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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4월 15일 16시 27분 KST

유튜브 채널 '큐플래닛'이 선거 당일 '국내 최초 퀴어 개표방송' 열었던 까닭

이번 선거에서 “실종된” 성평등·퀴어 의제를 다뤘다.

큐플래닛 제공
큐플래닛의 로고 이미지를 담은 큐카드의 모습.

 

지난 4·7 재보궐선거를 드라마로 재구성한다면 한편의 스릴러 또는 재난 영화가 아닐까? 발단은 성폭력이요, 전개는 유력 후보자의 ‘퀴어(성소수자) 혐오 발언’이었다. 드라마의 절정을 이끈 건 히어로가 아니라 생태탕과 페라가모였다. 그 와중에 성평등과 퀴어 의제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퀴어는 어디에나 있지만, 기성 방송은 퀴어를 지운다. 유튜브 채널 ‘큐플래닛’이 선거 당일 퀴어와 페미니스트들을 위해 “시작부터 망한 선거 한풀이 개표방송”을 진행한 이유다. 따돌림을 막을 순 없다 해도, 외로움과 씁쓸함은 나눌 수 있으니까.

큐플래닛 제공
지난달 큐플래닛의 새 꼭지 ‘아찔한 무지개’ 촬영 현장 모습. 맨 오른쪽부터 신필규 비온뒤무지개재단 활동가, 은하선 칼럼니스트, 손희정 문화평론가.


기획자이자 방송 진행을 맡은 신필규 비온뒤무지개재단 활동가는 13일 <한겨레>와 한 인터뷰에서 “(기성 언론의 개표방송은) 그림이 너무 뻔했다. 경마식 중계 보도 중심으로 판세 분석을 할 텐데, 이번 선거에서만큼은 그런 얘기만 있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큐플래닛은 이승한 칼럼니스트, 권김현영 여성주의 연구활동가, 손희정 문화평론가를 초대해, 금태섭·안철수 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터진 퀴어 혐오 문제부터 이번 선거에서 “실종된” 성평등·퀴어 의제를 3시간 가까이 ‘라방’(실시간 방송)으로 다뤘다. 실시간 접속자 200여명이 ‘국내 최초 퀴어 개표방송’에서 분노와 슬픔, 공감과 위로를 나눴다.

지난달 개국 2주년을 맞은 큐플래닛은 처음 채널을 시작할 때부터 “지상파에서 할 수 없었던 것, 지상파에서 여전히 할 수 없는 것, 하지만 언젠가는 꼭 해보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2019년 3월15일 큐플래닛의 첫 영상)라고 출범 이유를 밝혔다. 이 말을 한 손희정 평론가는 2018년 <교육방송>(EBS)의 젠더 토크쇼 <까칠남녀>의 출연진이었다. 하지만 그는 ‘성소수자 특집’편을 거치며 보수 기독교 단체들의 항의로 강제 하차한 은하선 칼럼니스트에 연대하는 의미로 출연을 그만뒀다. 두 사람은 큐플래닛 초기부터 콘텐츠 기획·진행을 맡아온 주요 제작진이다.

큐플래닛의 선거 방송 화면 갈무리
큐플래닛의 선거 방송 화면 갈무리. 왼쪽이 이승한 칼럼니스트, 오른쪽이 신필규 비온뒤무지개재단 활동가.

 

혐오가 조회수이자 돈이 되는 유튜브 생태계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차별·혐오에 맞서는, 공익성과 품위를 갖춘 채널이 절실하다”(신필규 활동가)는 판단도 있었다. 은하선 칼럼니스트는 “유튜브에는 성소수자 혐오 콘텐츠가 넘치는 한편, 성소수자 당사자들이 운영하는 채널도 많다. 하지만 당사자도 ‘섹스썰’ 등 유튜브에서 팔릴 만한 자극적인 걸 내세우는 경우가 있다”며 “큐플래닛은 공익성을 중심으로 재미를 함께 끌고 가야 한다는 점에서 고민이 많았다”고 말했다. 황혜준(활동명 준짱) 큐플래닛 기획·편집자는 “큐플래닛 콘텐츠는 ‘단짠단짠’ 자극 일색인 유튜브 밥상에서 청량한 맛을 주는 고수에 빗댈 수 있다”고 했다.

