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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비리를 조사할 옛 팀원들을 만나다

[소설 '리셋' 챕터 4]

  • 조광희
  • 입력 2018.03.23 10:02
  • 수정 2018.03.23 15:04
ⓒhuffpost

조광희 작가의 미발표 신작장편 ‘리셋’은 새로운 감각의 스릴러 소설로, 현직 서울시장의 요청을 받고 전임 시장이 연루된 비리를 파헤치는 변호사의 이야기를 속도감 넘치는 필치로 그리고 있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은 뜻하지 않은 음모에 휘말리면서 21세기 한국사회의 다양한 민낯과 부패의 심연을 들여다보게 된다. 매주 월, 수, 금 오전에 업데이트된다.

 

4

 

예전의 비서인 정미가 동호에게 전화로 알려준 카페는 가로수 길의 이면도로에 있었다. 필기체로 ‘Big Sleep’이라고 적힌 핑크빛 네온사인 간판이 걸려 있었다. 지하 1층으로 내려가자 바 안쪽에 정미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여자 손님 둘과 이야기하느라 동호가 들어온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동호는 입구 쪽의 4인용 자리에 앉았다. 카페는 아늑하면서도 미니멀 한 분위기였다. 어두운 조명 너머로 정미가 손님과 나누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가압류 어쩌고 하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녀에게 법률문제를 상담 중인 두 여자는 나이 차이가 많아 보였고 제법 심각한 표정이었다. 아르바이트생이 주문을 받으러 올 때쯤 정미는 비로소 동호를 알아보았다. 동호는 맥주 한 병을 주문했다. 잠시 후 정미가 직접 맥주를 들고 왔다.

“너무 오랜만이네요. 변호사님, 어떻게 지내셨어요?”

“학교 다니고 일하고 그랬지. 좋아 보이네. 할 만해?”

“호구지책은 하죠.”

동호는 다소 짙어진 정미의 화장을 살폈다. 자신감 있게 보였으며 어느 모로 보아도 가끔 엉뚱한 행동을 하던 전직 법률사무소 직원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바로 이야기를 할까? 한 달 정도 일을 도와줄 수 있겠어?”

“어떤 일이지요? 법률적인 일인가요?”

“법률적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지. 믿을 만한 사람이 별로 없어서. 저 아르바이트생은 일 잘하나? 그렇다면 가게를 계속하면서 할 수 있어. 좀 소홀히 해야겠지만. 보수도 줄게.”

“당연히 도와드려야지요. 그런데 대략이라도 이야기해주신다면……”

동호는 개요를 설명했다. 그는 이때만 해도 일이 어디까지 번질지 짐작하지 못했다.

“남 사무장에게도 찾아가보려고 해. 제주도 한림에서 펜션을 한다면서?”

“네. 잠깐만요, 바의 저분들이 저를 기다리는 눈치네요. 얘기 좀 하고 다시 올게요.”

“변호사법 위반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 나는 한국에서 휴직 중이라 변론도 못해줘.”

 

동호는 청포도 주스를 마시며, 남 사무장을 기다렸다. 펜션은 풍력발전소의 흰색 바람개비들이 보이는 해안가에 있었다. 2층짜리 건물이었고 옥상에는 커다란 파라솔 3개가 설치되어 있어 바다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실 수 있었다. 주스를 다 마실 무렵, 바닷가에서 전기 자전거가 나타났다.

“아니, 정미가 온다고 했는데. 혹시 같이 오신 거예요?”

“정미에게 내가 간다고 말하지 말라고 했어. 놀라게 해주고 싶어서.”

남 사무장은 못마땅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의자에 앉았다. 둘은 바닷바람을 맞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어때? 가능할까?”

동호는 종업원이 다시 가져온 아이스커피를 빨대로 마시며 말했다. 멀리 화물선 한 척이 수평선을 넘어가고 있었다.

