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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창한 산 밑에 요새처럼 자리한 수장고가 보였다

[소설 '리셋' 챕터 9]

ⓒhuffpost

조광희 작가의 미발표 신작장편 ‘리셋’은 새로운 감각의 스릴러 소설로, 현직 서울시장의 요청을 받고 전임 시장이 연루된 비리를 파헤치는 변호사의 이야기를 속도감 넘치는 필치로 그리고 있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은 뜻하지 않은 음모에 휘말리면서 21세기 한국사회의 다양한 민낯과 부패의 심연을 들여다보게 된다. 

9

기태가 갤러리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자 동호는 곧바로 조수석에서 내렸다. 백화점에서 새로 구입한 양복이 거북한 느낌도 있었지만, 잘 차려입은 만족감도 없지 않았다. 기태의 계획대로 그림을 모으는 중인 부유한 변호사로 보일런지는 모를 일이었다. 기태도 나름 캐주얼하면서도 신경을 쓴 옷차림이었다. 둘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갔다. 전시장 입구에는 기태가 전에 보았던 직원과 다른 직원이 앉아 있었다. 동호는 전시장으로 들어가서 전시된 그림들을 살펴보았다. 특정 작가의 작품이 아니라 화랑의 국내외 소장품들을 전시하고 있었다. 동호가 그림을 구경하다가 돌아보니 기태와 직원이 자연스럽게 웃으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동호는 ‘그것도 재주라면 재주네’라고 생각하며 전시장을 마저 둘러보았다. 층고가 높은 전시장은 잘 관리되어 있었다.

동호는 기태와 직원에게 다가갔다. 기태의 사전 작업이 원활했는지 직원이 자리에서 급히 일어나 깍듯하게 인사했다. 동호는 어정쩡하게 인사를 받았다.

“좋은 그림은 다 수장고에 있다면서요?”

“양평 수장고요? 아마 그럴 거예요. VVIP들은 그리로 직접 가시는 것 같은데. 저도 이야기만 들었지 못 가봤어요.”

“우리 변호사님이야 말로 진짜 VVIP일 텐데. 미래화랑만큼은 아니겠지만 제법 큰 그림 창고를 갖고 계시거든.”

“그런 얘기까지 뭐하러.”

“왜요, 창고에 보안장치를 제대로 해야겠다고 일전에 변호사님이 말씀하셨잖아요. 아, 혹시 여기 보안장치 업체 연결해줄 수 있나? 아무래도 일반 보안 업체랑 좀 다르지 않겠어요?”

“다를 거예요. 양평 수장고는 보안이 철저하다고 관장님이 자랑하시긴 했거든요.”

“역시 통하는 게 있어. 연락처 좀 알려줘요. 이렇게 또 인연이 되네.”

“거기 직원이 정기적으로 갤러리에 들르는데, 잠깐만요, 어딘가 명함이 있을 거예요.”

직원이 책상 서랍을 열어서 뒤적거리더니 명함을 건네주었다. 기태가 스마트폰으로 명함을 찍는 사이, 동호는 놀란 표정을 감추며 그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았다.

“다음에는 오 관장님 계실 때 올게요. 미리 전화해서 관장님이 계신지 확인하면 되겠죠?”

“네.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는 대게 오후에 사무실에 계시니까 미리 전화주세요.”

동호와 기태는 직원에게 인사를 하고 전시장을 나왔다.

 

미래화랑에서 알려준 <은성보안>은 예술의 전당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 화강암으로 마감을 한 2층 건물에는 보안 업체답게 구석구석 CCTV가 자리 잡고 있었다. 기태는 출입문 앞에서 미리 방문 의사를 알려둔 엄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 부장이 직접 나와 회의실로 안내했다.

“미래화랑에서 소개를 받으셨다고요?”

“<은성보안>이 최고라고 하더군요.”

“창고 크기가 얼마나 되나요?”

“이제 구입하려고 하는 겁니다. 적당한 전원주택을 하나 사서 그 용도로 쓰려고 하는 것이라서 창고라고 하기는 좀 그렇습니다. 그런데 보안장치를 어떻게 하는지 미리 알아두면 주택을 구입할 때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공사도 해야 할 텐데, 아예 보안장치를 염두에 두고 공사할 수도 있고.

“맞습니다. 아예 공사할 때 같이하면 좋지요. 물론 어떤 건물이든 보안시스템을 완벽하게 시공할 수 있지만요.”

“정말 완벽한 수준입니까?”

“미래화랑에서 소개받으셨다면 아시지 않습니까. 거기 양평 수장고, 저희가 직접 설계하고 시공한 겁니다. 관장님이 얼마나 까다롭고 철저하신지. 고생 좀 했습니다만, 공공기관이 아닌 사설 갤러리 수장고로는 수준급이죠.”

“홍채 인식, 이런 거 말씀이십니까?

