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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 역시 한명의 '며느리'인 '며느라기 작가'는 간절히 기다리는 게 있다 (인터뷰)

"제 시어머님은 민사린에게 감정이입을 하셨어요. 본인도 며느리인 거죠"

수신지 작가는 사진 촬영을 끝내 사양했다. 대신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캐리커쳐'를 그려 보냈다. 
수신지 작가는 사진 촬영을 끝내 사양했다. 대신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캐리커쳐'를 그려 보냈다.  ⓒsooshinji

다큐멘터리 ‘b급 며느리’, 책 ‘며느리 사표’, ‘에스비에스 스페셜, 며느라기-화목하고 불편한 가족 이야기‘, ‘문화방송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까지…. 대한민국 며느리들이 발칙해지고 있다.

‘귀머거리 3년·벙어리 3년·장님 3년’까지는 아니라도 “(가정의 평화를 위해) 가만히 있으라”는 강요 아닌 강요에 침묵했던 며느리들이 공고한 구조에 균열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 출발점에는 지난해 5월부터 올해 1월까지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을 통해 연재된 웹툰 ‘며느라기’가 있다. 초짜 며느리 민사린의 결혼생활을 통해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그 소소하지만 중요한 이야기를 공론의 장에 올린 수신지 작가를 지난 19일 마포구 서교동에서 만났다.

ⓒsooshinji

그간 언론과의 인터뷰를 극구 사양해왔던 수신지 작가는 여전히 조심스럽고 신중했다. “연재를 진행한 에스엔에스 계정이 ‘수신지’가 아닌 ‘민사린’ 이름으로 돼 있잖아요? 실존인물 민사린이 먹방 등 일상과 더불어 취미로 짬짬이 올리는 ‘웹툰’이라는 설정이었어요. 연재가 끝날 때까지 그 설정을 깨고 싶지 않아 인터뷰를 거절했죠.” 연재가 끝난 뒤에도 ‘작가’로서의 자아와 ‘개인’으로서의 자아를 분리한다는 나름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한동안 노출을 자제해왔단다.

“서양화과를 졸업한 뒤 2003년부터 동화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했어요. 나만의 이야기를 하고픈 욕망은 늘 있었죠. 그러다 제 난소암 투병기를 다룬 만화 ‘3그램’(2012)을 펴내게 됐어요. 그때부터 ‘수신지’라는 필명을 쓰며 나름의 ‘자아 분리’를 시작했던 것 같아요.(웃음)”

웹툰 ‘며느라기’는 인스타그램(42만여명)과 페이스북(22만여명)을 통해 60만이 넘는 팔로워를 거느렸다. 지난해엔 ‘2017 오늘의 우리 만화’에 선정되기도 했다. 대중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인정받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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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며느리’였을까?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진 건 꽤 오래됐어요. 2003년 ‘시금치’라는 단편을 블로그에 게재한 것이 시작이었달까. 결혼하기 전인데, 잠재의식 속에 나에게도 언젠가 닥쳐올 일이라는 막연한 불안감이 있었나 봐요. 하지만 그게 끝이었어요. 문제의식은 있되, 전달할 메시지가 무엇인지 그땐 분명치 않았으니까요.”

시간이 흘러 결혼을 하고, 며느리가 된 작가는 어느 순간 자진해서 ‘며느리 도리’를 하는 자신을 깨달았다.

“내가 왜 이럴까? 누가 시키지도 않았고, 안 해도 뭐라고 하지 않는데 말이죠. 그 의문이 화두가 됐어요. ‘며느라기’는 ‘며늘아기’에서 파생된 말로, 제가 만들었어요. 며늘아기는 귀엽게 부르는 말 같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 같은 존재, 가르쳐야 할 존재라는 뜻이 숨어있잖아요? 그 단어에서 ‘이쁨받고 싶고, 칭찬받고 싶어 노력하는 시기나 기운’을 이르는 ‘며느라기’를 떠올리자 스토리는 일사천리로 풀리기 시작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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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시나리오와 그림 샘플을 만들어 주요 포털과 연재사이트를 두드렸지만,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돈을 못 벌어도, ‘짤방’처럼 돌아다닌대도 많은 사람이 봤으면 해서 블로그에라도 연재해야겠다 결심했어요. 그 순간, ‘민사린의 에스엔에스’라는 설정이 머리를 스치는 거예요. 인스타는 10컷밖에 못 올리기 때문에 기승전결을 다시 짜고 그림도 새로 그려야 했지만, 어느새 좌절감은 사라지고 신바람이 나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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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웹툰 ‘며느라기’가 탄생했다. 팔로우 숫자가 0에서 2만이 됐을 때 “2만 명이 한 공간에 모이면 얼마나 많을까 헤아리며 뛸 듯이 기뻤다”는 작가는 ‘2만명 특별기념 만화’를 그려서 올렸다. 3만명 기념 만화는 완성을 하기도 전에 팔로워가 5만명, 7만명 등 ‘기하급수적’으로 느는 바람에 올리지 못했다.

