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아이는 '남자-여자' 법적 부부 사이에서만 태어나야 할까?

남편은 필요 없고, 아이로 충분하다는 한국 여성들이 있다.
사유리가 KBS에 공개한 아들과 자신의 사진 
사유리가 KBS에 공개한 아들과 자신의 사진 

“아이는 갖고 싶지만 결혼은 원치 않아.”

영화 <매기스 플랜>(2017)에서 미국 뉴욕에 사는 여주인공 매기(그레타 거윅)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정자를 기증할 남자를 찾아나선다. 같은 학교를 졸업했고 수학을 잘했던 남자 대학동창 가이(트레비스 핌멜)를 생각해낸다. 이어 가이를 아이의 아빠로 낙점하고 정자를 기증받기로 한다. 정자를 기증하기로 한 날 가이는 매기를 찾아와 꽃다발을 건내며 ‘전통적인 방법’을 써보자 제안하지만, 매기는 살균한 시험관에 정자를 담아줄 것을 부탁하며 ‘전통적인 방법’을 거절한다.

많은 여성들이 결혼은 부담스럽지만 아이는 하나쯤 낳아 기르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방송인 후지타 사유리(41)씨가 외국에서 정자 기증을 받아 고향 일본에서 아기를 출산한 일이 전해지며 비혼 여성의 선택적 임신과 출산이 한국 사회에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용기있는 선택” 축하와 지지

사유리씨는 지난 16일 자신의 인스타그램 계정에 “11월4일 한 아들의 엄마가 됐다.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한다고 전하고 싶다. 지금까지 자기 자신을 위주로 살아왔던 제가 앞으로 아들 위해서 살겠다”는 글을 올렸다.

사유리씨는 미혼이지만 아이는 기르고 싶었다. 외국의 한 정자은행에서 정자를 기증받아 아이를 출산했다. 그는 같은 날 <한국방송>(KBS)에서 스스로 비혼모가 된 과정을 알리며 당당한 엄마가 되고 싶다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급하게 찾아서 결혼하는 것은 어려웠다. 한국에서는 모든 게 불법이다. 결혼한 사람만 시험관(시술)이 가능하다.”

결혼 밖 출산에 엄격한 사회 분위기와 달리 사유리씨의 선택엔 축하와 지지가 쏟아졌다. 그의 인스타그램엔 2400여개의 축하글이 달렸다. <한국방송> 페이스북에도 지지 의견이 이어졌다.

“쉬운 게 아니었을텐데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생각과 환경이 부럽다”

“나도 저런 생각 많이 했었는데, 결혼은 하기 싫고 아이는 갖고 싶어서 입양도 생각해봤다”

“결혼과 출산을 한 묶음으로 보는 것은 편향적”

“여자분들 중에서 비혼주의자인데 자기 아기는 낳고 싶어하는분들 꽤 있던데 (사유리씨가) 이렇게 실천을. 진짜 멋진거 같은데. 저출생 시대에 꼭 하고 싶던 출산도 하고 자기 주도적 삶 사는 것 멋져보인다”

비혼 출산을 한 여성 연예인에 대한 반응 양상은 비난이 많았던 과거와 크게 달라졌다. 최근 낙태죄 대체입법 논란으로 여성이 임신하거나 임신을 중지할 권리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진 영향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순남 가족구성권연구소 대표는 17일 “사유리씨가 매우 정확하게 이야기했는데, 여성이 임신이나 임신중지 선택의 주체임을 분명히 했다. 이런 관점은 가족을 선택해 구성할 권리, 가족구성권과도 맞닿는다”고 했다. 김 대표는 “사유리씨가 이 사회에 던진 메시지와 그에 대한 응원은 재생산과 가족 구성에 국가가 개입하지 않아야 한다는 요구를 포함하고 있다. 정부는 개인의 이러한 권리가 잘 작동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법률혼 내 출산만 고수하는 한국

사유리씨처럼 결혼은 부담스럽지만 아이는 하나쯤 낳아 기르고 싶다는 한국 여성들이 있다. 결혼·임신·출산·양육은 하나의 ‘종합세트’이기 때문에 결혼을 선택하지 않으면 그 외의 것들도 자연스레 선택할 수 없는 구조다. 법률혼 중심의 전통 가족제도를 고수하는 한국에서 법적 부부가 아닌 커플의 출산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가운데 최저 수준이다. 2018년 오이시디 혼외출산율 통계를 보면, 한국은 2.2%, 일본 2.3%다. 오이시디 평균은 40.7%였다.

국내 생명윤리법 등은 여성이 임신을 위해 정자를 기증받으려면 법적 배우자와 정자 기증 남성의 동의를 필요로 한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이 정자를 기증받는 데 별다른 법 규정이 없던 우리나라는 2005년 말 불거진 ‘황우석 사태’로 생명윤리법을 강화하며, 이후 정자 기증과 난자 채취 등을 법에서 까다롭게 정하고 있다. 반면, 미국과 영국, 스웨덴 등은 비혼 여성에 대한 정자 기증을 허용하고 있다.

“결혼 여부 상관없이 임신·출산 지원해야”

한국에서도 결혼제도 바깥에서 아이를 낳아 기르길 원하는 여성이 늘고 있어 다양한 가족 형태를 법과 제도가 끌어안는 고민이 시작됐다. 법적 부부만 ‘정상’으로 보는 사회에서 비혼모, 동거 커플 등을 가족 형태로 인정하고 출산도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양한 가족 형태를 법적으로 인정하는 내용을 담은 생활동반자법이 19~20대 국회 때 발의되기도 했다.

비혼 상태에서 정자 기증으로 임신과 출산하는 것은 아직 정부 지원을 받기 어렵다. 시험관 시술 등은 난임 부부를 대상으로만 하고 있다. 여성가족부는 지난 16일 ‘미혼모 등 한부모가족 지원 대책’을 발표했지만, 저소득 미혼모 중심의 지원 대책을 담고 있다. 여성가족부 가족정책과는 “사유리씨 같은 경우 (출산 과정이 아니라) 아동을 기준으로 한부모, 미혼모로 같이 묶여 지원하게 된다. 통상 ‘선택적 임신·출산’하는 분들은 어느 정도 경제적 여건이 갖춰져 있는 분들이라 저소득 한부모를 지원하는 정부의 미혼모 지원을 받을 가능성 자체는 별로 없다. 해외에서 자부담으로 출산할 정도가 되면 저소득으로 분류될 가능성은 희박할 것”이라고 했다.

정치권은 사유리씨 출산에 즉각 반응했다. 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은 17일 국회 원내대책회의에서 “사유리씨가 정자 기증으로 분만했다. 자발적 비혼모가 된 것이다. 아이가 자라게 될 대한민국이 더 열린 사회가 되도록 우리 모두 함께 노력해야 한다. 국회가 그렇게 역할을 하겠다”고 했다. 배복주 정의당 부대표는 에스엔에스에 “한국은 제도 안으로 진입한 여성만 임신, 출산에 대한 합법적 지원이 가능하다. 과연 사유리가 한국인이었다면 정치권에서 축하의 말을 했을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사유리씨 역시 <한국방송>과 한 인터뷰에서 임신, 출산, 양육에 관한 여성의 재생산권 전체를 인정하자는 메시지를 전했다. “요즘 낙태를 인정하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것을 거꾸로 생각하면 아기를 낳는 것을 인정해라, 이렇게 하고 싶어요. 낙태만이 아니라 아기를 낳는 것도 인정했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