“보안장치야 하기 나름이지요. CCTV, 홍채 인식, 경보 장치 등은 기본이지요. 요즘은 CCTV 영상을 스마트폰으로 계속 확인하기도 합니다.”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주신다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만.”

ⓒworaput via Getty Images

기태는 내비게이션이 안내하는 대로 양수리를 지나 춘천으로 가는 구도로에서 좌회전했다. 논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몇 분 정도 운전해 가자, 울창한 산 밑에 요새처럼 자리한 수장고가 보였다.

“변호사님은 일단 차 안에 계세요. 제가 수장고 주변 좀 둘러볼게요.”

기태는 시동을 끄고 미세먼지용 마스크를 썼다. 그는 20미터 가량 떨어진 수장고로 걸어갔다. 수장고 옆 경비실에는 불이 켜져 있었으나 경비원은 없었다. 여직원이 부주의하게 발설한 것처럼, 2교대로 지키는 경비원들은 일요일 밤에는 모두 쉬고 있었다. 기태는 엄 부장의 설명에서 힌트를 얻은 대로 CCTV가 촬영하는 공간을 교묘히 피하며 마치 영화 스튜디오처럼 보이는 수장고를 여러 각도에서 촬영했다. 수장고는 단층이었고 황금 비율의 직사각형 모양이었다. 짧은 쪽의 길이가 30미터쯤 되어 보였고, 2층 건물 높이였다. 수장고 주변에는 플라타너스가 빽빽하게 심겨 있었다.

10여 분간 사진을 찍던 기태는 멀리서 차량이 접근하는 소리가 들리자 플라타너스에 몸을 숨겼다. 한 남자가 경비실 옆에 차를 세우고 내렸다. 부학개발 전무였다. 그는 경비실 앞에서 담배를 피웠다. 기태에게 멘솔 담배 냄새가 전해졌다. 기태는 동호에게 ‘전무가 수장고에 왔어요. 차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니 스마트폰을 그만 보세요’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다시 15분쯤 지났을 때 마이바흐 차량이 다가왔다. 그러나 차에서는 아무도 내리지 않았다. 전무는 누군가 내리기를 기다리다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지 차로 다가갔다. 운전석에 누가 탔는지를 확인하려고 허리를 숙이는 순간, 갑자기 차문이 열렸다. 그리고 단신의 남자가 내렸다.

기태는 카메라를 동영상 모드로 놓고 촬영을 시작했다. 남자는 전무에게 인사를 하는 듯하더니 갑자기 그의 배를 세게 걷어찼다. 보통 날렵한 솜씨가 아니었다. 전무가 비틀거리자 남자는 복싱 자세를 취하더니 전무의 안면을 주먹으로 가격했다. 전무가 뒤로 쓰러지자 남자는 그를 수풀로 안으로 끌고 갔다. 3~4분쯤 지나자 남자는 마이바흐의 트렁크를 열고 축 늘어진 전무를 실었다. 기태는 조심스럽게 자기 차로 걸어갔다. 마이바흐가 떠나자마자 그는 재빠르게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먼발치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동호는 이미 충격에 휩싸여 있었다. 기태가 차를 몰고 달리기 시작했다.

“따라가려고?”

“그래야죠. 잠깐 이 카메라로 저 차 좀 촬영하고 있어요. 동영상 모드로.”

동호는 기태가 알려주는 대로 카메라를 작동시켰다. 기태는 마이바흐가 의식하지 못하도록 멀리 떨어져서 따라갔다. 20분 정도 달린 마이바흐는 어느 야산의 작은 길로 접어들었다. 기태는 마이바흐가 눈치챌까 봐 작은 길로 들어서지 못하고 근처에 차를 세웠다. 앞서 50미터쯤 올라가던 마이바흐의 헤드라이트가 꺼졌다.

기태는 동호에게서 카메라를 넘겨받은 후에 차에서 내려 작은 길로 걸어갔다. 30분쯤 지나자 기태가 헐레벌떡 차로 뛰어 들어왔다. 작은 길에서 나오던 마이바흐가 기태의 차 옆으로 지나갔다. 운전석에 앉아 있던 그 남자는 기태의 SUV를 유심히 살폈다. 기태 차의 선팅이 짙어서인지 그 남자는 안에 사람이 있는 것은 모르는 듯했다.) 기태는 마이바흐가 지나쳐 간 후 다시 재빨리 뒤쫓았다. 그러나 마이바흐가 엄청난 속력으로 달려갔는지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전무를 등산로 옆에 묻었어요. 변호사님, 이제 어떻게 하죠?”

기태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떨리고 있었다. 동호는 그 앞에서 침착함을 유지했다.

“혹시 차량 번호 봤어?”

“그럴 정신이 아니었어요. 동영상으로 촬영해놨으니 아마 확인할 수 있을 거예요.”

“나중에 확인하기로 하지.”

“신고를 해야 할까요?”

“우리가 거기 왜 갔는지 어떻게 설명할 건데?”

