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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한국을, 우선은 떠나고 싶었다

소설 '리셋' 챕터 1

ⓒhuffpost

조광희 작가의 미발표 신작장편 ‘리셋’은 새로운 감각의 스릴러 소설로, 현직 서울시장의 요청을 받고 전임 시장이 연루된 비리를 파헤치는 변호사의 이야기를 속도감 넘치는 필치로 그리고 있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은 뜻하지 않은 음모에 휘말리면서 21세기 한국사회의 다양한 민낯과 부패의 심연을 들여다보게 된다. 매주 월, 수, 금 오전에 업데이트된다.

1

동호는 맨해튼의 웨스트 86번가에 위치한 아파트 14층 베란다에 서서 바깥을 바라보았다. 허드슨강에는 윤슬이 빛나고, 강 건너 뉴저지의 공동주택들이 노란빛 구슬처럼 이어져 있었다. 금요일 밤의 파티는 좀처럼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뉴욕에서 몇 안 되는 친구인 니나가 졸라서 온 파티였지만 낯선 사람들과 영어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힘겨웠던 동호는 피로감을 느꼈다. 그는 달을 보았다. 음력으로 초사흘가량 되어 보이는 가녀린 달이다. 그 맵시가 서울에 두고 온 선우의 것을 닮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누군가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다. 니나다. 20년 전 부모와 함께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온 니나는 파티를 즐겼다. 그녀는 여름 휴가철이면 매년 한국으로 가서 파티 문화를 널리 알리려고 노력했다. 돌아오면 고국에서 알게 된 사람들과 파티를 즐기는 장면을 페이스북에 올리고, 동호에게 스마트폰으로 보여주고는 했다. 동호는 언젠가 그 사진들 속에서 우연히 선우의 얼굴을 발견했다. 선우는 여전해 보였지만 말없이 떠나버린 동호를 추궁하듯 엄격한 표정이었다.

동호는 뉴저지 허드슨강 변의 같은 공동주택에 사는 니나와 엘리베이터에서 여러 차례 마주치다가 말을 주고받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적적한 일요일 점심에 역시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니나가 같이 식사를 하자고 했고, 그 이후 둘 다 약속이 없는 일요일 낮이면 함께 점심을 먹었다. 동호는 묻지는 않았지만 니나가 레즈비언이거나 적어도 양성애자라고 생각했다. 늦은 밤에 그녀가 머리를 짧게 자른 금발 여인과 손을 잡고 공동주택으로 들어가는 것을 먼발치에서 두 번이나 보았기 때문이다. 니나가 동호의 안색을 살폈다.

“지루해?”

“전혀.”

“그런데 이 궁상은 뭐야?”

“달이 멋져서.”

“그게 바로 궁상이지. 그림 옆에 서 있는 여자 보여?”

동호는 붓질의 질감까지 느껴지도록 정밀하게 복제한 피사로의 그림 옆에 서 있는 여자를 보았다. 영락없이 일본인이었다.

“저 일본 여자가 왜?”

“중국 여자야. 아는 체 좀 하지 마. 내 친군데, 너한테 관심이 있나 봐.”

“그래서?”

“무슨 대답이 그래? 긴장 좀 풀고 살아. 가서 이야기 좀 나눠.”

“그냥 여기서 너랑 실없는 이야기나 할래.”

“잠깐 기다려 봐.”

니나는 그 여자에게 손을 크게 흔들었다. 중국계 여인이 니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거실을 가로질러 다가왔다. 니나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영어로 말했다.

“여기는 내 친구, 동호. 아까 이야기했지? 여기는 줄리. 일본 이름은 하나꼬.”

“일본인이시군요.”

동호는 니나를 흘겨보았다. 니나는 장난스럽게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둘이 이야기 좀 해봐. 잠깐 이 집 주인에게 와인 맛에 대해 항의 좀 하고 올게.”

동호가 니나의 손을 잡았다.

“와인 맛이 어때서? 그냥 놔둬.”

“한국 식당에서 소주폭탄이나 마시니 와인 맛을 모르지. 내가 우아하게 항의하고 올 테니 기다려.”

니나는 언제나처럼 성큼성큼 걸으며 사라졌다. 줄리는 고개를 숙였다가 홍조를 띠며 물었다.

“뉴욕에 온 지 얼마나 됐어요?”

“재작년 여름에 왔고 이제 다시 여름으로 접어들고 있으니, 2년이 되었네요.” 

