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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이 가난하면 혁명이 아니다

  • 이하경
  • 입력 2018.04.10 10:37
  • 수정 2018.04.10 10:40
ⓒhuffpost

뉴욕타임스는 지난달 30일 ‘북한은 K팝의 침입을 감당할 수 있을까?’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평양행 남측 예술단에 걸그룹인 레드벨벳이 포함된 것을 거론했다. 한국군은 K팝을 비무장지대에서 확성기를 통해 심리전 무기로 활용하고 있고, K팝이 탈북의 동기가 되고 있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4월 1일의 공연에서 의문은 풀렸다. 김정은 위원장은 공연을 관람한 뒤 가수들과 악수하고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북한 TV에서는 통편집됐지만, K팝 수용은 북한이 정상적인 나라임을 보여주려는 매력 공세의 훌륭한 수단이 됐다.

남북(27일), 북·미(5월) 정상회담을 제안하고 중국을 전격 방문해 시진핑과 만난 김정은은 지금 한반도 운전석에 앉아 있다. 그러나 비핵화 의지를 의심받는 순간 워싱턴 강경파들은 주저없이 군사옵션을 꺼내들 것이다.

반면에 김정은이 북핵 완전 폐기라는 이성적 카드를 내놓으면 북·미 수교와 경제 지원이라는 파천황의 신세계가 펼쳐진다. 이때 베트남식 도이모이 방식이 가장 바람직하다.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되, 시장경제를 채택하고 북·미 수교를 통해 외자 유치와 개방을 달성해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모델이다.

베트남은 호찌민(1890~1969)의 정신이 사후(死後)에도 지배하는 독특한 나라다. 그의 강인한 리더십으로 독립전쟁에 나서 식민지 종주국 프랑스를 쫓아냈다. 세계 최강 미국과 싸워 이겼고, 중국을 물리쳤다. 1992년 헌법에 시장경제를 도입한 뒤 불구대천의 원수였던 미국과 95년 수교하면서 경제에 날개를 달았다. 미국의 핵추진 항공모함이 입항하면 공산당과 전 국민이 열렬히 환영한다. 동남아에서 미국과 가장 협력적인 나라가 됐다. 적과도 손을 잡는 호찌민의 실용주의가 베트남이 미국과 함께 중국의 패권주의를 견제하는 기적 같은 전환을 이끌어냈다.

호찌민과 김정은은 젊어서 서구 세계를 경험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84년생인 김정은은 마이클 조던을 좋아하는 농구광이어서 스위스 유학 시절(1996~2001) 시카고 불스 유니폼에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등교했다. NBA 시범경기를 보러 파리까지 갔다. 가난한 식민지 청년 호찌민이 주방보조로 배를 타고 1911년 입국해 정원사로 일한 곳이다.

공산혁명가로, 노동자로 수많은 가명을 써가면서 미국·남미·유럽·아시아·아프리카를 떠돌았던 호찌민은 온몸으로 세상의 이치를 터득했다. 영어·중국어·프랑스어에 유창하고, 태국어·스페인어·독일어·러시아어에도 능숙했다. 김정은도 스위스 학교에서 영어와 독일어로 공부했다. 2007년에는 세계군인대회 참관차 인도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정보통신산업의 중심지 하이데라바드에 간 적도 있다.

넓은 세상을 경험했기 때문일까. 김정은은 아버지 김정일과 달랐다. 사상적 오염이나 주민 통제 약화를 우려했던 김정일 시대의 소극적 경제운영 방식을 버렸다. 양형섭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은 김정일 사후 한 달 뒤인 2012년 1월 17일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김정은은) 지식기반 경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중국 등 다른 나라들에서 시행된 경제개혁을 연구하고 있다”고 했다. 김정은은 같은 해 1월 28일에는 자본주의적 방법을 포함해 경제개혁을 위한 모든 방법을 논의할 것을 지시했다.

호찌민은 “혁명을 하고도 민중이 여전히 가난하고 불행하다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다”고 했다. 김정은도 “우리 인민들에게 넉넉한 생활을 마련해 주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는다”고 토로 했다. 본심이라면 호찌민식 실용주의의 길을 걸을 가능성이 있다.

김정은은 지난해 11월 29일 6차 핵실험을 하고 핵무력 완성을 선언한 뒤 한 달도 안 된 12월 23일 권력의 심장부인 평양시 외곽에 강남경제개발구를 설치하고 외자유치를 하겠다고 했다. 미완성인 핵무력을 완성했다고 서둘러 선언한 데는 대화 국면으로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실렸던 것이다. 3월 말 헬싱키의 남·북·미 1.5트랙 회의에서 북한 외무성 관계자들은 “값만 잘 쳐주면 김정은 동지 결단에 따라 핵을 내놓을 수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정은이 베트남식 도이모이 모델을 선택하면 북한은 매력 있는 투자처가 된다. 동시에 중국의 패권적 간섭에서 벗어난 친미비중(親美非中) 국가가 되고, 미국과 중국이 경쟁적으로 협력하려는 구도가 만들어진다. 평양에 트럼프 타워가 올라가는 것도 시간문제다. 하지만 북한이 한 손에 핵을 쥐고 있는 한 김정은이 약속한 ‘사회주의 부귀영화’는 불가능하다. 김정은이 북핵 완전 폐기를 결심한다면 다음 노벨평화상 수상자는 문재인, 김정은, 트럼프 세 사람이 될 것이다.

* 중앙일보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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