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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07월 23일 11시 01분 KST

위력은 어디에나 있다 : 권력형 성폭력에서 위력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최근 논란이 된 권력형 성폭력 사건의 본질은 '위력'에 있다.

뉴스1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 소장이 22일 오전 서울 시내 모처에서 열린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폭력 사건 2차 기자회견'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상대를 압도할 만큼의 강력한 힘, ‘위력’(威力). 이 낯선 단어는 2년여 전부터 자주 등장하기 시작했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위력에 의한 비서 성추행 사건이다.”(2020년 7월13일 피해자 지원단체들의 기자회견)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추행 혐의를 유죄로 판단한다.”(2019년 9월9일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에 대한 대법원 판결문)

안희정(2018년 3월), 오거돈(2020년 4월), 박원순(2020년 7월) 등 잇따른 지방자치단체장 성폭력 사건의 본질은 ‘위력’에 있다. 공직사회라는 폐쇄적 조직 안에서 감시받거나 통제되지 않는 최고 지위에 있는 남성이 업무 위계상 가장 ‘약한 고리’에 해당하는 여성 비서(직원)에게 ‘제왕적 권력’을 성적인 폭력의 형태로 휘두른 사건들이기 때문이다.

광역지자체장뿐만이 아니다. 안병호 전 전남 함평군수는 군청 여성 직원 등을 상습적으로 추행한 혐의로 기소돼 지난해 12월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았고, 검찰에서 기소유예 처분을 받긴 했지만 이재현 인천 서구청장은 지난해 1월 회식 뒤 노래방에서 여성 공무원에게 부적절한 신체 접촉을 해서 문제가 됐다.

22일 박원순 전 시장을 고소한 피해자 지원단체들은 기자회견을 열어 “고위공직자 성폭력 문제 해결을 위해 역량을 끌어모아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이라며 “피해자의 고소, 진술, 자료가 (성추행을 저지른) 고위직에게 일방적으로 전달되지 않을 방안이 필요하다”고 요구했다. 피해자가 4년간 20여명의 서울시 관계자에게 피해를 호소했다는 점을 공개하며 “위력적 구조로 침묵을 유도했던 서울시가 아니라,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조사를 해달라”고도 밝혔다.


■ ‘위력’이란 무엇인가


‘위력’은 공기처럼 존재한다. 폭행이나 협박처럼 소리 내지도,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불과 2년여 전만 해도 ‘위력 성폭력’이라는 범죄는 주목받지 못했다.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은 형법 303조에,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은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10조에 명시돼 있다.

‘업무, 고용이나 그 밖의 관계로 인해 자기의 보호 또는 감독을 받는 사람에 대해 위계, 위력으로’ 성폭력을 저지른 사람을 형사처벌하도록 한 조항이다. 하지만 그동안 위력 관계가 비교적 명확하거나 ‘성적 자기결정권’ 행사가 어렵다고 판단되는 청소년, 장애인 등이 아닌 성인 피해자에 대한 ‘위력’ 성폭력 사건 판례는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적었다.

대법원 판례에는 ‘위력이란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제압하기에 충분한 세력을 말하고 폭행·협박뿐 아니라 행위의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인 지위나 권세를 이용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돼 있다. 그런데 피해자를 때리거나 “해고하겠다”고 협박하지 않은 이상 ‘위력’을 입증하기 어렵다고 여겨서, 이 혐의를 적용해 기소하거나 유죄 판결을 받아낸 사례는 실제 많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안희정 사건은 ‘위력 성폭력’의 역사를 새로 썼다. “어떻게 지위가 타인의 인권을 빼앗을 수 있습니까?” 안 전 충남도지사가 1심 결심공판에서 무죄를 호소하며 했던 말이다. 도지사이자 차기 유력 대권 후보라는 자신의 지위가 피해자에게 ‘위력’으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주장이었다. 실제 1심을 맡은 서울서부지법 형사11부(재판장 조병구)는 “위력은 존재하나 행사하지 않았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고학력 여성은 ‘위력’의 피해자가 될 수 없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항소심과 대법원은 “(안희정의) 지위나 권세는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제압하기에 충분한 무형적 세력에 해당한다”고 못박았다. 공기처럼 존재했던 ‘위력’이 피해자에게 미친 영향을 인정한 것이다.