ⓒMBPROJEKT_Maciej_Bledowski via Getty Images

‘벌써 2년이 되었구나.’ 동호는 승철의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면서 미국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세 명의 파트너를 포함하여 아홉 명이 함께 일하던 법률사무소의 파트너 지위를 내놓고, 새로 소송을 맡기려는 의뢰인이 올 때마다 중간에 변호사가 바뀌리라는 것을 알려줬다. 대개는 다른 변호사를 찾아 떠났고, 더러는 차질 없이 처리해줄 것을 당부하며 일을 맡겼다. 동료들은 패소했다고 그럴 필요까지 있느냐고 조언했지만, 이 기회에 쉬면서 미국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싶다고 둘러댔다. 하지만 사실은 30여 년간 살아온 서울을, 한국을, 우선은 떠나고 싶었다. 자신의 삶을 철저히 점검할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뉴욕대학교 로스쿨로부터 입학 허가를 받을 무렵 대법원의 상고는 기각되었다. 동호는 이미 예감하고 있었지만 다시 충격을 받았다. 기대하지 않는다고 스스로에게 말했지만, 그것은 이어지는 좌절감을 회피하려는 자기방어였다. 상고 기각 후 잠원동 아파트를 팔았고, 거추장스러운 가재도구들을 재활용 센터에 넘겼다. 책들도 대부분 처분했다. 그가 애착을 가지고 있는 30권 남짓의 책만 남겨두고, 목동의 파리공원 옆에 있는 양천도서관에 기증했다. 잘 입지 않는 옷들마저 모두 정리한 후, 작은 트럭 하나에 남은 짐을 싣고 오피스텔로 이사했다. 에어컨, 세탁기 따위가 완비된 광화문의 오피스텔을 단기간 빌렸는데, 누워서 잠을 청할 때면 이 도시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 자신이 지워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느낌은 슬프기보다는 홀가분했다. 그는 내버린 짐과 함께 승철에 대한 어떤 부채의식도 내려놓을 수 있기를 기대했지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뉴욕행 아시아나항공 비행기에 앉아 안전벨트를 매고 스마트폰을 끌 때, 가슴속에서 무언가 울컥하며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슬픔인지 서러움인지 죄책감인지 분명하지 않았다. 속마음을 잘 헤아리고 자신을 사로잡는 감정의 실체를 분명하게 알아내는 편이라고 생각해왔지만, 그때의 느낌은 안개에 휩싸인 듯이 알 수가 없었다. 그것을 해명하기 위해 스스로를 독려할 힘도 없었다. 그는 비행기가 이륙하고 나서야 옆자리의 승객이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줄리는 캘리포니아예술대학을 졸업하고 뉴욕에 정착한 후, 소호(Soho)에 있는 회사에서 계약직 홍보 담당자로 일하고 있었다. 오사카에서 태어나 큐슈에 이주해 살다가 고등학생 때 미국으로 이민 왔다고 했다.

“아주 어렸을 때 대마도에 놀러 갔다가 페리를 타고 다시 부산에 가봤어요. 무슨 공원의 전망탑에도 올라가고, 유명하다는 해변도 갔었는데……”

“용두산공원에 간 모양입니다. 해변은 해운대겠죠. 요즘은 해운대 일대에 고층 건물들이 잔뜩 들어서서 못 알아볼 겁니다.”

“대마도에는 가봤어요?”

“줄리와 반대로 부산에서 페리를 타고 가본 적이 있습니다. 몇 년 전 일이라 어떤 다리의 모습, 섬 정상에서 내려다본 바다, 그리고 여전히 한국인 것처럼 핸드폰이 간혹 연결되었다는 것밖에 기억이 안 나네요.”

줄리가 대마도를 척박한 섬이라 말할 때, 니나가 스페인산 와인 한 병을 들고 왔다.

“뭐라고 협박하고 받아냈어?”

“오늘 준비된 와인이 너무 맛있지만 다른 종류도 있냐고 하니까 웃으면서 바로 내주던걸. 이거 들고 집에 가서 마실까? 줄리도 같이.”

