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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빌딩에 걸린 그림의 주인을 찾아나서다

[소설 '리셋' 챕터 5]

  • 조광희
  • 입력 2018.03.26 10:18
  • 수정 2018.03.30 10:05
ⓒhuffpost

조광희 작가의 미발표 신작장편 ‘리셋’은 새로운 감각의 스릴러 소설로, 현직 서울시장의 요청을 받고 전임 시장이 연루된 비리를 파헤치는 변호사의 이야기를 속도감 넘치는 필치로 그리고 있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은 뜻하지 않은 음모에 휘말리면서 한국사회의 민낯과 부패의 심연을 들여다보게 된다. 14일부터 매주 월, 수, 금 오전에 업데이트된다.

5

 

기태는 피디에프 파일로 변환된 문서들을 노트북으로 보면서 화살표 키를 초당 다섯 번씩 눌렀다. 그는 얕은 신음을 토해냈다.

“왜요?”

맞은편 책상에서 역시 모니터를 잡아먹을 듯 쳐다보던 정미가 물었다.

“벌써 사흘째 하루 열두 시간씩 이 짓인데, 이래가지고 언제 찾겠나 싶어서.”

“내일 아침이면 문서 제목과 내용을 엑셀로 정리한 것이 완성되니까 우선순위 정해서 살펴보세요.”

“해도 졌는데, 오늘은 그만할까? 저녁 약속 있나? 아니면 소주에 돼지갈비 어때?”

“제가 술집 주인인데, 다른 가게를 왜 가요?”

“그럼 정미네 가게나 갈까? 변호사님한테도 내가 전화해볼게.”

기태는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 그때 벨이 울렸다. 기태는 비디오폰에서 동호의 얼굴을 확인한 후 문을 열었다. 동호도 자기 방에서 하루 종일 스크린을 바라본 듯, 충혈된 눈을 하고 있었다. 그는 라쿠라쿠 침대에 몸을 던지듯 털썩 앉았다.

“뭐 건진 건 없나?”

“한강에서 시체 찾는 기분입니다. 이러다가 금방 한 달이 지나갈 것 같습니다. 아무튼 정미가 곧 문서 색인을 끝낸다니까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겠죠. 저녁 약속 없으시면 빅슬립에서 한잔 어때요?”

“글쎄, 나는 강 건너갔다가 다시 돌아오기는 좀 그런데.”

“참, 병사들 사기 진작도 안 시키면서 무슨 성과를 바라십니까?”

“내 이름으로 달아놔.”

기태는 김이 빠진 듯 시무룩해졌다. 그때 정미가 손가락으로 모니터를 가리켰다.

“이것 좀 보세요.”

동호가 몸을 일으켜 정미의 자리로 다가갔다. 기태도 의자에서 일어나 정미의 뒤에 섰다.

“이건 부학개발이 2년 전에 역삼동에 지은 건물의 1층 로비 사진이에요.”

“그런데?”

동호가 모니터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정미는 사진을 점점 확대시켰다.

“여기 걸린 그림 좀 보세요.”

동호는 로비 안쪽에 걸린 유화를 보았다. 주변의 물체와 비교해 보면 크기가 300호 쯤 되어 보였다. 해상도가 높지 않아서 확대한 사진 속 그림이 흐릿했다. 야수파풍의 다소 추상화된 풍경화였다. 동호는 ‘그래서 뭐가 문제냐’는 얼굴로 정미를 쳐다보았다. 정미가 다른 파일을 불러왔다.

“이건 부학개발이 5년 전에 부산에 지은 건물의 로비 사진이에요.”

정미가 새로운 사진을 확대시켰다. 로비에 걸린 두 그림이 똑같았다. 기태가 물었다.

“어떻게 된 거지?”

동호도 궁금해졌다.

“신축 당시의 사진들인가? 부학개발이 건물 소유주인가?”

“잠시만요.”

정미는 건물의 주소지로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신축 당시 사진들이네요. 역삼동 건물은 부학개발이 신축해서 지금도 가지고 있고, 부산 건물은 부산의 해운회사와 공동으로 개발했는데 처음부터 해운회사가 소유해서 사옥으로 쓰고 있네요.”

