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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의 총탄 흔적이 5·18 조준사격의 증거” :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5·18 유공자의 증언

“군인들 모습은 안 보였는데, 어디선가 총탄이 날아왔다.”

5·18 당시 공수부대원들의 과잉 진압에 분노한 시민들이 군용 트럭을 타고 시위를 하고 있다.
5·18 당시 공수부대원들의 과잉 진압에 분노한 시민들이 군용 트럭을 타고 시위를 하고 있다. ⓒ한겨레/ 5·18기념재단 제공

 

5·18 유공자 김태연(60·광주시)씨는 17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시위대가 몰던 군용 트럭에 서 있었는데 다리가 쥐가 내린 것처럼 쩌르르하더라. 처음엔 총 맞은 줄도 몰랐다”고 했다. 고교 3학년생이던 그는 1980년 5월21일 오후 1시가 지나 광주지방노동청 네거리를 지나던 차에서 총격을 받았다. 시위대의 차엔 비무장 시민 30~40여명이 타고 있었다. 김씨는 “운전하던 사람이 총을 맞아 트럭이 왼편으로 꺾이자 빵, 빵, 빵, 빠바방, 땅, 땅, 땅 하는 총소리가 들렸다”고 말했다. 운전석 바로 뒤에 서 있던 그는 겁이 나 도로로 뛰어내렸는데 곧바로 쓰러졌다. 김완경(60)씨 등 시위 차량에 함께 탔던 학교 친구 네댓명이 차를 잡아 세워 그를 인근 의원으로 데리고 갔다.

1980년 5·18 때 계엄군 집단발포가 있었던 5월21일 총상을 입은 김태연씨.
1980년 5·18 때 계엄군 집단발포가 있었던 5월21일 총상을 입은 김태연씨. ⓒ한겨레/ 김태연씨 제공

“총상 환자 수십명이 피를 철철 흘리고 있었다. 나도 총알이 관통해 다리가 쾅 뚫려버렸다.”

김씨는 “첫날엔 총알이 들어간 부분만 꿰매 피가 많이 샜다. 이튿날 아침에야 총알이 나온 부위까지 봉합했다”고 회고했다. 계엄군의 총탄은 김씨의 왼쪽 대퇴부를 뚫고 낭심 옆으로 지나갔다. 김씨는 총격을 받은 것은 5월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앞 금남로에서 계엄군의 집단발포로 54명이 사망한 직후다. 김씨는 “군인들이 도청 민원실 2층에 숨어 총을 쐈을 것으로 본다. 내 몸을 뚫고 간 총탄의 각도와 흔적이 그것을 말해준다”고 했다.

김씨의 부상 전후 상황을 뜯어보면 그를 쏜 군인들은 도청 민원실 옥상에서 조준사격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같은 날 계엄군의 총탄에 맞은 시민들 가운데 관통 방향이 위에서 아래로 나온 경우는 김씨 등 7명에 달한다. 그날 오후 1~2시 도청에서 10m 떨어진 지점에서 총을 맞은 박아무개씨의 경우 총알이 들어간 사입구는 왼쪽 심장 위인데 관통한 총알이 나온 곳은 어깨 아래쪽이다. 앞서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지난 12일 “도청 앞 집단발포 직후인 1980년 5월21일 오후 1시께 11공수여단이 금남로 주요 건물 옥상에 저격수를 배치해 시위대를 향해 조준사격했다고 인정한 진술을 확보했다”고 밝힌 바 있다.

1980년 5월21일 공수부대 집단발포 때 옛 전남도청 인근에서 총격을 받은 김태연씨의 총탄 상처.
1980년 5월21일 공수부대 집단발포 때 옛 전남도청 인근에서 총격을 받은 김태연씨의 총탄 상처. ⓒ한겨레/ 김태연씨 제공

이들의 몸에 있는 총상 흔적은 전두환 신군부가 시민군의 공격을 받고 자위권 행사를 위해 발포했다는 주장이 허위임을 드러낸다. 5·18 연구자 이재의 박사는 “조준사격이나 저격수 사격은 당시 군의 우발적인 발포가 아니라 사격 명령에 의한 발포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라고 했다.

 

한겨레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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