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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기 속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소설 '리셋' 챕터 8]

ⓒhuffpost

8

기태는 새로 구입한 디지털 카메라를 점검하며 나갈 준비를 했다. 성능 좋은 망원렌즈 덕분에 제법 먼 거리에서도 관장이 만나는 사람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사진 속 인물들을 확인하는 것은 정미가 담당했다.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사람들이 많네요. 분야도 어찌나 다양한지. 대기업 대표에 아나운서에 장관에 배우에.”

“특이한 사람들이 있나?”

”열 명 정도는 누군지 알아냈는데, 글쎄요. 특이한 점은 못 찾겠네요. 그런데 한남동 일식집에서 찍은 인물을 아직 확인 못했어요.”

그때 기태의 스마트폰 진동음이 들렸다.

“여보세요. 아, 오늘 저녁 6시? 응, 고마워.”

기태는 전화를 끊으며 휘파람을 불었다.

“누구 전화길래 그러세요?”

“그 일식집 종업원. 그 남자가 오 관장 이름으로 예약했다고. 어디 가서 이발도 좀 하고 슬슬 가볼까?”

“그런데 벌써 말 놓는 사이세요?”

“응?”

“제발, 자중 좀 하시죠? 언젠가 제대로 걸려서 큰코다칠 걸요? 내가 입사하고 몇 달 안 돼서 함부로 낯 뜨거운 농담을 할 때, 그때 고소했어야 했는데. 내가 마음이 약해서.”

“야, 변호사님한테 일러서 쫓겨나기 일보 직전까지 갔으면, 고소한 거나 다름없잖아. 너한테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던 거 기억 안 나?”

“그때 콩밥을 먹였으면 조신하게 살 텐데, 내가 너무 봐줬어.”

정미는 다시 모니터를 보면서 기태를 비웃었다. 기태는 손가락을 꺾어 소리를 내고는 가방에 카메라를 챙겨 넣었다.

“오빠는 나간다.”

“오빠, 좋아하시네.”

ⓒOppdowngalon via Getty Images

기태는 카운터 담당자가 주방장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예약자 리스트를 살폈다. ‘6시, 교토, 2명, 오 관장.’ 기태는 ‘교토’라고 적힌 방의 옆방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종업원이 쪼르르 달려왔다.

“이 방 써도 되나? 혼자지만 비싼 술 시켜서 방에서 마시게.”

종업원은 “그러세요”라고 말하며, 기태의 허리를 살짝 꼬집었다. 기태는 방에 자리를 잡는 척하며 종업원이 사라지길 기다렸다. ‘교토’ 방문을 열어 안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다시 방으로 돌아와 가방 속에서 청테이프와 소형 녹음기를 꺼냈다. 테이프를 10센티미터 정도 입으로 재빨리 잘라낸 후 소형 녹음기 한 면에 붙였다. ‘교토’의 테이블 윗면과 다리 사이에 녹음기를 부착하고 전원 버튼을 켰다. 그러고는 자기 방으로 돌아와 호출 버튼을 눌러 종업원을 불렀다.

“10만 원 안 넘는 선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정종 한 병 하고 스시 정식 하나 줘.”

“난 정종 맛 몰라요. 주방장에게 물어봐서 적당한 거 드릴게요.”

기태는 종업원 손목을 슬쩍 잡으며 말했다.

“일하면서 같이 홀짝홀짝 마시자고.”

종업원은 싫지 않은 기색으로 눈을 흘겼다. 기태는 시간을 확인했다. 5시 45분. 종업원이 해삼, 멍게가 든 접시를 놓고 나갈 때, 기태는 문을 살짝 열어두었다. 차가운 정종을 마시며 바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6시가 조금 지나 발소리와 함께 옆방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기태는 취하지 않을 정도로 속도를 조절해가며 정종을 마셨다. 옆방에서는 간간이 언성 높은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 내용은 알 수가 없었다. 기태가 정종 반병을 비웠을 때, 옆방 문이 신경질적으로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먼저 나가고 뒤따라 나가는 발소리. 기태는 문틈으로 복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재빨리 옆방으로 들어가 녹음기를 회수했다. 테이블 위에는 손도 대지 않은 스시가 접시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기태는 방으로 돌아가 가방을 챙겨 나왔다. 종업원이 다가왔을 때 지갑에서 오만 원권 석 장을 꺼내 건넸다.

“나머지는 팁. 관장님 차 타기 전에 말을 붙여야 돼서. 오빠 간다. 전화할게.”

