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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5월 09일 15시 05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5월 09일 15시 05분 KST

남북 정상 직통전화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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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 정상 간 직통전화(핫라인)가 개통된 지 보름이 넘었지만 아직 벨 소리는 울리지 않고 있다. 합의대로라면 판문점 정상회담이 열린 지난달 27일 전에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첫 통화를 해야 했다. 출입기자들의 거듭되는 질문에 청와대는 곧 하지 않겠느냐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판문점 정상회담 때 김정은은 “정말 언제든 전화를 걸면 받는 거냐”고 문 대통령에게 물었다. 문 대통령은 “실무자들끼리 미리 약속을 하면 그 시간에 맞춰 걸고 받는다”고 웃으며 대답했다. 정상 간 핫라인 운용 규칙을 아직 못 정한 게 아닌가 싶다. 통화 녹음, 통화 내용 공개, 배석자 없는 단독 통화, 긴급통화 방법 등 세부적인 규칙을 정하기로 하면 그것도 사실 복잡한 문제일 수 있다.

국가 정상 간 통화에는 통역이 있고, 배석자가 있다. 정상이 통화하는 동안 배석한 참모들은 헤드셋을 끼고 같이 듣는다. 필요하면 정상에게 쪽지를 전하기도 한다. 통화가 끝난 뒤에는 필요에 따라 내용을 공개한다. 누구와 언제 무슨 통화를 했는지 언론에 밝힌다. 하지만 남북 정상 간 통화는 다르다. 무엇보다 통역이 필요 없다. 같은 언어를 쓰기 때문에 정확하고 효과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배석자를 물리치면 비밀 대화도 할 수 있다. 문 대통령과 김정은의 ‘도보다리 밀담’에서 우리는 통역과 배석자 없는 정상 간 단독 대화의 진수를 보았다.

남북 정상이 핫라인으로 통화를 하면 주변국들이 촉각을 곤두세울 게 뻔하다. 대화를 공개하더라도 100% 다 할 리 없기 때문에 주변국 정보원들 발바닥에 땀이 날 것이다. 도보다리 밀담에는 입술 움직임으로 대화 내용을 유추하는 독순술(讀脣術)이 동원됐다. 정상들 입장에서는 당연히 보안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다. 보안에 대한 우려가 아직 말끔히 해소되지 않은 것이 남북 정상 간 통화가 늦어지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첨단 장비를 활용한 미국의 도·감청 능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서울시청 앞 플라자호텔에서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을 향해 전파를 쏜 뒤 유리창의 미세한 진동을 감지해 대화 내용을 파악했다는 얘기도 있다. 남북 정상이 통화를 하면 고성능 안테나를 뻗칠 나라가 미국만일까.

정상 간 핫라인은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를 겪고 나서 백악관과 크렘린 사이에 처음 설치됐다. 오해로 인해 우발적 충돌이 전쟁으로 비화하는 사태를 막으려면 최고 지도자 간 직통전화가 필요하다는 깨달음의 결과다. 정부는 군사적 긴장 완화와 남북 정상 간 긴밀한 협의를 위해 핫라인을 설치한다고 밝혔다. 비무장지대나 서해 북방한계선(NLL) 주변 해역의 긴급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목적이 크지만 남북 간 중요 현안이 있을 때도 핫라인을 이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판문점 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 진전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면서 주변국들이 문재인-김정은 핫라인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남북 정상 간 통화가 한반도와 동북아 정세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주변국들은 ‘판문점 선언’을 한반도 비핵화 노력과 병행해 한반도 운명은 한국인 스스로 결정한다는 남북 공동의 다짐으로 읽었을 가능성이 크다.

문 대통령의 ‘운전자론’에 대한 냉소와 ‘코리아 패싱’에 대한 우려가 지면을 뒤덮었던 게 불과 얼마 전이다. 지금은 4강 외교의 중심에 문재인이 있다. 특사단은 주변국 정상들에게 방북 결과를 직접 설명했고, 북·미 정상회담 합의 사실을 백악관 앞에서 세계 언론에 직접 발표했다. 판문점 회담 일주일 만에 문 대통령은 4강 정상과 통화를 완료했다. ‘외교 귀재’로 극찬을 받던 아베 일본 총리는 북·일 간 중재를 문 대통령에게 부탁하고 있다. 문 대통령의 진정성 있는 중재외교에 대한 평가이기도 하지만 문재인-김정은 핫라인의 잠재력에 대한 인정이기도 하다.

물론 갈 길은 멀고 험하다. 곳곳에 지뢰와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북한이 보인 완전한 비핵화 의지가 또 한 번의 속임수나 시간 끌기로 판명된다면 문재인과 김정은은 동반몰락을 피할 수 없다. 문 대통령은 국제적 웃음거리로 전락하면서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몰릴 수 있다. 호랑이 등에 올라탄 건 남북 정상이 마찬가지다.

한의 완전한 핵 포기로 한반도에 항구적 평화체제가 구축된다면 한반도의 운명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열강에 포위된 지정학적 저주를 남북 공조를 통해 지정학적 축복으로 바꿀 수 있다. 동북아의 균형추 역할도 가능하다. 해양과 대륙을 연결하며 북방으로 뻗어가는 지경학적 축복도 누릴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남북 정상의 직통 라인은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관건은 역시 비핵화다.

* 중앙일보에 게재된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