“그럼 부학개발이 소유한 그림인가? 부산의 건물은 자기들 것이 아니니 거기에 걸어두는 것은 좀 어색한데. 부학개발이 시행사로 신축한 빌딩에 걸려고 어떤 화랑에서 같은 그림을 빌리는 건가?”

계속 검색을 하던 정미가 의기양양한 얼굴로 말했다.

“이 건물들의 최근 사진을 보면 모두 다른 그림이 걸려 있네요. 이 그림들이 어떤 그림이고 누가 소유하고 있는지 확인해봐야겠네요.”

동호가 기특하다는 눈으로 정미를 쳐다보았다. 

ⓒJot via Getty Images

 

18층에 자리를 잡은 오피스텔에서는 한강과 밤섬이 내려다보였다.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한강 변을 달리고 있었다. 평일 낮이라 그런지 달리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동호는 모던한 민트색 소파에 앉아서 연 박사가 커피를 가져오기를 기다렸다. 연 박사는 커피 잔을 동호의 앞에 내려놓았다.

“드세요. 저는 오늘 벌써 석 잔을 마셔서.”

“지나는 길에 들렀습니다. 전망이 좋군요.”

“처음에는 저도 멍하니 밖을 바라보곤 했죠.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참, 시장님이 이 얘기를 두 번이나 하시던데요. 후보자 간 마지막 TV 토론 때 손수건을 준비해 주셨다고. 그때 한미홍 후보는 아들 부정 입학 문제로 궁지에 몰려있었죠. 만일 한미홍 후보가 마지막 토론 중에 눈물을 흘리면 바로 건네주라고 하셨다면서요. 저도 TV를 보고 있었는데, 눈물 작전을 펼치려던 한 후보가 시장님의 체크무늬 손수건을 든 채로 몇 초간 멍해져 있더군요. 선거는 그때 끝났죠.”

“솔직히 별일은 아닙니다. 외국 선거 사례에서 힌트를 얻은 거죠.”

연 박사는 전자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그런데, 강 변호사님은 시장님을 왜 지지하세요?”

동호는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남에게 관대하고 자신에게는 엄격하시지요. 말은 쉽지만 그런 사람이 실제로는 드물지 않습니까? 저는 정치적으로는 언제나 진보 진영을 지지해왔지만, 솔직히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정치인을 잘 안 믿습니다. 형님을 통해 이런저런 진보적이라는 정치인들을 많이 보았지만 정말 지지하고 싶은 정치인은 드물었습니다. 개혁적이라고 알려진 많은 정치인들의 근거 없는 자기 확신과 위선도 지겨웠습니다. 시장님은 대학에서 정치철학을 가르치시다가 정치에 뒤늦게 뛰어들어서 그런지 좀 달랐어요. 본인이 지향하는 가치를 자신이 잘 실천하는지 늘 돌이켜 보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모순은 인간적으로 이해하려고 애쓰셨어요. 인간은 그 정도 노력을 해야 겨우 지향하는 바와 실제 삶을 일치시킬 수 있나 봅니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요?”

“대통령이 될 수 있느냐는 말인가요? 현재 상태로는 당내 경선도 통과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가능성이 사분의 일도 안 되지요. 올해 말이면 가능성이 얼마나 있을지 좀 더 가늠해볼 수 있겠습니다만, 현재로서는 어떤 예측도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연 박사는 심드렁하게 말했으나 무언가 생각하는 듯한 그의 눈빛은 답을 찾고자 늘 골몰하고 있음을 내비쳤다.

“평소에 궁금했던 것이어서 여쭤봅니다. 어떤 자질이나 노력이 있어야 정치 컨설턴트가 될 수 있나요? 물론 방송에 나와서 생각나는 대로 떠드는 사람들 말고, 박사님처럼 온갖 정치인들이 도움을 받고 싶어 목매는 분들 말입니다.

자신을 치켜세우는 말에 기분이 좋아질 법도 한데, 연 박사는 별 반응 없이 대답했다.

“글쎄요? 노력이라는 것은 어느 분야나 비슷한 것이죠. 늘 연구하고 전략에 관한 책이나 외국 사례도 살펴보고. 훨씬 중요한 것은 고급 정보지요. 아무래도 이름이 날수록 중요한 사람들과 대화를 하면서 고급 정보를 접하게 되니 예측력도 점점 높아지지요.”

