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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낙지에 대한 명상

ⓒAnna Petrova Ilieva-Alikaj / EyeEm via Getty Images
ⓒhuffpost

최근 한 동영상이 중국의 사회관계망서비스인 ‘웨이보’를 달구었다. 물이 끓는 냄비에서 민물가재 한 마리가 빠져나온 것이다. 정말 극적이었다. 가재는 자신의 집게다리를 스스로 자르면서까지 생명을 부지했고, 이 영상을 찍은 사람은 이 가재를 살려 자신의 수족관으로 데려왔다고 한다.

사실 이 사건은 최근의 동물 정치학에서 핵심적인 논쟁 지점을 보여준다. 가재는 왜 끓는 물에서 빠져나왔는가? 고통 때문이라는 걸 우리는 직관적으로 알지만, 근대과학은 이를 꽤 오랫동안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상당수 과학자는 중추신경계가 있는 척추동물만 고통을 느낄 수 있고, 다른 동물은 반사행동을 하는 것일 뿐이라고 깎아내렸다.

하지만 가재나 게 등 갑각류나, 문어나 낙지 등 두족류가 느끼는 고통에 대한 연구도 꾸준히 진행되어왔다. 이번에 유튜브 스타가 된 민물가재에 대한 연구도 여럿 있다. 2003년 일본 연구팀은 민물가재에 빛을 쪼이고 10초 뒤 쇼크를 가하는 실험을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민물가재는 빛을 쪼이자 안전한 공간으로 대피했다. 이 행동이 보여주는 바는 가재가 고통에 대한 ‘두려움’, 그러니까 일종의 ‘심리적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최근에는 고급 음식으로 소비되는 바닷가재가 관심의 대상이다. 스위스는 지난 3월 끓는 물에 산 바닷가재를 넣어 끓이는 행위를 법으로 금지했다. 얼음물에 넣어 운송하는 것도 안 된다. 무척추동물도 고통을 느낀다는 최근의 연구 결과를 반영한 조처다.

어차피 죽여서 먹을 것을 뭐 하러 따지냐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어차피 먹을 거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여주자는 게 스위스 같은 나라가 요리법에 참견하는 이유다. 그게 생명에 대한 예의다.

맨 처음 산낙지 먹었을 때를 기억하는가? 나는 무대에 선 배우라도 된 듯, (못 먹으면 창피할까 봐) 기름장을 덕지덕지 바른 뒤 꿀꺽 삼켰다. 하지만 몇년 전 채식을 시도하면서부터 산낙지를 먹지 않고 있다. 꿈틀거리는 산낙지를 보고 불편해하는 나의 감정이 자연스럽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내가 다른 육고기를 지금까지 쉬이 끊지 못하는 이유는 끔찍한 생산 과정이 우리 눈에서 은폐되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우리나라는 동물을 보호하기 위해 동물보호법, 실험동물법 등을 시행 중이다. 동물보호법에서 동물은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신경체계가 발달한 척추동물’로 정의된다. 이 법에 따르면, 개나 비둘기, 개구리는 동물이지만, 낙지와 가재는 동물이 아니다. 동물 실험의 오남용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실험동물법의 적용 대상에서도 무척추동물은 빠져 있다. 한국은 유난히 ‘척추동물 중심주의’가 강한 나라다. 반면 세계적인 흐름은 다르다. 유럽연합과 캐나다 등에서는 문어나 오징어 같은 두족류도 실험동물법의 적용 대상이다. 뉴질랜드는 게나 바닷가재 등 갑각류를 포함시킨다.

문어와 낙지 같은 두족류의 유전자가 외계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문어는 사람을 구별할 정도로 지능이 높은데, 이들의 신경계가 지구에서 진화한 생명체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게 이유 중 하나다. 디엔에이(DNA) 분자 구조를 발견한 프랜시스 크릭도 지구 생명의 기원이 외계에서 왔다고 주장했으니, 무작정 무시할 만한 건 아닌 것 같다.

산낙지를 보고 불편함을 느낀다면 안 먹는 게 좋다. 최후의 몸부림을 보면서까지 먹어야 할까. 우주의 먼 길을 날아온 은하의 형제들에게 예의를 지키면 어떨까.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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