오자 놀란 니나는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편윤미는 니나 쪽으로 오다 말고 그 중년 남자 앞에 앉았다. 줄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남자는 편윤미가 앉는 기척에 눈을 가늘게 떴다. 웨이트리스가 테이블로 오자 편윤미는 무언가를 주문했다. 니나에게는 들리지 않았으나 짧게 한두 마디로 주문한 것으로 보아 식사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니나는 줄리에게 자동차 키를 달라고 했다. 자동차로 가서 운전석에 앉아 심호흡을 했다. 스마트폰으로 확인을 하니 서울은 아침 여섯 시경이었다. 니나는 동호에게 편윤미가 숙소 근처 레스토랑에서 어떤 남자를 만나고 있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고는 차 안에서 두 사람의 사진을 몇 장 찍어 전송했다.

니나가 차에서 돌아왔을 때, 편윤미는 얼굴을 양손으로 감싸고 있었다. 남자는 편윤미의 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으나 그녀는 완강히 뿌리쳤다. 그녀가 남자에게 무슨 말을 빠르게 쏟아내는 것 같았으나 잘 들리지 않았다. 남자는 매서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듣기만 했다. 편윤미는 남자의 그런 태도에 감정이 더욱 고조되었는지, 손으로 테이블 위 물컵을 거칠게 넘어뜨렸다. 물컵이 테라스 바깥으로 떨어지면서 산산조각이 났다. 다른 테이블에서 주문을 받던 웨이트리스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잠시 바라보더니 침착하게 편윤미의 테이블로 왔다.

편윤미가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에게 주먹을 날렸지만 그만 남자에게 손목을 잡히고 말았다.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며 남자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고는 남자를 증오의 시선으로 몇 초간 쳐다보다가 레스토랑에서 나갔다. 편윤미는 다시 숙소로 들어갔고, 남자는 아까처럼 양손을 깍지 낀 채 머리를 뒤에서 감싸 안았다. 눈을 감지는 않았다. 웨이트리스가 말없이 깨진 컵을 치웠다.

십여 분이 흘렀을까, 검은색 차량이 레스토랑으로 다가왔다. 웨이트리스를 불러 계산서를 받은 남자는 무언가 길게 말을 건넨 후에 신용카드를 주었다. 팁을 적지 않게 받았는지 웨이트리스의 얼굴이 환해졌다. 키가 작은 운전기사가 차에서 내려 뒷문을 열어주자 남자는 뒷좌석에 올라탔다. 그는 차창을 내려 편윤미가 들어간 주택 쪽을 바라보았다. 니나는 차 옆에 선 운전기사가 차창을 통해 그 남자와 대화하는 장면을 스마트폰으로 촬영했다. 운전기사는 대화를 마치고 차를 그 주택 앞으로 움직였다. 오 분쯤 지난 후, 차는 주택을 떠났다.

노을에 조금씩 물들어가는 브루클린의 거리가 적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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