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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착취 논점 흐리고 있다" : 이루다와 함께 부각된 '알페스' 처벌법에 우려 나오는 이유

알페스가 정말 N번방 같은 성착취일까?

최근 실존 인물의 애정 관계를 상상해 만든 창작물 ‘알페스’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알페스가 남성 아이돌을 성적 대상화 한다며 처벌해달라는 국민청원은 20일 기준, 21만명 이상의 동의를 얻어 청와대 답변 요건을 충족했습니다. 알페스가 ‘엔(n)번방’ 같은 성착취에 해당한다는 주장까지 나왔고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은 ‘알페스 처벌법’을 내놓겠다고 밝혔습니다. 알페스가 정말 엔번방 같은 성착취일까요? ‘처벌법’은 꼭 필요할까요?

 

이루다와 함께 부각된 ‘알페스 논란’

알페스에 대한 청와대 국민청원.
알페스에 대한 청와대 국민청원.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알페스는 영문 ‘아르피에스’(RPS, Real Person Slash)를 한국어로 줄인 말로, 실존 인물을 소재로 허구의 애정 관계를 다룬 글이나 그림 등의 창작물을 뜻합니다. 국내에서는 1990년대 1세대 아이돌 가수를 주인공으로 쓴 소설을 일컫는 ‘팬픽’ 문화로 시작했습니다. 팬픽은 주로 남성 아이돌의 동성애를 다루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실존 인물의 이름과 이미지를 빌려온 창작물이다 보니 성적 묘사가 포함된 경우 당사자에게 성적 모욕감을 줄 가능성이 있었기에 팬덤 내에서 자정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오랜 기간 팬덤 하위문화로 음지에서 존재하던 알페스는 최근 인공지능(AI) 챗봇 ‘이루다’ 논란과 함께 부각되기 시작했습니다. ‘남초 커뮤니티(이용자 가운데 남성이 여성보다 많은 온라인 커뮤니티)’에 게시된 이루다와의 성희롱 대화를 통해 인공지능 윤리 논란이 일자 “실제인물을 다루는 알페스가 더 나쁘다”는 반발이 나온 겁니다. 실제로 소라넷과 엔번방 등 남성이 가해자인 성착취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오를 때마다 알페스가 등장했습니다. 여기에 손심바 등 래퍼들도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알페스는 성착취’라고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이어 하태경 의원은 처벌법을 만들겠다고 밝혔고 지난 19일엔 경찰에 알페스 제조·유포자 수사를 의뢰했습니다.

이런 움직임이 ‘성착취 논점을 흐리고 있다’는 비판이 나옵니다. 황진미 문화평론가는 “논의가 나온 배경 자체가 ‘남성만큼 여성에게도 도덕적 흠결이 있다’고 주장하려는 목적의 보복적 패러다임”이라며 “팬덤 하위 문화인 알페스에 대해 마치 특정 사이트가 있는 것처럼 ‘운영자’ ‘이용자’ 등의 언급을 하는 것 자체가 사안을 잘 모르면서 비판하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짚었습니다. 황 평론가는 또 “주로 여성 연예인이 겪는 딥페이크, 신체 특정 부위를 찍은 영상, 직접적인 성희롱 등은 의심할 여지 없는 성범죄”라며 “이러한 성범죄가 만연한 상황에서 창작물인 알페스를 이와 완전히 동일시 하는 것은 논점을 흐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실존하는 성착취 문제 지적에 대한 물타기식 대응이라는 겁니다.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은 19일 이준석 전 최고위원과 서울 영등포경찰서를 방문해 '알페스' 관련 수사의뢰서를 제출했다.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은 19일 이준석 전 최고위원과 서울 영등포경찰서를 방문해 '알페스' 관련 수사의뢰서를 제출했다. ⓒ하태경 의원 페이스북


“알페스 처벌법…표현의 자유 과도하게 제한”

전문가들은 알페스를 엔번방 같은 성착취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팬 콘텐츠 관련 연구를 해온 장민지 경남대 커뮤니케이션학과 조교수는 “성착취는 실질적으로 우위의 권력을 지닌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을 성적으로 이용하거나 실제 성범죄로 이어지는 행위”라며 “팬덤과 연예인은 이런 권력관계에 놓여있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또 “연예인 개인이 개별 창작물에 대해 성적 수치심을 느끼고 소송을 걸 수는 있지만, 알페스를 성착취물로 명명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지적했습니다. 이택광 문화평론가(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도 “알페스는 기획사의 마케팅과 결합된 허구의 창작물로 실제 성착취로 이어진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하태경 의원은 ‘알페스처벌법’을 발의하겠다며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성폭력처벌법) 제14조의 제2항을 개정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영상물 등’으로 모호하게 정의돼 있는 성착취물에 그림이나 글을 명시해 불법 알페스를 막으려는 취지”라는 것입니다. 아래는 현재 해당 법 조항입니다.

제14조(카메라 등을 이용한 촬영) ① 카메라나 그 밖에 이와 유사한 기능을 갖춘 기계장치를 이용하여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의 신체를 그 의사에 반하여 촬영하거나 그 촬영물을 반포·판매·임대·제공 또는 공공연하게 전시·상영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② 제1항의 촬영이 촬영 당시에는 촬영대상자의 의사에 반하지 아니하는 경우에도 사후에 그 의사에 반하여 촬영물을 반포·판매·임대·제공 또는 공공연하게 전시·상영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전문가들은 글과 그림까지 성폭력처벌법 대상에 포함하면 표현의 자유가 지나치게 위축될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김영미 변호사(대한변호사협회 대변인)는 “현재 글이나 그림 등 창작물이 단순히 저속한 것에 그치지 않고 음란성이 인정되면 정보통신망법상 음란물 유포로 처벌받을 수 있다”며 “글이나 그림에 대해 성폭력처벌법으로 처벌하는 규정을 넣으면 표현의 자유를 지나치게 사전에 규제하는 조처가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서혜진 변호사(한국여성변호사회 인권이사)는 “알페스를 딥페이크나 특정 신체 부위를 찍은 영상 등 디지털 성범죄와 동일 선상에 두고 보기는 어렵다”며 “글과 그림 등 창작물은 내용이 저속하더라도 기본적으로 표현의 자유 보호 대상이 된다는 게 법의 시각이다. 그 내용의 음란성이 지나치다는 법원 판단이 있어야 정보통신망법 등으로 제재를 가하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서 변호사는 “글까지 성폭력처벌법 대상이 되면 규제의 대상이 지나치게 많아지면서, 아동·청소년 성착취 영상 등 실제로 강하게 규제해야 하는 문제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의도치 않은 결과를 불러올 수도 있다”고 짚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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