종업원은 입술을 실룩거리며 보일 듯 말 듯 손을 흔들었다. 기태가 밖으로 나왔을 때, 관장의 차는 이미 주차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차에는 관장 혼자 타고 있었다. 기태는 얼른 주위를 살폈다. 몸에 잘 맞지 않는 검은 양복을 입은 그 남자가 한남오거리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뒤쫓을까 생각하다 굳이 따라갈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우선 녹음기에 녹음된 내용이 궁금했다.

 

동호는 서 대표가 보낸 이메일을 확인했다.

[전화로 간단히 말했지만 다시 설명할게. 지난번에 내가 이야기한 기획 있잖아? 손예진도 관심이 많네. 정재하고 예진이가 하겠다면 바로 제작하는 거지. 아무튼 작가가 내가 준 시놉시스로 트리트먼트를 썼어. 그것으로 다시 시나리오를 쓰는 중이야. 그런데 트리트먼트가 법률적으로 말이 되는지 체크 좀 해줘. 사고를 가장해 사라진 사람이 법률적으로 사망자로 처리되려면 법원이 인정을 해줘야 하잖아? 시신은 없지만 사망한 것으로 처리하는 부분들이 말이 되는지. 회사 고문 변호사에게 대충 상담하고 쓰기는 했는데, 한 번 더 확인해보려고.]

동호는 메일에 첨부된 ‘리셋-2015 여름’이라는 제목의 피디에프 파일을 열었다. 문서의 배경에는 희미하게 ‘Pi Entertainment’라는 워터마크가 새겨져 있었다. 동호는 서 대표에게서 이미 들은 부분은 대강 건너뛰고 읽기 시작했다.

<RESET/TREATMENT>

#5, 대검찰청.

수사관이 검사에게 보고하고 있다. A 변호사 사무실에서 이상한 실종 사건을 여러 차례 처리했다는 정보 보고이다. 실종된 사람들은 거액의 사채를 빌린 상태였다. 검사는 수사관에게 반문한다.

“변호사가 어느 사건 잘 처리해서 유사 사건을 또 수임하는 게 그렇게 이상한가? 혹시 자네 요즘 사채업자들하고 어울리나?”

수사관이 얼굴이 벌게진 채 변명을 한다.

#6, 법률사무소 <민>.

주인공, 법률사무소 <민>에서 민 변호사와 커피를 마시고 있다.

“혼자 일하는 게 좋나? 방도 하나 줄 테니 들어와서 일하지 그래?”

“아뇨, 좀 덜 벌어도 자유롭게 있는 게 좋습니다.”

“누님은 이제 좀 어때?”

#7, 요양원.

주인공, 요양원에 있는 누나를 방문한다. 교외의 숲에서 도망치던 여자이다.

“어머니는 건강해. 동생은 속초 해변에서 식당을 하고. 수완이 좋아서 밥 먹을 정도는 되는가 봐. 누나 좀 나아지면 같이 놀러 가자.”

여자는 말이 없고 겁에 질려 있다. 주인공, 침묵에 휩싸였다가 다시 말을 잇는다.

“그놈들 거의 파악이 됐어. 워낙 힘센 놈들이라 제대로 처리하려고 철저히 준비하고 있어. 곧 혼내줄 거야. 미안해. 자꾸 늦어져서.”

#8, 주인공 오피스텔

컴퓨터로 문서를 작성하고 있던 주인공에게 누군가 메신저로 말을 붙인다.

“리셋해주시는 분이 맞나요?”

“무슨 일이시지요?”

“그렇다고 들어서요.”

“어떻게 연락처를 알았나요?”

“박수미 씨에게서 받았어요. 개명한 이름이죠. 우연히 와인 모임에서 알게 되어 몇 달 전부터 많이 친해졌는데, 언젠가 술에 취해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주더군요.”

“빚 문제인가요?”

“아뇨. 돈은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는 못 살아요. 외국에 가고 싶지도 않고요.”

“당신의 스토리와 희망사항을 A4 한 장으로 적어서 보내세요. 마음에 들면 제가 연락을 드릴 것이고, 아니다 싶으면 연락을 안 할 겁니다. 이 계정을 오래 사용하기도 했고, 당신이 이 계정으로 갑자기 말을 걸어왔기 때문에 언제든 없앨 수 있어요. 이제는 제가 연락하기 전에 먼저 말 걸지 마세요.”

#9, 민속주점

사채업자가 검찰 수사관과 술을 마시고 있다.

“좀 알아봤나?”

“변호사는 검사 몇 년 하다가 부장 달기 전에 개업한 변호산데, 평판은 괜찮더군요. 수완이 좋은지 사건도 많고요. 작은 법무법인인데, 사건 수임 경로는 확인 중입니다.”

“우리 돈 떼먹은 년들이 셋이나 차례로 사라지고 같은 사무소가 법적으로 사망 처리를 했다는 게 우연일 수 있나? 냄새가 나. 뭔가 너무 정교해. 확인해보니까 그년들이 없어지기 전에 내 돈을 왕창 더 빌렸어. 패턴이 비슷해.”

