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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27일 14시 43분 KST | 업데이트됨 2021년 12월 27일 14시 43분 KST

'깐부 할아버지' 오영수의 연기 인생은 돌고 돌아 '오징어 게임'으로 빛을 봤다(인터뷰)

사실 오영수는 40여년 전부터 항상 연기를 해왔다.

한겨레
배우 오영수가 지난 12일 오후 경기 성남의 한 카페에서 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성남/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그 영화가 배우 생활에 획을 긋는 마지막 영화가 되리라 생각했어요.”

지난 12일 경기 성남 위례새도시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배우 오영수(77)가 말했다. 당시 40여년 연기 생활에 남겨질 마지막 선 굵은 작품이라고 여긴 영화는 고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이었다. 그는 영화에서 노승을 연기했다.

하지만 겨울이 끝이 아니고 봄을 맞으며 순환하듯 그에겐 또 다른 작품이 기다리고 있었다. <봄 여름…>에 나온 오영수를 유심히 본 사람이 있었다. 황동혁 감독이었다. 황 감독은 오영수에게 영화 <남한산성>(2017)에 출연해달라고 제안했다.

이어질 듯했던 인연은 이어지지 않았다. 오영수는 일정이 맞지 않아 황 감독의 제안을 받을 수 없었다. 계절이 이어지듯 인연은 다시 찾아왔다. 지난해 11월 황 감독이 서울 대학로로 직접 찾아와 오영수가 출연한 연극을 본 뒤 또 다른 제안을 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이었다. 오영수는 끝이 아니라 또다시 선 굵은 작품을 남겼다. 글로벌 스타가 됐고, 내년 1월9일(현지시각) 열리는 미국 골든글로브 시상식 티브이(TV) 부문 남우조연상 후보에도 올랐다.

이게 끝은 아닐 터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끝나면 다시 봄이 찾아오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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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오영수가 지난 12일 오후 경기 성남의 한 카페에서 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성남/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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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연극 에 출연한 오영수(가운데). 오영수 제공

■ 봄, 메피스토가 될 뻔했던 <파우스트>

오영수는 어떻게 연극의 길로 들어섰을까. “제대하고 나와서 얼마 안 됐을 때였죠. 연극 극단에 있던 친구가 ‘집에 있으면 뭐 하니? 연극 극단에서 같이 일하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극단을 찾으면서 지금까지 54년 연기 생활을 하게 된 거였죠.” 1967년, 23살, 극단 광장이었다.

1975년 오영수가 극단 자유에 있을 때 괴테의 희곡을 올린 <파우스트>에서 주인공 파우스트를 맡았다. “<파우스트>는 어느 극단에서 해도 망한 적이 없다고 할 만큼 인기가 높은 연극이죠. 그때도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했는데, 미도파백화점 앞까지 관객이 줄 설 정도였어요.”

무대에 올리기 전 김정옥 극단 자유 대표는 오영수에게 파우스트 역보다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메피스토) 역이 더 맞을 것 같다고 했다. “김정옥 선생님은 내가 파우스트를 맡기엔 너무 젊은데다 인간미는 메피스토가 더 있으니까, 메피스토를 추천했던 거였죠.”

당시 연출자는 오영수에게 파우스트 연기도 괜찮았다고 했다. 선과 악 사이에서 고민한 파우스트처럼 오영수도 고민했다. 결국 그의 선택은 파우스트였다. 주연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지구본을 잡고 독백하는 장면에서 20초가량 의식을 잃었어요. 연습하면서 탈진해 몸이 완전히 얼어붙은 거였죠. 오만과 자만심이 낳은 결과였다고 생각합니다.”

실수는 그에게 밑거름이 됐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추락한 순간은 내가 연기를 하는 데 자양분이 됐어요.” 그리고 새로운 도전을 해보고 싶다고도 했다. “나는 항상 이런 얘기를 해왔어요. ‘나이 들어서 다시 한번 파우스트를 해야지’라고요.”