한겨레
최근 문제가 된 지자체장 성추행 사건


■ ‘위력’은 어떻게 ‘성폭력’이 되나


“서울시장의 엄청난 위력 속에서 어떠한 문제제기도 할 수 없었다.” 지난 13일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이 박원순 전 서울시장을 고소한 피해자를 대신해 전한 말이다. 안희정 사건의 피해자인 김지은씨 역시 <김지은입니다>에서 “말할 수 없음. 문제제기할 수 없음. 그것이 바로 위력”이라고 했다.

‘왜 성추행을 당하자마자 신고하지 않았냐’는 공격에 대한 답인 셈이다. 김지은씨는 “그가 가진 권력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게 흐지부지 묻혀버리는 건 아닌지 걱정”했고 “성폭행이 있었던 당시 즉각 수사기관에 말했더라도 제대로 수사가 이뤄지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다.

김씨는 “고소를 결심하고 변호사의 제안으로 기자를 만난 바로 다음날 안희정에게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고 털어놨고, 박원순 전 시장의 경우에도 고소 사실이 피고소인에게 미리 전달됐다는 의혹이 나온다.

지자체장들의 ‘제왕적 권력’은 일상적인 성희롱, 성추행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오거돈 전 부산시장은 성추행 사건이 불거지기 전에 이미 여성 직원들을 주변에 둘러앉힌 회식 사진으로 입길에 오른 바 있다.

안희정의 일부 측근들 역시 여성들을 도지사 옆에 앉게 하면서 “지사님 가까이 여자가 있어야 분위기가 좋아진다”는 말을 거리낌 없이 했다고 한다.(<김지은입니다>)

지자체장들의 비서로는 젊고 예쁜 여성들을 일부러 발탁한다. 여성을 성적 대상화함으로써 남성들의 연대와 위계를 증명하는 방식이다.

이는 지자체장에 대한 ‘돌봄’을 대부분 여성의 몫으로 전가하는 노동환경과도 무관하지 않다. 시장의 속옷을 챙겨주거나, 아들과 요트를 타는 도지사의 일정 조율까지 여성 비서에게 도맡게 하면서 지자체장의 ‘심기 보좌’를 강조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별정직 공무원이었던 김지은씨는 계약 해지를 걱정해야 했고, 박 전 시장을 고소한 피해자는 인사이동 요구가 번번이 좌절된 경험을 증언하고 있다. 성폭력과 노동착취는 복합적으로 결합된다.

남성이 피해자일 때는 ‘갑질’ 사건이 되지만, 여성이 피해자이면 ‘동의’나 연애 감정 여부를 따지며 지자체장의 ‘여자 문제’가 되어버리는 식이다. 여성학 연구자인 권김현영은 “직업 선택과 승진 등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자체장이 피해자에게 성적 요구를 하는 것 자체가 권력 남용이고 폭력”이라며 “여성들에게 권력자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는 돌봄을 강요하는 것은 젠더노동의 문제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뜻”이라고 지적했다.

 

■ ‘위력 성폭력’은 왜 반복되나

 

김현미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한국 사회의 ‘권력형 성범죄’를 ‘권력 과시형 성폭력’과 약자의 모습을 흉내내는 형태로 이뤄지는 ‘화간 판타지’ 두 가지로 나눴다. 김 교수는 “지위가 높은 남성이 젊은 여성을 옆에 두고 성적인 대상으로 삼으면서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고 남성적인 조직 위계를 확인하는 경우가 많다. 한편으로는 훌륭한 리더인 자신의 외로움을 호소하는 방식으로 피해자를 은밀하게 통제하는 모습도 나타난다”고 말했다. 둘 다 권력을 갖고 있어서, 위력이 작동해서 가능한 일이다.
선출직인 지자체장을 감시·통제할 수단이 없다는 점도 문제다. 최종 승인권자인 지자체장이 성폭력을 저질렀을 경우에 대처할 지침이나 이를 관리감독할 상급 기관이 없는 탓이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선출직의 경우에 선거운동을 장시간 하면서 지지하는 그룹이 형성되고 외부 공격에 방어해야 한다는 이유로 조직을 더 폐쇄적으로 운영하는 경향이 있다”며 “그 안에서 위력에 취약한 구성원이 피해자가 되면 적극적으로 대책을 찾을 수 없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국가인권위원회와 같은 독립된 제3의 기구에 선출직과 고위공직자 성폭력 사건 신고·조사권을 줘야 한다고 제안했다.

“미투 이후 모든 과정은 위력 그 자체였다.”(<김지은입니다>) 공적인 권력이 ‘위력’이 되고, 위력이 ‘성폭력’이 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야, 이 반복되는 고통도 끝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