동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연 박사님만의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글쎄요.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점이라면 잘 속지 않는다는 것이겠죠. 남은 물론 자신에게도. 특히 자신에게 속지 않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매번 자신에게 속습니다. 지나치게 비관하거나 낙관하지요. 인생을 건 중요한 결정을 끊임없이 해야 하는 정치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정치인들은 선거 때마다 그런 결정을 하루에도 몇 번씩 하는데, 항상 지나친 낙관과 비관 사이에서 비틀거립니다. 한 번이라도 틀리면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되는 결정들 사이에서 말입니다. 남다른 신경을 타고난 사람들도 점점 헷갈리기 시작하죠. 그런 사람들에게는 저처럼 현실을 가능한 한 있는 그대로 보는 컨설턴트가 필요합니다. 컨설턴트는 정치를 직접 할 자원, 예를 들면 인기나 말솜씨, 잘생김 같은 것이 부족한 사람들이기도 하지요. 또는 자신이 직접 정치를 하는 것은 너무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하니까 컨설팅에 만족하는 캐릭터라고 볼 수도 있고.”

동호는 전자담배를 든 연 박사의 손을 쳐다보았다.

“민상철 의원이 아웃되면 얼마나 도움이 될까요?”

“조심스러운 이야기입니다. 시장님과도 자세히 이야기한 바는 없습니다. 성품상 의식적으로 계산해보지 않았을 겁니다. 본능적으로 느꼈을 수는 있지요. 강 변호사님은 그 부분을 잊어버리시는 것이 좋습니다. 사건 자체에만 집중하시는 게 마음이 편하실 겁니다.”

“한 번은 묻고 싶었습니다. 시장님께 직접 물을 수는 없고. 제가 해야 하는 일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싶어서요.”

“그러셨군요……. 참, 화랑을 확인하셨다면서요. 대단하십니다.”

“직원들이 찾아냈습니다. 부학개발이 미래화랑에서 그림들을 직접 빌리기도 하고 건물 소유주들에게 소개도 하고 있었더군요. 그림이야 임차할 수도 있겠지만, 인터넷으로 조사해보니 그것을 뛰어넘는 내밀한 관계를 유추해볼 수 있었습니다. 전무가 말한 화랑이 미래화랑으로 보입니다. 나중에 메일로 다 공유해드릴 테니 혹시 궁금하시면 살펴보시고 조언도 해주시기 바랍니다.”

연 박사는 동호를 예리하게 쳐다보았다. 동호는 그가 자신을 마음속에서 평가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동호는 평가받는 것을 싫어했다.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메신저로 문의하겠습니다.”

“그러시지요.”

동호는 커피를 마저 삼키고 배낭을 챙겼다. 동호가 현관을 나서며 문을 닫으려는데 연 박사가 입을 열었다.

“강 변호사님, 민 의원이 대선 레이스에서 아웃되면 시장님이 대통령이 될 가능성은 48퍼센트가 될 겁니다.”

“왜 하필이면 48퍼센트?”

“절반보다 약간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민상철 의원이 여당 후보이면서도 시장님과 합리적이고 개혁적인 이미지를 공유하고 있어서, 시장님이 본선 후보가 될 경우에 매우 버거운 상대입니다. 민 의원만 아니라면 누가 여당 후보가 되더라도, 시장님이 거의 이길 수 있지요. 그 경우에 시장님 입장에서는 당내 경선이 사실상 본선인데, 현재 상태로는 이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민 의원이 레이스에 뛰어들지 못하면 시장님은 본인이야말로 본선에서 확실하게 승리할 후보라는 점을 경선 과정에서 잘 어필할 수 있지요.”

“그렇군요. 그럼 바쁘실 텐데 저는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그러시지요.”

 

기태는 전시장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몽골의 풍경과 아이들을 아주 세밀하게 담은 그림들이었다. 팸플릿에는 작가가 몇 년간 그들과 생활을 같이했다는 설명이 있었다. 기태는 다시 전시장 입구로 이어지는 마지막 그림 앞에서 그림을 보는 척하며 입구에 앉은 직원의 움직임을 살폈다. 상급자와 통화하는 모양이었다. 기태는 직원에게 다가갔다.

“오 관장님은 출근하셨나요?”

“네. 그런데 이제 나가실 때가 됐는데…… 혹시 누구시라고 할까요?”