한겨레/오영수 제공
1993년 연극 에 출연한 오영수(왼쪽 둘째).

■ 여름, 백상 연기상 안겨준 <피고지고…>

오영수는 1993년 연극 <피고지고 피고지고> 무대에 선 뒤 이듬해 백상예술대상 연기상을 받았다. “그때는 시상식에 가지 못했어요. 시상식이 열릴 때도 연극을 하느라 못 간 거였죠.”

그는 1993년 초연 뒤 15년 세월이 흘러 2008년 이 연극을 재연했고, 2018년엔 삼연을 했다. 오영수가 맡은 배역은 보물을 찾아서 마카오에서 카지노를 경영하는 게 꿈인 인물이었다.

연극은 작품성과 흥행성 모두 인정받아 1998년 미국 뉴욕에서 특별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 연극에선 보물찾기에 실패하지만, 공연하다 들른 라스베이거스에서는 잭팟을 터뜨렸다고 했다. “미국 공연을 하다 라스베이거스에 들렀어요. 같이 간 사람들이 ‘여기까지 왔으니까 한번 당기고 가자’고 해서 카지노에 가봤죠. 나도 당기는 것을 해봤는데, 갑자기 동전이 쏟아지는 거예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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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오영수가 지난 12일 오후 경기 성남의 한 카페에서 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성남/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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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오영수가 지난 12일 오후 경기 성남의 한 카페에서 와 인터뷰를 하던 중 기자에게 친필 서명을 해주고 나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성남/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 가을, 마지막 획이 될 줄 알았던 <봄 여름…>

오영수는 영화 <봄 여름…> 촬영 당시 기억을 떠올렸다. “김기덕 감독답게 영화를 엄청나게 빨리 찍더군요. 제가 나오는 부분은 여드레 만에 끝냈어요. 주왕산 주산지에서 봄에 나흘, 늦가을에 나흘, 이렇게 찍었죠. 그렇게 빨리 찍었지만 영화는 잘 나온 편이었죠.”

영화 속 사계절 가운데 어느 계절이 가장 기억에 남는지 물었다. “아무래도 낙엽 지는 가을이죠. 그때 내 모습하고 그 계절 모습이 닮았다고 생각했죠. 환갑인 60살을 앞두고 있을 때였는데, 나 역시 단풍 지어 떨어질 날 같았거든.”

오영수는 영화에서 유명해진, 고양이 꼬리에 먹물을 묻혀 암자 바닥에 ‘반야심경’을 쓰는 장면에서 직접 글을 썼다. “처음엔 글 쓰는 사람이 와서 ‘반야심경’을 썼어요. 촬영 때 시간이 좀 남아 나도 따라 썼죠. 김 감독이 휙 보더니 고양이를 안기면서 ‘선생님, 한번 써주실래요?’ 하더군요. 그 뒤엔 글 쓰는 사람과 제가 ‘반야심경’을 함께 썼죠.” 암자 세트장은 영화가 끝난 뒤 철거됐는데, 오영수는 그 글을 보존하지 않은 점을 아쉬워했다.

오영수에게 글 하나를 써달라고 했다. 그가 A4용지에 쓴 글은 ‘緣’(인연 연)이었다.

오영수는 이 영화가 자신에게 마지막 선 굵은 작품이 될 거라고 여겼다. “내 인생의 마지막 획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 내 이름을 알렸고, 영화 자체로도 괜찮은 작품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끝이 아니었다. 그가 쓴 인연 ‘연’ 자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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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오영수씨가 12일 오후 경기 성남의 한 카페에서 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성남/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코리아픽처스 제공
영화 에서 고양이 꼬리에 먹물을 묻혀 글씨는 쓰는 오영수(오른쪽).