 

세 사람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근처에서 자가용 영업을 하는 차를 타고 링컨 터널을 건너 뉴저지로 달렸다. 동호는 뉴저지의 허드슨강 변을 달리는 차 안에서 맨해튼 방향을 바라보았다. 사진으로만 보던 마천루를 매일같이 보게 된 지 2년이 흘렀지만 그 압도적인 풍경은 여전히 낯설었다. 30분을 달려 도착한 공동주택은 조용했다. 자정이 넘었고, 달은 맨해튼 위로 떠올라 있었다. 동호와 줄리는 3층에 있는 동호의 집으로 먼저 들어갔다. 잠시 후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은 니나가 초인종을 눌렀다.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이 빌트인으로 된 동호의 집 거실에는 이케아에서 구입하여 조립한 커다란 직사각형 원목 식탁이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동호는 그 식탁에서 식사도 하고 책도 읽고 음악도 들었다.

니나가 동호의 집을 방문한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두 달 전 어느 주말 밤에 니나가 갑자기 전화를 해왔다. 피곤하여 일찍 잠을 청했던 동호에게 오늘은 집에서 혼자 잠들고 싶지 않은데, 혹시 소파에서 자도 되느냐고 물었다. 니나에게 침대를 양보하고 소파에서 잠을 청하던 동호는 그녀가 침대에서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동호는 금발 여인이 떠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세 사람이 두서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줄리는 동호에게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고 물었다. 진동으로 설정한 스마트폰이 울리고 있었다. 동호는 ‘새벽 1시에 전화할 사람은 없을 텐데’ 하고 생각하며 스마트폰을 들여다보았다. 한국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연 박사님, 어쩐 일이세요? 잘 지내셨죠?”

“아, 강 변호사님. 너무 늦은 시간 아닌지 모르겠네요. 죄송합니다. 혹시 통화 가능하세요?”

“네, 괜찮습니다. 안 자고 있었습니다.”

“급한 일이라 전화를 드렸습니다. 이야기가 긴데, 이메일을 보내드릴 테니 봐 주시겠습니까?”

“그러시죠.”

“작년에 제가 뉴욕에 방문했을 때 연락을 주고받던 구글 메일로 보내면 되겠습니까?”

“네, 그러시죠.”

“그럼 너무 늦었으니 이만 전화 끊겠습니다. 밤늦게 미안합니다.”

“별말씀을…… 그럼 메일 보내주세요”

니나가 물었다.

“이 시간에 누구?”

“작년에 뉴욕에 왔던 서울시장의 정치 컨설턴트. 유엔 본부 근처에서 같이 식사했잖아. 너무 정치 이야기만 한다고 네가 미워하던.”

“매너 없다. 이 시간에 전화하고.”

술이 불콰해진 니나와 줄리는 니나의 집으로 돌아갔고, 동호는 침대에 누웠다. 창밖으로 가로등 불빛이 어른거렸다. 작년 여름에 몬태나주에 갔던 기억을 떠올렸다. 동호가 렌터카를 타고 고요한 평원을 한없이 달리던 순간을 그리는 찰나, 메시지가 왔다. 메일을 보냈다면서 첨부한 문서의 비밀번호를 알려주는 연 박사의 메시지였다. 동호는 일어나서 메일을 확인하려다 포기하고 몬태나주의 밤하늘을 조금 더 머릿속에 떠올리다 잠이 들었다.

 

동호는 새소리에 잠이 깼다. 이 집의 좋은 점이었다. 아직 오전 6시였지만 일어나 샤워를 했다. 자전거를 타고 주택가를 달려 강변을 따라 극장과 슈퍼마켓과 식당들이 늘어선 지역을 지나 어느 공동주택 단지에 이르렀다. 동호는 자전거를 세우고 강변을 바라볼 수 있는 벤치에 앉았다. 들오리 몇 마리가 줄지어 걷고 있었다. 동호는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10여 분간 그렇게 무심히 앉아 있는데, 니나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아침을 준비할 테니 한 시간 후에 같이 먹자는 메시지였다. 동호는 그러자고 답을 한 후, 다시 집으로 자전거를 달렸다. 길옆으로 이슬이 맺힌 잡초들이 흩어져 있었고, 주택가에서 한 스페인계 소년이 혼자 공놀이를 하고 있었다. 동호는 그 소년에게 웃어 보이고 계속 집으로 자전거를 달렸다.

 

동호는 식탁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메일을 확인하고, 첨부 파일을 열자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창이 떴다. 영문 대문자 자판 상태에서 연 박사가 알려준 대로 한글로 ‘민주주의’라고 입력하자 문서가 열렸다. 시장이 직접 작성한 문서였다.

 

‘리셋’ -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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