“곧 나가신다면 됐습니다. 지나는 길에 전시를 보려고 들어왔습니다. 중요한 용건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다음에 뵙지요. 전시 잘 봤습니다.”

기태는 전시장을 나오기가 무섭게 지하 주차장으로 가서 차를 탔다. 부리나케 지상으로 올라온 그는 주차장 출구가 보이는 옆 건물 앞에 차를 세웠다. 그런데 막상 관장은 빨리 나오지 않았다. 차 시동을 끄고 기다리길 사십여 분께, 드디어 관장의 은색 재규어가 주차장 출구에서 나왔다. 흰색 상의를 입은 관장이 직접 운전하고 있었다.

관장의 차는 자하문 터널을 지나 광화문을 거쳐 한남동에 이르렀다. 한남동 너머 한강 위쪽의 하늘에 노을이 번지고 있었다. 관장은 ‘유엔빌리지’ 근처의 일식집 앞에 차를 세웠다. 고개를 90도로 숙여 인사하는 주차요원에게 웃으며 차 키를 건넸다. 기태는 차를 가게 바로 옆 공용 주차장에 세우고 일식집으로 따라 들어갔다. 가게로 들어가자 입구의 종업원이 응대를 했다.

“성함이?”

“따로 예약을 안 했는데요.”

“빈 방이 없습니다만.”

“혼자서 초밥 좀 먹으면 됩니다. 바에는 자리 있나요?”

“두 자리가 비어 있지만 8시경에 예약이 걸려 있습니다. 그 전에 식사를 마칠 수 있으신지요?”

“그러지요.”

기태는 일본 소주와 초밥을 시켰다. 그는 화장실을 가는 척하면서 방들의 신발을 살폈다. 관장의 것으로 짐작되는 신발이 ‘홋카이도’라고 적힌 방의 디딤돌 위에 있었다. 그 옆에는 닦을 때가 제법 지난 갈색 구두가 같이 놓여 있었다.

기태는 대리기사를 불러서 차를 레지던스에 있는 정미에게 가져다주라고 요청했다. 그러고는 카운터 담당자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관장이 무엇을 주문했는지 슬쩍 살펴보았다. 저녁 정식이었고 술은 없었다. 기태는 일본 소주를 반 병 정도 빠르게 비웠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관장이 초로의 남자와 함께 방에서 나왔다. 초로의 남자는 지친 표정이었다. 관장이 계산하는 동안 기태는 담배를 피우려는 척하면서 가게 밖으로 나와 흡연구역으로 갔다. 그는 두 사람이 헤어지는 모습을 스마트폰으로 찍었다. 초로의 남자가 대기하고 있던 택시에 올라타고 사라지자 기태는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계산하기 전에 음식을 가져다준 종업원에게 수고비로 5만 원짜리 지폐를 건넸다. 너무 많다고 생각했는지 종업원이 멈칫하자 기태는 눈짓으로 넣어두라는 신호를 보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카운터 담당자에게 카드를 주고 계산하는 사이, 화장실을 다녀오던 기태는 그 종업원과 복도에서 다시 마주쳤다.

“오 관장님도 여기 자주 오시나 봐요?”

“아세요? 그럼 인사라도 하시지 그러셨어요.”

“하도 오래전에 한두 번 뵌 거라서요. 저는 기억하지만 관장님은 잘 모르실 수도 있고.”

“일주일에 두 번은 오시는 것 같아요.”

“제가 그림을 하나 살까 하는 중인데, 다음번에 관장님이 여기 예약하시면 제게 알려주시겠어요. 자연스럽게 마주치면 말씀을 드려볼까 해서요.”

기태는 이름과 이메일, 전화번호만 적힌 명함을 건넸다.

“그 신사분도 어디서 뵌 분 같은데 성함이 기억이 안 나네요.”

“제가 가게에 온 지 이 년이 넘었는데, 그분은 저도 처음 봤어요. 그런데, 무슨 일이 있는지 오늘 분위기가 좀 무서웠어요. 관장님이 상당히 화가 나셨어요. 그럼 연락드릴게요.”

종업원은 말을 줄이고 주방으로 갔다. 기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게를 나왔다. 아직 초여름인데도 날씨가 무더웠다. 기태는 일본 소주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성능이 괜찮은 디지털카메라를 하나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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