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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 - 프롤로그

ⓒhuffpost

조광희 작가의 미발표 신작장편 ‘리셋’은 새로운 감각의 스릴러 소설로, 현직 서울시장의 요청을 받고 전임 시장이 연루된 비리를 파헤치는 변호사의 이야기를 속도감 넘치는 필치로 그리고 있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은 뜻하지 않은 음모에 휘말리면서 한국사회의 민낯과 부패의 심연을 들여다보게 된다. 14일부터 매주 월, 수, 금 오전에 업데이트된다.

“원심 판결을 파기한다. 피고인을 징역 12년에 처한다.”

동호는 옆에 앉은 승철을 바라보았다. 그는 목이 부러지면 어쩌나 걱정될 만큼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왼쪽 뺨을 내보이고 있는 그의 얼굴빛이 순간적으로 짙어져 보였지만, 표정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피고인을 징역 12년에 처한다. 동호는 ‘12’라는 숫자를 생각했다. 살면서 12라는 숫자는 늘 기분이 좋았던 숫자였다. 대학 시절 신촌 기차역 앞에서 간혹 승차하던 12번 좌석 버스에는 싱그러운 웃음의 여대생들이 가득했다. 어렸을 적 아버지가 사다 준 연필 한 다스는 얼마나 풍성했던가. ‘2’로도, ‘3’으로도, ‘4’로도 나누어지는 12라는 숫자는 얼마나 많은 수학 시험의 정답이었던가. 그런데 그 모든 즐거운 전조가 오늘의 악몽을 예비하고 있던 것일까?

피고인을 징역 12년에 처한다. 단호하게 선언하는 재판장의 목소리는 느릿느릿했고, 가벼운 감기 기운이 있는 듯했다. 그 이해할 수 없는 결론을 이끌어내기 전에 재판장은 판결의 이유를 20분간 설명했다. 이유를 5분가량 들었을 때 이미 유죄가 선고되리라는 것이 명백했지만, 동호는 재판장의 입술이 최종 결론을 말하기 전에는 시들어가는 희망을 버릴 수 없었다. 마치 견고한 건물을 짓듯 장황한 이유를 나열하여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한 후 결론을 말하는 법정의 방식에 새삼 분노했다. 진실을 은폐하는 간교한 방법론이다. 재판관들은 잘못된 전제를 내세우면서 그 전제가 명백한 것처럼 단정하고, 그처럼 단정된 전제로부터 피할 수 없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처럼 말한다. 재판관들이 매일같이 세상을 우롱하는 방식이다. 사건의 내용을 속속들이 알지 못하는 방청객에게는 저 재판장이 이성의 화신처럼 보일 것이다. 제 이름으로 나가게 될 기사를 어떻게 하면 그럴듯하게 작성해볼까 골몰하는 기자들은 한 인간의 운명에 아무 관심이 없을 것이다. 동호는 재판장이 극히 신중한 태도로 판결 이유를 내뱉을 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그것이 왜 잘못인지 마음속으로 조목조목 반박했다. 하지만 동호는 변호사이고 저 높이 앉아 있는 사람이 재판장이다. 결론은 정해졌고, 운명은 고개를 숙였다. 

ⓒZolnierek via Getty Images

법정구속된 승철은 교도관들에게 양팔을 붙들린 채 나무늘보처럼 천천히 법정 옆 대기실로 걸어 들어갔다. 그는 잠시 동호를 쳐다보았다. 겨우 마주친 승철의 눈을 쳐다보면서 동호는 눈을 감고 말았다. 눈시울이 뜨거워진 느낌이었다. 눈을 뜨면 혹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릴까, 눈을 감고 눈꺼풀 안에 눈물을 담아두었다. 몇 분이 흘렀을까. 법정을 지키는 법원 직원이 조심스럽게 어깨를 건드렸다. 동호가 변론을 할 때마다 호의적인 눈길을 주던 얼굴을 차마 쳐다볼 수 없었다. 동호는 변호인석에서 비틀거리듯 일어나 법정 출입구 쪽으로 걸었다. 기사를 작성하러 나가면서 웅성대는 일간지 기자들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 낯익은 그들에게서 동정의 눈빛이라도 볼까 봐, 의식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출입문으로 걸어가는 동호의 뒤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승철의 어머니이리라. 동호는 법정 밖에 놓인 복도 의자에 어깨를 움츠린 채 다리를 모으고 앉아 그녀를 기다렸다. 기자들이 어수선하게 걷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의 상태를 짐작하고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다. 말을 걸었다면 그들을 증오했을 것이다.

