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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5월 14일 14시 22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5월 14일 14시 22분 KST

새로운 책임감

huffpost

“그래도 네가 버텨줘야 뒤에 올 여자 후배들에게 기회가 더 생기지.”

한 10년쯤 되었을까. 당시 다니던 직장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에 이런저런 고민을 털어놓는 나에게 한 어른이 건넸던 말이다. 안 그래도 여자가 적은 업계였다. 그 말을 듣고 내가 이 일을 그만두면 “역시 여자는 안 돼” 하는 사람이 분명 있겠구나 깨달았지만, 누군가의 생각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려 내 삶을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그 어른의 말에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일단 내가 살아야지’ 하는 마음이었다.

‘일하는 여성으로서의 나’에 대해

얼마 전 일이었다. 썩 내키지 않는 자리에 초대받아, 카톡방에 불평을 던졌다. 40대부터 20대까지, 때로는 일로, 때론 그저 놀기 위해 만나는 여성 동료 여섯이 모인 방이다. “아, 정말 가기 싫은데”라는 푸념을 늘어놓은 것은 “그렇다면 가지 말라”는 말을 듣고 싶어서였다. 어쩐지 마음 한구석에 들어앉은 의무감을 떨칠 핑계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돌아오는 말은 기대 밖이었다. “그래도 가셔야 해요. 현주님이 안 가면, 그 자리에서 발언할 여자가 한 명도 없는 거잖아요.” 나는 결국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

올해 초, 지난해 잠시 같이 일했던 20대 여자 동료에게서 편지 한 통을 받았다. “현주님을 보면서 ‘일하는 여성으로서의 나’를 더 긴 호흡으로, 더 의욕적이고 즐거워하는 얼굴로 상상할 수 있게 되었어요. 예전엔 모델이 없어 상상이 안 된다고 푸념했거든요. 지금은 용기도 나고 기대도 돼요.” 내가 훌륭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가 볼 수 있었던 사람이 나뿐이었기에 이런 편지를 받았다는 것을 안다. 그럼에도 10년 전쯤 그 말과 달리, 이 편지에는 코웃음을 치고 말 수가 없었다. 10년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책임감에 마음이 일렁거렸다. 물론 지금도 책임감만으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며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피로와 회의가 몰려오는 날, 그의 얼굴이 나를 조금 앞으로 밀어준다. ‘오래 버텨야지, 갈 수 있는 한 멀리 가야지’라는 마음이 든다. 대단한 모델은 아니어도, 작게나마 희망을 품을 이유가 되고 싶다.

하나의 문제가 구체적인 질감으로 다가오는 것은 늘 사람을 통해서다. 어떤 문제를 마주할 때, 그 순간 떠오르는 누군가, 실재하는 얼굴이 있느냐가 엄청난 차이를 만든다. 10년 전 나에게 “뒤에 올 여자 후배들”은 추상적인 말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어딘가 존재하겠거니 상상만 하는 누군가에게 책임감을 느낄 만큼 그릇이 큰 사람은 못 되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네가 그 일을 해야지”라는 말을 들을 때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다. 예전보다 훨씬 많은 여자 동료를 만난 덕이다. ‘그 얼굴들을 위해서’라면 과장이겠지만, 그들에게 부끄럽지 않고 싶다. 대단한 도움은 못 돼도, 그들이 극복해야 할 좋지 못한 전례는 남기고 싶지 않다.

한 사람이 지닌 사회적 역량

사람과 만나고 그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을 때, 그 사람의 문제는 희석돼서나마 내 문제가 된다. 사람을 통해 새로운 문제와 만나는 순간 무언가 부끄럽기도 불편하기도, 때로 안타깝기도 스산하기도, 또 고맙기도 벅차기도 한 마음이 일어난다. 일렁였던 마음은 시간이 흐르며 가라앉지만, 책임감은 남는다. 그런 책임감들이 모여 지향이 되고 가치관이 되는 게 아닐까. 사람들은 수없이 왔다 가지만, 그들이 떠난다고 나에게 왔던 그들의 문제가 전부 함께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를 중심으로 얼마큼 동심원에 책임감을 느끼는가. 그 책임감의 범위가 한 사람이 지닌 사회적 역량의 크기일 테다. 그렇게 생각하면, 내게 스승이 돼주는 사람은 새로운 책임감을 알게 해주는 이다. 요즘 내게는 스승이 참 많고, 그 덕에 모르는 길로도 나아갈 힘을 얻는다.

* 한겨레21에 게재된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