“혹시 다른 사장님들한테도 그런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면 어떨까요?”

“누구한테? 그런 양아치들한테 뭘 물어?”

“그래도 장 사장님 정도는 말이 통하지 않습니까?”

#10, 법원.

법무법인 <민> 소속의 젊은 변호사가 변론 중이다. 판사가 말한다.

“실종되기 전에 빚이 많았네요. 채권자가 자꾸 재판부에 탄원서를 내고 있습니다. 안 죽었을 거라고. 난감하네요.”

“시신은 못 찾았지만 사고 장면을 본 친구도 있는데, 너무 억측인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2주 내에 결정하겠습니다.”

#11, 사무실 안.

사채업자가 장 사장을 만나고 있다.

“고 실장! 작년에 잠적했다가 법원에서 사망 처리한 놈 파일 좀 가져와 봐.”

실장이 파일 두 개를 가져온다. 장 사장은 돋보기 아래로 파일을 뒤적거린다.

“그러네. 이것도 법무법인 <민>에서 대리했네.”

“그래요?”

사채업자, 장부를 넘겨받아 살펴본다.]

동호는 트리트먼트를 읽다가 졸기 시작했다. 문득 자신이 졸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창밖을 보았다. 남산으로 이어지는 도로의 가로등 불빛이 점멸하듯 반짝였다. 그때 기태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오 관장이 일식집에서 만난 사람은 부학개발 편수혁 전무입니다. 어느 건물 준공식 때 구석에 서 있는 사진을 찾았는데, 일식집에서 본 사람이 맞습니다. 비서실장에게도 이름과 사진을 확인했어요. 일식집에서 대화를 녹음했는데 심상치가 않네요. 중요한 부분을 잘라서 파일로 보내드려요. 확인하시고 내일 아침에 봬요.]

동호는 전송된 녹음 파일을 눌렀다. 잔을 부딪치는 소리에 이어 목소리가 들렸다. 오 관장의 목소리는 다소 떨리고 있었다.

“전무님, 정말 실망입니다. 이런 분인지 몰랐어요. 이러다가 우리 전부 죽습니다.”

“수사를 받으면서 당신과 회장을 보호하려고 제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십니까? 구속된 후 재판이 시작될 때까지 검사실에 수도 없이 불려갔어요. 재판 때 확인해보니 무려 서른다섯 번이에요. 검사 놈이 한 건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서는 겁주다가 회유하다가 하는데, 차라리 여기서 죽자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그 고초를 겪고 나왔는데 이제 와서는 날 만나주지도 않는다니, 이거 너무하는 거 아닌가요?”

“안 만나주는 건 제가 아닙니다. 회장님이지.”

“그러니까 내 이야기를 회장에게 전해서 담판을 지어달라는 겁니다.”

“말했어요. 그런데 말을 잘라버리고 입도 뻥긋하지 못하게 하시니, 전들 무슨 수가 있습니까?”

“그럼 관장님이 책임져야지요. 제가 입만 열면 회장만이 아니라 관장님도, 또 누구누구도 다 골로 갑니다.”

“……”

“이게 제 최후통첩입니다. 회장 돈이든 당신 돈이든 제가 말했던 금액을 이달 말까지 현금으로 마련해서 연락주세요. 수장고에 있는 그림 몇 개 팔면 되는 돈 아닌가요? 아니면 그림을 주든지. 그럼 전 한국 뜹니다. 안 그러면, 내가 아는 걸 다 말하는 수밖에. 농담 아닙니다. 민 의원에게도 가 전하세요. 그 사람이라도 나서서 마련하시라고.”

“돈을 주면 당신이 조용하리라는 걸 어떻게 믿나요? 돈 챙기고 외국 나가서 제보해버리면 그만 아닌가요? 이미 감정이 상할 만큼 상했는데.”

“나는 여생을 편히 사는 게 목적입니다. 돈만 마련되면 세상사 복잡한 일에 더 이상 관여하고 싶지 않아요.”

“회장님이 그 말을 안 믿습니다.”

“당신은 내 말 믿어요? 가서 회장이든 민 의원이든 설득하세요. 나도 기다리느라 지쳤어요. 이게 마지막입니다.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어요.”

기태가 보내준 녹음은 여기까지였다. 동호는 미국에 서버를 둔 드롭박스에 녹음 파일을 업로드했다. 중요 자료를 보관하는 방식이었다. 그는 연이어 보고 들은 두 개의 파일에 피로감을 느꼈다. 리셋…… 부학개발 전무도 나름의 리셋을 꿈꾸고 있는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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