승철의 어머니는 나오지 않았다. 창밖으로 오후 3시의 햇살이 서초동의 어수선한 빌딩들 위로 뿌옇게 번지고 있었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절차를 협의하기 위하여 재판장과 통화할 때마다 동호는 그의 심중에 무엇이 똬리를 틀고 있는지 묻고 싶은 마음을 억제하느라 열병에 시달렸다. 물론 물어보아서는 안 된다. 답을 할 리도 없다. 재판 결과에 대한 희미한 단서라도 얻고자 재판장의 어조에 주의를 기울였지만, 이렇게 볼 수도 있고 저렇게 여길 수도 있는 말뿐이었다. 동호는 통화 내내 피고인이 무죄라는 자신의 확신이 충분히 그러나 노골적이지는 않게 재판장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하지만 재판장은 그것을 피고인을 위하여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변호사의 교활한 술책으로 생각했던 걸까. 아니면 그런 낮은 수를 사용하는 변호사들에게 이미 지쳐 있던 걸까. 어쩌면 동호가 피고인에게 속고 있다고 생각했으리라. 그러나 승철은 아내를 죽이지 않았다. 그의 잘못이라면 변호사를 잘못 선택한 것뿐이다. 대법원에 상고하는 절차가 남아 있지만 동호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동호는 고등법원 3층 복도를 걸었다. 엘리베이터를 지나쳐 계단을 걸어서 내려갔다. 평소에도 어두웠던 계단은 더욱 어두웠다. 어쩌면 정말 그사이에 정전이 일어났는지도 몰랐다. 사활을 걸었던 소송에 진 얼마나 많은 변호사들이 참담한 기분으로 이 계단을 내려갔을까. 이 법원을 일상적으로 드나들면서도 지난 몇 년간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생각이었다.

승철은 죄가 없다. 그러나 유죄 선고를 받았다. 죄가 없어도 유죄 선고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동호는 만일 죄가 없다면 방대한 소송 기록의 어느 구석에는 피고인의 무죄를 밝혀줄 희미하지만 명백한 증거가 반드시 숨어 있다고 믿어왔다. 수사기관이 신이 아닌 이상 기록의 어딘가에는 피고인이 유죄라면 도저히 성립할 수 없는 어떤 모순이 숨어 있을 것이고, 변호사는 그것을 법정에서 드러내면 된다. 1심 재판에서 동호는 집요하게 증거의 모순점들을 지적했고 승철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그렇게 명백하게 얻은 결론을 고등법원이 뒤집어서는 안 된다. 만일 뒤집어졌다면 그것은 변호사의 잘못이다.

동호는 자책했다. ‘그래, 내 잘못이다.’ 아무리 절박한 요청이 있었더라도 단짝 친구를 직접 변론하는 것은 피했어야 했다. 승철이 “믿을 게 너밖에 없다”고 몇 번을 하소연했어도 굴복하는 게 아니었다. 그가 아무리 다른 변호사들은 믿을 수 없다고, 자신을 정말로 걱정해주는 친구만이 자신을 구할 수 있다고, 그렇지 않으면 자신은 도저히 안심할 수 없다며 울부짖었을 때, 냉정한 거리를 유지했어야 했다. 동호는 자책을 넘어서 갑자기 승철을 향한 분노를 느꼈다. 그가 정말로 친구라면 자신의 안위를 위해 동호를 이런 위험한 게임에 끌어들이지 않았어야 했다. 그의 삶은 그가 감당해야 했다. 변론을 계속 거절하는 동호를 설득하기 위하여 승철은 간교하게도 대학교 1학년 여름에 함께 동해로 떠난 기억을 환기시켰다. 그 바다를, 바닷가를 걸으며 맡았던 소금기 섞인 바람을, 그 바람을 맞으며 나눈 치기 어린 우정의 맹세를, 꼭 그렇게 소환했어야 했을까. 승철은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결백을 밝히기 위하여 우정을 착취했다. 추억을 교살했다. 동호는 다른 의미에서 승철이 유죄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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