모두가 공감할 에피소드를 그려내기 위한 나름의 원칙도 있었다. ‘민사린의 시댁은 대한민국 평범치보다 상위여야 한다’였다 “극단적인 상황은 다 배제했어요. 사람들이 ‘우리 시댁은 이 정도는 아니잖아?’라며 ‘면피’하면 안 되잖아요? 평범하지만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을, 잘못된 것 같지만 말하기 애매한 상황이랄까? 최소한 ‘며느라기’에 등장한 상황을 경험하면 화를 내도 된다는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싶었어요. 실제로 이뤄졌죠? 최소 60만명이 합의한 셈이니.(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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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이 가장 궁금했을 질문. 남편과 시댁 식구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남편은 처음부터 가장 적극적인 지지자였고요. 시어머님은 민사린에게 감정이입을 하셨어요. 본인도 며느리인 거죠. (웃음) 친정엄마는 ‘적당히 하라’고 하셨죠. 하하.”

연재를 마무리하고 나니 아쉬운 점도 있다. ‘고구마 민사린과 대비되는 사이다 형님의 에피소드를 더 많이 넣어달라’, ‘김장철 에피소드를 꼭 넣어달라’는 팬들의 두 가지 피드백에 부응하지 못한 것이다.

“사린이가 겪을 법한 에피소드는 차고 넘치지만, 속을 시원히 뚫어줄 형님은 롤모델이 없으니 어려움이 좀 있더라고요. (웃음) 김장철마다 불려 다니는 며느리의 고생담은 추석으로 시작해 설날로 끝나는 웹툰의 설정상 넣기가 애매해 아쉬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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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며느라기‘의 성공은 앞서 나온 ‘의미 있는 여성 콘텐츠’에 기댄 측면이 크다고 했다. “초기엔 두려움도 많았어요. ‘강남역 살인사건’ 등으로 잇단 ‘여혐 논란’이 빚어질 때라 누군가 해코지 할까 무서웠죠. 하지만 ’82년생 김지영′ 등이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며 분위기가 바뀌었어요. 그 덕을 봤죠.”

‘며느라기‘는 올초 단행본으로 출간됐고, 지금까지 1만5천권 정도가 팔려나갔다. 서울 마포구 서교동 ‘전시공간’에서 전시회를 겸해 관련 상품을 판매하는 오프라인 팝업 스토어가 다음 달 3일까지 운영된다.

“웹툰에 댓글을 달고 메시지를 보낸 팬 중 의외로 20대 미혼여성이 많았어요. 팝업 스토어에도 남자친구 손을 잡고 와서 책을 사서 선물하는 미혼여성이 상당수 있고요. 뿌듯하더라고요. 문화를 바꾸려면 기혼뿐 아니라 미혼여성, 그 결혼 상대자인 남성의 변화까지 수반돼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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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강연을 다니며 독자들을 직접 만나다 보니 “이러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는 수신지 작가. “저도 평범한 30대 며느리일 뿐, 정답은 몰라요. 작업을 하면서 저조차 ‘며느라기’에서 완벽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걸 깨달은 걸요. 다만, 저는 ‘며느라기’라는 신조어가 ‘맨스플레인’처럼 널리 쓰여 논의의 출발점이 되기를 바라요. 누구나 ‘며느라기’를 겪었거나, 겪고 있거나, 겪을 수 있다는 걸 인정하면, 부부간에도 가족간에도 대화를 풀어가기 쉬울 거예요.”

전국 942만 기혼여성(2017년 통계청 자료)이 ‘며느라기’에서 벗어나는 그 날까지 “뭔가 잘못된 것 같지 않냐”는 웹툰 ‘며느라기‘의 조근조근한 문제제기는 유효할 것이다. 더 나아가 수신지 작가는 “‘며느라기’에 힘을 보태 세상에 어퍼컷을 날릴 더 많은 여성 콘텐츠를 간절히 기다린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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