제작진은 시사·예능·상담소 등 다양한 성격의 꼭지에 도전했다. ‘트랜스젠더로 살면 불행해진다’는 등의 가짜뉴스를 팩트체크로 부수고, ‘친한 친구가 동성애자를 혐오하는데, 친구에게 성소수자임을 숨기고 계속 관계를 이어나가야 할까요?’ 같은 고민에 귀 기울이고, 퀴어예술인단체 ‘블랭크레이블’과 함께 ‘웃을 수 없는 혐오 유머’를 뺀 예능 프로그램을 제공했다. ‘시니어 레즈비언’ 김인선 재독 호스피스, 트랜스젠더 김비 작가, 유튜브 채널 ‘발라티브이(TV)’의 모니카와 뮤즈 커플 등이 출연한 토크쇼도 인기를 끌었다. 이로써 퀴어에게 무해한 콘텐츠는 모두에게 무해하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라온 제공
큐플래닛의 새 꼭지 ‘아찔한 무지개’를 진행하는 손희정 문화평론가(맨 왼쪽), 은하선 칼럼니스트(가운데), 신필규 활동가의 모습.

 

제작진은 우스갯소리를 섞어 “퀴어 유튜브계의 공영방송”을 표방한다고 했다. 공영방송이 갖춰야 할 필수 요소 가운데 하나는 ‘품위’다. 독일 작가 악셀 하케는 책 <무례한 시대를 품위 있게 건너는 법>에서 품위란 “다른 이들과 기본적인 연대 의식을 느끼는 것이며, 우리 모두가 생을 공유하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이를 기준으로 하면, 큐플래닛은 그 어떤 공영방송보다도 품위 있는 방송이라 할 만하다. 큐플래닛은 ‘조회수 대박’보다, 누군가의 꽉 막힌 숨통을 잠시나마 틔우는 산소호흡기가 되길 꿈꾼다. 손희정 평론가는 “퀴어는 지워져도 되는 존재가 아니고, 보여지는 게 당연하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큐플래닛 제작진이 꼽은 추천 영상 4>
1) 모니카&뮤즈 커플 인터뷰

유튜브 채널 ‘발라티브이’ 운영자인 범성애자 ‘모니카’와 트랜스젠더 남성 ‘뮤즈’의 이야기. 범성애자라는 정체성을 깨달은 계기, 유튜브에 자궁적출 수술 등 트랜지션 과정을 공개한 이유 등을 담았다. (▶보러가기)


2) 시니어 레즈비언 김인선 호스피스 인터뷰

30대에 이성애 결혼을 했다가 남편과 이혼한 뒤 레즈비언으로 살아온 김인선 호스피스의 사랑, 종교, 가족 이야기를 골고루 들었다. (▶보러가기)


3) 뉴스 읽어주는 퀴어―‘나무위키’ 은하선 항목, 본인이 직접 고쳐봤습니다

국내 대표적인 위키 서비스인 ‘나무위키’에서는 성소수자 차별이 어떻게 이뤄질까? 은하선 칼럼니스트가 직접 자신의 항목을 수정하며 겪은 일을 공유한다. (▶보러가기)


4) 뉴스 읽어주는 퀴어―드래그는 여성혐오일까?

‘드래그가 여성성을 과장하고 희화화해서 여성혐오를 강화시킨다’는 주장에 대해 큐플래닛이 답한다. 드래그의 개념부터 의의까지 골고루 다뤘다. (▶보러가기)

 

한겨레 김효실 기자 trans@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