■ 겨울, 장민호와의 인연 이어준 <3월의 눈>

오영수가 2018년 출연한 <3월의 눈>은 그에게 의미 있는 연극이었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연극 선배인 장민호가 주연으로 출연했던 연극에 같은 배역으로 무대에 섰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2011년 3월 서울 서계동 백성희장민호극장 개관 기념으로 장민호와 백성희가 출연해 초연한 연극이었다.

장민호는 <3월의 눈>에 출연했을 때 오영수에게 공연이 끝나면 자신을 안아달라고 했다. “장민호 선생님 폐가 많이 안 좋을(기흉) 때였어요. 그런데도 무대에 섰어요. 무대에서 인사할 때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은 거였죠. 그래서 무대에서 안아달라고 하신 거였어요.”

국립극단 제공
2018년 연극 에 출연한 오영수(왼쪽).

오영수 역시 3년 전 폐렴을 앓으면서 삶과 죽음의 고비를 넘나들었다. “처음에는 기침감기인 줄 알고 가까운 병원에 갔더니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했어요. 큰 병원에서도 이게 염증인지 암인지 결핵인지 확인을 못 했어요. 나중에는 폐렴으로 확진됐고 격리됐어요. 의사가 ‘만만치 않습니다’ 하는 거예요.”

그때 그는 떨어지는 낙엽처럼 삶의 마지막을 느꼈다고 했다. “제 몸무게가 평소 60㎏이었는데, 그때는 일주일 만에 10㎏이 빠졌어요. 이게 마지막인가 싶어 가까운 사람들을 부르려고 했어요. ‘이렇게 가는 건가’라고 생각했는데 결국엔 살아 나왔죠. 죽음 문턱까지 가보니 삶에 관한 생각이 조금 달라졌어요. 돈과 명예, 이런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생각을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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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오영수가 지난 12일 오후 경기 성남의 한 카페에서 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성남/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 그리고 봄, 또 다른 시작이 된 <오징어 게임>

<오징어 게임>에서 오영수가 연기한 일남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게임에서 해사하게 웃으며 결승선을 넘는다. 그의 빛나는 표정 연기는 이때만이 아니다. 기훈(이정재)과 구슬치기를 하며 “우린, 깐부잖아”라고 말할 때 그의 표정엔 슬픔, 배신, 애처로움, 희망이 뒤섞여 있다. “그 장면을 찍을 때 나도 울었어요. 어릴 적 생각도 났고. 정직하게 살아온 기훈이 살기 위해 속이잖아. 인간의 한계를 느꼈어요.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보니 눈물이 확 났어요.”

<오징어 게임>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짚어달라고 했다. “일남이 죽는 마지막 장면이겠죠. 일남의 삶이 과장된 게 있긴 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그처럼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그의 죽음을 보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생각해보게 돼요.” 

넷플릭스 제공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에 출연한 오영수.

‘깐부 할아버지’라는 별명이 맘에 드는지 물으니 그 별명을 좋아한다며 ‘깐부 정신’을 강조했다. “네 것도 없고, 내 것도 없고, 승자도 없고, 패자도 없는 게 깐부 정신이죠. 부모와 자식 간 갈등, 정치적인 갈등, 남녀 갈등, 이런 갈등이 우리 사회에 심각한 것 같습니다. 이런 문제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어느 때보다 ‘깐부 정신’이 필요하죠.”

인터뷰는 지난 한해를 돌아보고 새해를 맞는 시점에 이뤄졌다. 어른으로서 우리 시대 젊은이에게 용기가 되는 말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자신을 믿고 자신감을 가져보세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예요. 코로나로 힘들 때지만, 버티는 힘이 필요해요. 그러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밀고 나가는 거예요.”

오영수는 <오징어 게임> 이후 광고 출연 등 여러 제안을 받았지만, 모두 거절하고 연극 무대로 돌아왔다. 그는 새해 1월7일부터 3월6일까지 대학로 티오엠(TOM) 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 <라스트 세션>에서 지그문트 프로이트 박사를 연기한다. 그렇게 계절은 다시 돈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