“그러네요. 그런데 아까 그 단신 얼굴 보셨어요? 어쩐지 섬뜩하던데요. 변호사님, 아무래도 이거 그냥 조사로 끝날 사건이 아닌 거 같아요.”

 

올림픽대로를 달리던 차가 한남대교 부근에 이르렀을 때 동호가 기태에게 말했다.

“서래마을 입구에 내려줘.”

“왜요? 레지던스로 안 가세요?”

“잠깐 만날 사람이 있어서. 촬영한 동영상은 시간되는 대로 확인해 줘. 그리고 피시나 노트북에 저장하지 말고 따로 보관해.”

 

동호는 시계를 보았다. 저녁 9시 35분, 그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서래마을로 이어지는 가파른 계단에 앉았다. 내리막길 옆에 있는 빌라의 2층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두 시간 전 살인을 목격한 동호는 자신이 왜 여기에 왔는지 자문해보았다. 극도의 긴장으로부터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은 걸까. 만일 저 빌라의 불 켜진 2층에 다른 남자의 실루엣이 언뜻 비치지만 않았더라면 동호는 근처를 지나치다가 메시지를 보낸다고 둘러댔을 것이다. 선우가 다른 일로 멀리 있었다면 동호는 산책한 셈 치고 서래마을 입구에서 142번 버스를 타고 레지던스로 돌아갔을 것이다. 선우가 집에 있었다면, 그리고 지금과 달리 혼자 있었다면 동호는 선우와 저 아래 커피숍이나 일본식 선술집에서 미심쩍은 갤러리로부터 시작하여 예술에 대해서, 그리고 그들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어쩌면 선우의 빌라로 가서 아주 오랜만에 근사한 섹스를 나눴을 것이다. 눈으로 대화를 하며, 이끌고 이끌리며 조금씩 흥분에 빠져드는 섹스를 하다가 어쩌면 저 빌라에서 잠들었을 것이다. 둘은 어쩌면 다시 사랑에 빠졌을 것이다.

‘망할 놈의 독일인.’ 동호는 얇은 커튼 너머로 일렁이는 그림자를 다시 보았다. ‘빌어먹을 나치. 메피스토펠레스 같은 놈.’ 동호는 침을 삼켰다. 목이 말랐다. 흐린 탓인지 별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면 안경을 맞추어야 하나? 혹시 여자 친구가 아닐까? 맞아, 키 작고 통통한 그 친구의 이름이 뭐였지. 아니, 그림자의 키가 크구나. 망할 놈.’ 동호는 문득 젖가슴의 감촉을 기억해냈다. 그것이 볼에 닿을 때의 적당한 따뜻함과 부드러움을 기억해냈다. 동호는 자신을 여기까지 이끌어 기어코 바보로 만든 것이 그 감촉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아니, 그는 알고 있었다. 다만 그것을 의식적으로 직시하기를 거부했을 뿐. 보아야 되는 것은 아무리 괴로워도 직시하자고 매사에 얼마나 다짐했던가. ‘자신은 보아야 하는 것을 회피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은근한 자부심이 그를 더 처량하게 만들었다. ‘정말 남자가 맞나?’ 그때 커튼이 살짝 열렸다. 키 큰 여성이 보였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동호는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끼면서 마음의 동요를 일으킨 자기 자신이 수치스러웠다. 소설에서, 가요에서, 그토록 자주 묘사된 이런 뻔한 감정의 덫에 걸려들었다는 사실이 혐오스러웠다. 반복되어 나타나는 그 패턴들이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위험성을 알아차렸어야 했다. 동호는 배낭을 메며 계단에서 일어났다.

 

동호는 선우를 바래다주고 나면 늘 걷던 길을 걸었다. 국립중앙도서관의 앞뜰을 가로질러 학술원 방향으로 걸었다. 나무들이 아스팔트길로 쏟아질 듯 어둡게 드리워져 있었다. 성모병원에서 서초역으로 이어지는 대로에 이르렀다. 동호는 택시를 기다렸다. 건너편으로 택시가 간간이 지나갔으나 이쪽 방향으로는 오지 않았다. 그는 길을 건너지 않고 서초역까지 걸었다. 다시 교대역까지, 그리고 강남역까지 걸었다. 그는 강남 역 정류장에서 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는 승객이 세 명밖에 없었다. 그들마저도 모두 곧 내렸다. 한강을 건너는 버스 창밖으로 희미한 별이 몇 개 보였다. 동호는 자신과 선우가 다시 연인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자신만 미처 몰랐을 뿐 이미 정해진 일이었다는 것도 깨달았다. 동호는 가슴에 통증을 느꼈다. 마음이 아픈 것을 넘어서 실제로 가슴이 아팠다.

버스에서 내린 동호는 횡단보도를 건너 레지던스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바쇼에 들러볼까’ 하고 망설였지만 그냥 쉬기로 했다. 동호를 태운 엘리베이터는 작은 기계음을 내며 무심히 12층을 향해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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