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용이의 새 보금자리는 햇볕이 잘 드는 산 중턱이었다. 산 아래로는 계사와 마당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닭들의 모습이 보였고, 겨울의 마른 나무 냄새와 흙냄새에 속이 뻥 뚫리는 곳이었다. 농장 관리자분들은 삐용이를 위해 포크레인을 불러 땅을 팠고, 그 주변으로 펜스를 둘렀다. 따뜻한 전열 기구가 설치된 돼지 집을 설치했다. 제대로 된 집을 지어주기 전의 임시 거주지였는데, 삐용이는 꽤 마음에 들었는지 코로 온 사방천지를 훑으며 돌아다녔다. 손을 뻗어 만져본 삐용이의 털은 생각보다 부드러웠고, 그 너머의 피부는 꽤 튼튼했다. 삐용이는 누가 만지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않고 제 볼일을 부지런히 봤다.
산 중턱까지 온 수의사는 삐용이는 코가 삐뚤어져 있는 위축성 비염을 앓고 있다고 진단했다. 평생 낫지 않을 것이고 지속적인 관리를 받아야 한다. 이 질병을 가진 돼지는 공장식 축산에서 바로 도태된다고 하니, 상품가치가 떨어지는 삐용이는 어린 나이에 일찌감치 도태되는 과정에서 구사일생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 것이다.
코가 불편해서인지 몸이 약해서인지 삐용이는 정말 잠을 많이 잤다. 하지만 일주일 동안 곁에 남아서 함께한 활동가가 삽질하며 흙냄새를 풍길 때 신나서 달려와 박치기를 하기도 했고, 간식을 보고 꿀꿀거리며 서둘러 달려오기도 했다. 이불을 개켜 놓으면 코로 펴고 누웠고, 이불을 제대로 덮어주면 만족스럽게 그르렁거리며 잠을 청하고는 했다. 삐용이는 애교를 부리거나 사랑을 호소하지는 않지만,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기쁘고 기특한 녀석이었다.
그리고 한 달 반 뒤인 3월16일, 삐용이는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며칠 감기몸살을 앓다가 이른 새벽에 영영 눈을 감았다고 했다. 수의사가 여러 차례 다녀가며 주사를 놓고 약을 먹이고 했으나, 기운을 잘 못 차리면 집 안으로 데려와 재우고는 했으나 그걸로 삐용이의 명줄을 잡을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서울에서 들은 삐용이의 소식은 어쩐지 현실감이 없었고 한편으로는 어쩐지 삐용이의 이름을 쉽게 꺼낼 수가 없었다. 봄이면 진달래와 개나리가 피는 양지바른 땅에 삐용이의 무덤을 지어주고, 국화꽃을 올려놓았을 때야 비로소 그 죽음이 이해됐다.
삐용이의 죽음을 두고 활동가들은 서로 위로를 건네며 마음을 추슬렀다. 삐용이가 진흙목욕을 마음껏 했고, 나뭇가지를 씹고 돌을 굴리며 잘 지냈다고, 그리고 공장식 축산에서 탈출해 도축되지도, 죽어서 고기가 되지도 않았으며, 사람들의 따뜻한 애정 속에서 존중받는 생명으로서 죽음을 맞이했다고. 삐용이는 자기 죽음을 두고 정말 많은 사람이 실컷 울었다는 것을 알까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