“해보죠. 그런데 동생보고 잠시 와서 펜션을 돌봐달라고 부탁해야겠네요. 물론 갑자기 다니던 직장 때려치우고 웹툰 그린다는 녀석이니까 경치 좋은 데에서 만화 그릴 생각에 신나서 오겠죠. 혹시 모르니 일정을 물어보기는 할게요.”

동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펜션으로 수지는 맞추고 있나?”

“그럭저럭 맞추는데 이거 짓느라고 은행에서 융자받은 것은 잘 안 줄어드네요. 그래서 가끔 목돈을 벌 겸 아르바이트를 합니다.”

남 사무장은 손목시계의 유리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어떤 아르바이트?”

“탈세 조사해서 국세청에 고발하고 포상금 받는 일이요. 기업이나 부자들 은닉 재산을 찾아내기도 하고요. 국정원에서 일하다 퇴직한 친구가 정보를 물어 오면 조사하고 분석해서 고발합니다. 한 해에 두어 번 정도 해요.”

“이른바 세파라치?”

“맞아요. 어떤 경우에는 기업이 눈치채고 제안을 하기도 하는데, 타협은 안 합니다. 뒤통수를 맞을 수도 있어서. 올봄에는 펜션으로 1년 벌 돈을 벌었어요.”

“원한 사지 않도록 조심하게.”

“파악한 것을 삼분의 이 정도만 넘깁니다. 그래야 남은 거라도 지키려고 조용히 있으니까요. 변호사님이 ‘상대방이 대들 때 다시 제압할 카드는 남겨두라’고 하셨잖아요.”

동호는 대꾸하지 않고 계속 들었다.

“한번은 추징당한 기업주가 약이 올랐는지 건달을 보냈어요. 은근히 겁을 주길래 아직도 세금 낼 게 제법 남아 있다는 걸 암시했죠. 그랬더니 도리어 선물을 들이밀더군요. 그 회사에서 연락을 받았다면서 어떤 전화가 왔는데, BMW를 보낸다는 겁니다. ‘오호, 세게 노네’라고 생각했지요. 나중에 가져왔는데 저 BMW 자전거더라고요. 열이 나서 안 받으려 했는데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서.”

동호는 목청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그럼 결심한 것으로 생각하고, 오늘은 바로 일어서야겠네. 공항에 가서 가장 빨리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고 갈게. 평일이니까 표는 있겠지? 다음 주 월요일에 임시 사무실에서 보기로 하지.”

“그러세요. 제 동생하고 통화한 결과는 서울에 내리면 바로 아실 수 있도록 문자로 보내드릴게요. 그리고 퇴직한 지도 오래됐는데, 앞으로는 그냥 기태라고 하세요.”

동호는 기태를 따뜻하게 바라보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멀리 수평선을 넘어가던 화물선은 어느새 사라졌다.  

ⓒSean_Kuma via Getty Images

‘변호사님이 계시는 레지던스의 607호에 임시로 사무실을 빌렸습니다. 보시고 불편한 사항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키는 역시 프런트에서 찾으시면 됩니다.’

동호가 제주도에서 돌아와 레지던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시 직원이 보낸 메시지가 도착했다. 동호는 배낭을 내려놓고서 알겠다고 답신했다. 시계는 벌써 저녁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식사 겸 한잔을 하고 싶어졌다.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고 배낭에 스마트폰과 지갑, 부채를 챙겨 넣은 후에 레지던스를 나섰다. 택시를 탔다. 택시가 한강진역을 거쳐 이태원 방향으로 달릴 무렵에 차를 세워달라고 말했다. 동호는 아우디 자동차 매장 직전에 있는 골목으로 들어섰다. 골목에는 카페와 식당이 차례로 이어져 있었다. 그는 ‘芭蕉(파초)’라고 한자로 쓰여 있는 간판이 달린 일본식 주점을 발견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가게 안은 한산해 보였다. 동호는 미닫이문을 밀어 열고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안쪽에 앉은 남녀 한 쌍이 어묵을 안주 삼아 일본 술을 마시고 있었다. 창가 자리에 앉은 동호에게 종업원이 메뉴판을 들고 다가왔다.

