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2021년 01월 08일 13시 26분 KST

"감동적인 이야기 나올 수밖에 없다" : ‘정치는 쏙 뺀’ 이미지 포장 예능의 위험성

최근 나경원 전 의원이 가족과 함께 '아내의 맛'에 출연했다

TV조선
출연해 평범한 엄마, 아내의 모습을 보여주며 호감을 산 나경원.

 

비누 거품을 얼굴 가득 묻히고 양손으로 빡빡 문지른다. 가끔 ‘팽~’ 하고 코도 푼다. 브랜드가 제각각인 화장품을 툭툭 털어 몇번 두드리면 세안 끝. 시청자는 ‘어머, 저거 난데?’라고 동질감을 느끼며 웃는다. 지난 5일 방영한 <티브이(TV)조선> 관찰예능 <아내의 맛>에 출연한 나경원 전 국회의원의 모습이다. <아내의 맛> 이후 많은 이들이 나경원 전 의원을 ‘깍쟁이 정치인’이 아닌 ‘인간미 넘치는 정치인’으로 다시 보기 시작했다.

제작진이 붙인 부제 ‘인간미의 맛’처럼, 나 전 의원은 예능에서 처음 남편과 딸, 아빠까지 공개하며 평범한 엄마, 아내, 딸의 모습을 강조했다. 다운증후군 장애를 가진 딸의 드럼 연주에 맞춰 탬버린을 흔들며 춤을 추고, 함께 요리하며 차가운 정치인의 이미지를 덜어냈다. 장애를 가진 딸이 태어났을 때의 막막함을 이야기하고, 딸이 “엄마 아빠는 점점 늙어가니 이제 내가 먹여 살려야 한다. 언제까지 도움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하는 장면이 특히 인상 깊었다는 이들이 많다. 한 누리꾼은 “정치인으로서 차갑고 이기적이라 별로였는데, <아내의 맛>을 보면서 호감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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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해 군대가는 아들을 걱정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준 나경원.


나 전 의원은 보궐로 치러지는 서울시장 선거 출마를 앞두고 있다. 선거방송심의에 관한 특별규정은 ‘후보자가 선거일 전 90일(재보궐의 경우 60일)부터 방송 및 보도·토론방송을 제외한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을 금지’하기에 선거법 위반은 아니지만, 가족을 앞세워 이미지 정치를 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12일에는 서울시장 출마를 고민 중인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도 남편과 함께 나온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은 6일 논평을 내어 “티브이조선 <아내의 맛>은 선거 시기를 코앞에 두고 정치인을 출연시켰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라며 “선거에 출마할 것으로 알려진 인물을 이용해 시청률을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추정된다”고 비판했다.



정치판, 예능의 힘

 

정치인의 예능 출연이 새롭고 특별한 일은 아니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정계에 입문하기 전인 2009년 <무릎팍도사>(문화방송)에 출연해 ‘안철수 신드롬’을 일으킨 뒤, 정치권에는 예능 출연 바람이 불었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문재인·박근혜 당시 후보가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에스비에스)에 출연해 큰 화제를 모았고, 정치인이 출연하는 예능의 장르도 더 다양해졌다. 이재명은 관찰예능 <동상이몽>(에스비에스)에 출연해 평범하고 어설픈 남편의 모습을 보여주며 ‘명블리’라는 애칭을 얻는 등 인지도를 크게 높였다.

특히 2017년 대선 시즌 이런 현상은 더욱 본격화했다. 안희정은 <말하는대로>(제이티비시)에 출연해 감미로운 목소리로 노래까지 부르며 여성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정치인이 티브이 토론이 아닌 토크쇼나 예능 등에 나와 성장기, 인생역정 등을 이야기하는 모습에 ‘정치 예능화’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왔지만 시청자는 열광했다. 씨제이이엔엠(CJ ENM)의 한 예능 피디는 “사람들은 평소 잘 볼 수 없는 이들의 모습을 티브이에서 보고 싶어 하는데 정치인도 그중 하나다. 정치인이 나오면 시청률이 잘 나온다”고 말했다. <아내의 맛> ‘나경원’ 편도 자체 최고 시청률인 11.2%를 기록했다.


편집은 위험하다


하지만 예능은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며 이미지를 만든다는 점에서 정치인의 출연은 문제일 수밖에 없다. 제작진이 같은 장면을 두고도 어떻게 편집하느냐에 따라 이미지는 180도 달라진다. 케이블채널 한 예능 피디는 “‘인간미의 맛’이란 부제에 맞게 편집을 했을 것이기에 감동적인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관찰예능이 다른 예능보다 특히 문제인 것은 시청자가 ‘100% 실제’라고 착각한다는 데 있다.

대화 속에서 자연스러운 변명의 기회를 줄 수도 있다. <아내의 맛>은 딸의 입시비리 의혹과 아들의 원정출산 관련 의혹을 상쇄했다. 나 전 의원은 ‘1억원 피부과 논란’에 휩싸인 적도 있지만, 이 방송은 ‘화장품을 아껴 쓰고 나눠 쓰는 알뜰한 사람’으로 포장한다. “(아들) 입대 날 재판받으러 가야 한다. 불출석 허가 신청서 냈는데 안 해준다. 그런 거 허가해줘야지. 중요한 증인도 아닌데”라는 나 전 의원의 억울함에 힘을 실어주기도 한다.


법적·제도적 장치 필요


정치인의 예능 출연을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만은 없다. 유력 서울시장 후보군인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유튜브로 먹방 등을 하고,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 역시 유튜브로 일상을 공개한다. 유권자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것이 중요한 시대에 예능은 좋은 창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관찰예능인 <아내의 맛>이나 가십예능인 <라디오 스타>처럼 ‘정치는 쏙 뺀’ 이미지 포장 예능은 선거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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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정치 예능에 출연해 호감도를 높였던 강용석.


정인숙 가천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는 “정치인의 예능 출연은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이 모두 있다. 시청자가 시사프로그램에서 제공하기 어려운 후보자의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면에서 순기능이 있다”며 “하지만 시청자가 연출된 이미지만을 바탕으로 투표할 우려가 있다. 예능이 선거의 당락까지 결정할 중요한 요소가 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조송현 동아대 국제전문대학원 겸임교수는 “정치인 출연 예능은 전통적인 뉴스·시사·보도프로그램처럼 정치적 영향력을 갖는다는 연구 결과가 국내외에 이미 나와 있다. 다만 최근에는 긍정적인 논의도 늘었다. 정치인의 예능 출연 자체를 막는 것보다는 법·제도 정비나 가이드라인 마련이 필요하다. 예컨대 선거방송에서 균형과 다양성을 중시하듯 예능도 그러한 가치를 고려해야 한다. 현재 법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면 방송사에서 자체적으로 살펴야 한다”고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