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
2018년 03월 23일 11시 46분 KST

남성판타지를 넘어 새로운 성적 감수성의 형성으로

'미투 이후의 문학'은 어떻게 될 것인가

huffpost

“만지고 싶을거야. 여자와 헤어지고 나면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게 뭔지 알아? 촉감이야. 엉덩이, 가슴, 배에서 출렁이던 지방질, 골반에 부딪혀오던 뼛조각들의 날카로움, 입 속에서 충돌하던 앞이빨, 발가락과 발가락 사이의 촉촉함, 배란일이면 더 미끌해지는 너의 점액. ....(중략).....

너를 처음 안았을 때, 사람이 아니라 동물 같았다. 머리카락과 코에서 암컷의 냄새가 풍겨나왔고 피부에선 진액들이 흘렀지. 나는 너에게 했던 모든 말들을 단 한 구절도 기억하지 못한다. 내게 남아있는 너의 언어는 없다.”

—-김영하, <당신의 나무>(1998)중에서

대학원에서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반에 이르는 한국소설 읽기를 하고 있다. 작년 90년대 소설 읽기의 후속작업이다. 김영하의 경우 작년엔 첫 소설집 [호출]을 읽었고 올해는 두번째 소설집인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를 읽는다. 벌써 20년 전의 소설들이다.

작년 [호출]을 읽을 때는 그렇게 예민하게 못 읽었는데 이번에 두번째 작품집을 읽는 동안에는 그의 거의 모든 작품들에 재현되는 여성인물들이 거의 예외없이 성적 대상화되어 있다는 사실, 아니 성적 대상화를 넘어 거의 사물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되었다. 어쩌면 이전 작품에도 그런 부분들이 있었을 텐데 올해 들어서 이런 부분이 유난히 민감하게 포착되는 것을 보니 확실히 세상이 바뀌고 있음을 알 것 같다.

위에 인용된 부분은 김영하 소설에 등장하는 그런 여성 사물화의 가장 전형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 인용문에서 여성은 정신과 신체가 통합된 인간적 전체로서가 아니라 주인공의 ‘촉감’에 의해 하나하나 섹스토이처럼 낱낱이 분절된 모습으로 존재한다. 그 여성은 노골적이게도 사람이 아니라 동물의 암컷이며, 이 남성주인공에게 어떤 언어로도 남아 있지 못한 비인간적 유기체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

<당신의 나무>는 김영하의 다른 작품들이 흔히 보여주는 냉소주의적 태도에서 벗어나 삶의 우연과 필연, 사람 사이의 관계의 상대성에 대한 나름의 진지한 통찰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지만, 그러한 ‘진지한 통찰’의 바탕에는 이렇게 자신과 관계맺었던 여성에 대한 극단적인 타자화, 사물화가 전제되어 있다. 이런 여성인물의 사물화가 의도된 서사 전략의 소산으로 읽힐 수도 있지만 그렇다면 이런 형상화에 대한 화자의 미적 거리감이 소설 속 어딘가에 드러나 있어야 하는데 나는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Kameleon007 via Getty Images

아무튼 이런 소설들이 써지고, 또 널리 읽히고 인기를 얻는다는 것은 곧 한국사회에 이러한 여성에 대한 사물화가 마치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편만해 있었다는 것이며, 바로 이런 사회문화적 조건, 젠더지형 속에서 여성은 언제든 누구든 남성들의 성적 대상으로 도구화될 수 있다는 이른바 ‘강간문화’, 포르노문화가 비정상적으로 자리잡아 왔을 것이다. 작가 김영하는 인권 감수성이 남다른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조차도 20년 전에는 이런 문제적 여성형상에 대한 성찰을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과연 이 소설을 읽는 여성독자들의 심정은 어떨까? 이 소설집의 해설을 쓴 여성 비평가 백모씨는 이런 점들에서 응당 불편함이나 거부감을 느꼈을 텐데도 이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둔감해서가 아니라 너무 민감해서 그랬을 것이다. 문학작품에 대해 페미니즘의 척도를 들이대는 순간, 낯익던 문학장의 질서는 갑자기 낯설고 불편한 기류에 의해 요동칠 것임을 그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이제는 좀 달라질 것이다. 한국사회는 모든 국면에서 ‘미투’ 이전으로, 또 ‘강남역 살인사건’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당연히 문학 창작도 비평도 달라질 것이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지만 여성을 타자로, 대상으로, 도구로 소비하는 문화를 복제하는 문학은 이제 설 자리가 없어져야 하고, 그렇게 될 것이다. 어떤 창작의 자유도 여성은 물론 같은 인간을 타자화하고 도구화하는 자유까지 포괄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적 윤리이고 특히 더 고도의 윤리감각을 갖춰야 할 작가에게는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일종의 새로운 청교도적 엄숙주의로 가는 것은 또다른 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과문의 소치인지도 모르고 여성작가들의 비율이 너무 높아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근자에 접하는 한국소설들에선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섹스와 관련된 형상화를 찾아보기 힘들다. 연애와 사랑을 주제로 하면서도 삶과 관계에서 마치 그런 부분은 없는 것처럼 처리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그렇게 됨으로써 여성이 성적 대상화되지 않고 정당한 ‘인간’으로서 대접받게 되었다는 점에서 진전임에는 분명하지만 성적 관계가 인간관계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하면 근래의 한국소설은 그 부분에 일종의 과도한 금기가 작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사람 사이의 성적 관계가 터무니없는 남성판타지로 윤색되어 여성의 성적 도구화로 이어져서는 안 되겠지만 정신과 육체의 관계, 또 사회적 관계를 전부 포괄하는 사람과 사람의 관계 전부를 통찰하는 문학에서 성적 관계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표상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근대 이후 문학작품들에 드러나는 성적 표상의 진전 혹은 변화가 문화사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투 이후의 문학’이 어떻게 될 것인가. 여성을 도구화하는 남성판타지가 몰락하고 기존의 젠더지형을 전복하는 새로운 서사와 정동의 출현을 예상하면서도, 그것이 보다 폭넓고 깊은 인간 이해로 한층 더 성숙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필자의 페이스북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