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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은 국내 최초 성희롱 소송을 맡은 인권 변호사였다

10일 숨진 채 발견됐다.

박원순 서울시장
박원순 서울시장 ⓒ뉴스1

실종됐다가 숨진 채로 발견된 박원순 서울시장은 3차례나 연달아 서울시장에 당선된 여권의 대선 주자 중 한 명이다.

특히 4월 총선에서 일명 ‘박원순계’로 불리는 인사 10여명이 대거 국회로 입성하면서 당 안팎에서 대권 주자로서 힘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9일 오전 연락을 끊은채 실종됐다가 10일 오전 0시1분 서울 종로구 삼청동 숙정문과 삼청각 중간 지점의 숲속에서 숨진채로 발견됐다.

박 시장은 1956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나 13세 때 작은 할아버지의 양손으로 입양됐다. 이후 서울 경기고를 졸업하고 1975년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지만 유신체제 반대 시위와 고(故) 김상진 열사 추모식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투옥, 1학년도 채 마치지 못하고 제적을 당했다.

단국대 사학과를 졸업한 뒤 영국의 런던 정치경제대학(LSE)에서 국제법을 수학한 박 시장은 한국에 돌아와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결국 1980년 제22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대구지방검찰청 검사로 임용됐으나 사형 집행 장면을 참관하지 못하겠다는 이유로 6개월만에 사표를 낸다.

이후로는 상당기간 인권 변호사로서 1980년 권인숙 성고문 사건과 미국 문화원 사건, 한국민중사 사건, 말지(誌) 보도지침 사건 등 사회적으로 민감한 사건을 주로 맡았다.

고인이 변호한 한국 최초 성희롱 관련 소송인 서울대 우조교 성희롱 사건은 신체접촉이나 성적인 농담에 대한 손해배상을 인정한 첫 확정 판결로, 직장내 성희롱에 대한 시선을 바꾼 상징적 재판이었다.

박 시장은 1995년부터 국내 대표적인 시민단체인 ‘참여연대’의 사무처장으로 활약했다. 2000년 1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는 부정부패 혐의로 얼룩진 정치인들을 낙선시키자는 운동을 전개했고 대상자 86명을 명단으로 발표, 총선을 앞둔 정치권을 뒤흔들기도 했다.

이외에도 국민생활최저선운동, 사법개혁운동, 작은권리찾기운동, 소액주주운동, 예산감시 정보공개운동 등 여러 사회참여운동을 이끌었다.

2000년에는 아름다운 재단을 설립하고 이를 토대로 사회적 기업인 아름다운 가게도 열었다. 기부받은 물건을 재가공해 저소득층에게 저렴하게 팔고 그 수익을 기부하는 게 아름다운 가게의 주 목적이다.

박 시장은 2006년 공공기관에 시민을 위한 정책을 제안하는 일종의 싱크탱크 희망제작소의 상임이사로서 한국 최초로 거버넌스(민관협치)를 현실화했다는 평도 받는다.

2011년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사퇴로 공석이 된 서울시 사령탑으로 올라섰다. 이후 시민운동가 출신 서울시장으로서 반값등록금, 무상급식, 비정규직 정규직화, 청년수당, 도시재생, 사회적경제기업 협동조합, 원전하나줄이기, 노동이사제, 토건에서 복지 패러다임으로 전환 등 사회정책을 단행했다.

2017년 19대 대선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 경선에 출사표를 던졌으나 중도포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울시 최초 3선 시장 고지에 오르면서 여전히 여권의 차기 대선후보로서 입지를 넓혀왔다.

성희롱은 범죄라는 것을 세상에 알린 인권변호사로 시작, 시민운동가를 거쳐 서울시장까지 올라 대권을 꿈꿨지만 극단적 선택으로 발걸음을 멈추게 됐다.

본인이나 주변 사람을 위해 도움이 필요한 경우 다음 전화번호로 24시간 전화 상담을 받을 수 있다. (자살예방핫라인 1577-0199 / 희망의 전화 129 / 생명의 전화 1588-9191 / 청소년 전화 1388) 생명의 전화 홈페이지(클릭)에서 우울 및 스트레스 척도를 자가진단 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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