“일행이 오시면 주문받을까요?”

“아뇨, 먼저 주문할게요. 생맥주 한 잔 하고 꼬치 조금, 그리고 나가사키 짬뽕 주세요.”

“일행은 몇 분인가요?”

“한 명 더 올 겁니다.”

생맥주 한 잔을 다 비울 즈음 남녀 손님이 떠났다. 두 번째 잔을 시켰다. 종업원이 생맥주를 가져오자 동호가 물었다.

“간판을 어떻게 읽나요? 파초? 바쇼?”

“바쇼라고 읽습니다. 유명한 일본 시인이라던데요.”

“그렇군요. 어쩌면 식물 이름과 시인 이름을 모두 생각하면서 지었을 수도 있겠네요.”

“사장님을 불러드릴까요? 주방에 계시는데.”

“아뇨, 됐습니다.”

동호는 맥주를 한 모금 더 삼켰다. 바쇼의 유명한 하이쿠 하나가 떠오를 듯 말 듯하며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는 잠시 스마트폰으로 검색했다. ‘내 앞에 있는 사람들 저마다 저만 안 죽는다는 얼굴들일세.’

“바쇼를 아는 손님이시라니 반갑습니다.”

오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주인이 벽돌무늬의 요리사 모자를 쓴 채 다가오며 말했다.

“아, 네.”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네?”

“실례가 안 된다면 성함이?”

“강동호라고 합니다만.”

“강물과 함께 동쪽으로 걷노라, 호랑이처럼.”

“네? 아, 네.”

“손님의 이름으로 하이쿠를 지어보면 이름을 잊지 않죠.”

가게 주인이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표정을 살폈다. 동호는 주인의 이런 행동이 장사에 도움이 될지, 방해가 될지 잠시 생각해보았다.

“참 빠르게 시를 지으시네요. 대단하십니다.”

“허허,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손님도 해보시지요. 저는 김광문입니다.”

동호는 손사래를 치며 난감해했지만 그러는 주인이 싫지는 않았다. 그는 다음에 다시 오겠노라며 술값을 계산했다.

“혼자 오셔도 편하게 해드릴 테니 괜히 일행이 온다는 이야기는 안 하셔도 좋습니다.”

동호는 겸연쩍게 웃으며 가게를 나섰다. 오렌지색 택시가 바로 잡혔다. 어쩐지 걷고 싶어서 버티고개 정상에 못 미쳐서 내려달라고 했다. 택시기사는 ‘여기는 내릴 장소가 아닌데’ 하는 표정으로 차를 세웠다. 기사의 얼굴은 유난히 검었다. 동호는 고개를 넘다가 하늘을 바라보았다. 몇 개의 별이 흐리게 반짝였다. 하늘을 이리저리 살펴보았으나 오리온자리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보이지 않는 오리온자리 왼쪽 위에 위치한 베텔기우스를 생각했다. 몇 주 전 인터넷상에서 태양보다 수백 배 큰 별인 베텔기우스가 머지않아 폭발하여 초신성이 될 거라는 과학 기사를 읽었다. 물론 천문학에서 ‘곧’이라는 것이 수백 년 후일지도 모르지만, 올해 당장 폭발이 일어날 수도 있다. 실제로는 이미 폭발하여 그 빛이 지구로 날아오는 중이리라. 과학 기사에는 지구에 있는 원자번호가 높은 물질들이 초신성의 폭발을 통해 형성된 것으로, 그것들이 우주를 떠돌다가 뭉쳐져서 지구의 일부가 되었다는 설명도 들어 있었다. 자신의 몸을 이루는 일부 물질이 초신성의 잔해일 수 있다는 사실은 동호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부질없는 몸이 영속적인 의미를 부여받는 기분이었다. 천문학적인 허영이라고나 할까. 동호는 가벼운 취기와 함께 밤길을 걸으며 ‘만일 그 물질들이 의식이 있었다면 긴 여행 동안 얼마나 외로웠을까’ 하고 생각했다. 멀리 회색 벽의 레지던스가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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