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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성소수자가 게이에서 논-바이너리로 '커밍아웃'하기까지 성장과정과 긴 여정 (경험담)

한 때 사람은 이성애자, 동성애자, 양성애자로만 나뉜다고 생각했다.

2020년 저자 애디슨 로즈 빈센트
2020년 저자 애디슨 로즈 빈센트 ⓒCourtesy of Addison Rose Vincent

너무 ‘여자 같다는’ 이유로 괴롭힘 당하다

1987년 레즈비언과 게이의 권리를 위한 행진이 미국 워싱턴주에서 열린 이후, 10월 11일은 ‘커밍아웃’ 데이가 됐다. 성소수자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하고 커밍아웃이 전국에서 일어나는 날이다. ‘동성애 혐오와 공포는 침묵 속에서 번성한다는 생각’으로 성소수자의 목소리를 높이는 날이기도 하다.

‘커밍아웃’은 한 성소수자가 자신의 성, 젠더 또는 성적 지향을 다른 사람에게 공개한다는 뜻이다. 전 세계에서 성소수자 청소년은 이성애자보다 5배나 더 높은 자살률을 보였다. 트랜스젠더 성인 중 40%가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으며 미국 내에서도 성소수자들이 싸워 어렵게 얻어낸 권리를 빼앗으려는 시도가 꾸준히 진행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전히 성소수자의 커밍아웃은 극단적이고 절박한 선택이다.

난 2~3살 때부터 집에서 엄마의 하이힐과 아빠의 나시를 입고 다녔다. 당시 그 옷이 나한테 너무 길어서 내가 입으면 드레스처럼 보였거든. 난 소위 ‘여성스러운’ 제품에 끌렸고 자주 엄마의 스카프를 매는 걸 도우며 엄마의 액세서리를 갖고 놀았다. 엄마는 액세서리 판매하는 일을 했는데 나도 옆에서 모델로 여러가지 샘플을 착용해보곤 했다.

나는 내게 아무 이상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두어 살 더 먹었을 때, 부모님은 내가 ‘여성스러운’ 표현을 쓰거나 ‘여성스럽게’ 행동하는 걸 반대했다. 5살 때, 난 아직 젠더라는 개념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다른 이들의 눈에 내가 좀 유별나 보인다는 사실은 깨달았다. 난 ‘여성스럽다‘는 이유로, 너무 부드럽다거나 너무 ‘게이 같다’는 이유로 자주 괴롭힘을 당했다. 

1993년 당시 저자의 모습
1993년 당시 저자의 모습 ⓒCourtesy of Addison Rose Vincent

사람은 이성애자, 동성애자, 양성애자로만 나뉜다고 생각했다.

우리 가족은 내가 어렸을 때 미국과 캐나다 사이를 자주 오갔고, 친구를 사귀는 게 항상 어려웠다. 감사하게도 우리 가족은 부자였다. 나는 여러 교육을 받고 과외 활동에 참여할 기회가 많았다. 8살 때는 야구팀, 축구팀, 하키팀, 미식축구팀에 참여했다. 난 괴롭힘을 당한 분노를 이런 활동을 통해 풀었다. 난 경쟁심이 강했고 승리할 때마다 괴롭힘 당한 경험의 등가교환이라고 생각했다. 

야구팀에서 아담이라는 소년과 친한 친구가 됐다. 우리는 서로의 집에서 놀고, 포켓몬 카드 거래하는 걸 좋아했고, 가족 사이도 가까워졌다. 어느 날, 그와 나는 우리 집 수영장에서 수영 중이었다. 당시 우리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물밑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우리 몸을 조금씩 서로에게 드러내는 게임을 하는 중이었다.

그 순간 난 깨달았다. 다른 사람이 내게 말했던 이야기는 다 사실이었다. 정말 무서웠지만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깨달아버렸다. 정말 내가 원하지 않았던 진실이었다.

좀 더 나이가 들어가면서 나는 내 성정체성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 난 젠더에 관해 잘 몰랐다. 사람은 이성애자, 동성애자, 양성애자로만 나뉜다고 생각했다. 난 내가 다른 남자아이들에게 끌린다는 걸 알았지만 난 그 감정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고 했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 이 사실을 공유하지도 않았다. 중학교 때 난 미시간주의 남학교에 진학했다. 여기서 난 지속해서 다른 학생들에게 성추행을 당하고 공격받았다. 심지어 체육 선생님은 이런 상황을 보고도 무관심했다.

부모님과 내 여형제는 날 사랑하고 다 이해해주었지만 난 내 성정체성을 비밀로 숨겼다. 그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 무서웠고 유일하게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집마저도 학교처럼 무서운 곳이 될까 봐 두려웠다.

14살이 됐을 때 난 다른 남자들과 성경험을 시작했다. 하지만 항상 부끄럽고 죄책감을 느꼈다. 난 성적 지향을 숨겼고 항상 다른 사람이 내 비밀을 밝히거나 그걸 이용할까봐 걱정했다.

2007년 당시 저자의 모습
2007년 당시 저자의 모습 ⓒCourtesy of Addison Rose Vincent

첫 커밍아웃

2009년 여름, 나는 곧 17살이었고 숨는 데 지쳐 있었다. 고등학교 3학년 무렵이었고, 미시간주에 더 오래 머물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해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집중해서 공부하는 한 영어 수업에 등록했는데, 게이라는 소문이 돌던 교사가 그 수업을 맡았다. 그와 우리 가족은 같은 교회에서 자원봉사를 했기 때문에 이미 서로 알고 있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로미오와 줄리엣’을 읽으며 나는 이 두 등장인물이 사랑에 빠지고 그들의 가족과 세상으로부터 이 사실을 숨겨야 한다는 사실에 감정 이입해 울었다. 그들은 기꺼이 도망치고, 죽음을 속이고, 사랑을 위해 죽음을 택했다. 난 그들에게서 내 모습을 보았고 나도 그들과 같은 운명을 맞이하지 않겠냐고 생각했다. 선생님은 내가 수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고 진행 상황을 확인하게 일주일에 한 번 방과 후 남아 달라고 내게 부탁했다.

어느 방과 후 시간, 나는 엉엉 울면서 선생님에게 ‘게이‘라고 고백했다. 그 말을 꺼내기 너무 힘들었지만, 꺼낸 이후에는 안도감을 느꼈다. 마침내 믿을 수 있는 누군가에게 이 말을 하는 순간이었다! 이상한 운명의 반전 속에서, 같은 날 오후 나는 그의 교실 책장 뒤에 일부 숨겨진 포스터를 발견했다. 거기에 “10월 11일 - ‘전국 커밍아웃 데이!’라고 쓰여 있었다. 달력을 확인했다. 2009년 10월 11일이었다. 나는 그를 바라보았고 우리 둘 다 미소를 지었다.

2020년 저자의 모습
2020년 저자의 모습 ⓒCourtesy of Addison Rose Vincent

‘응! 나 게이야’

다음 여름이 오기까지 여전히 영어 선생님 외에는 누구에게도 커밍아웃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친한 친구 두 명은 이미 눈치채고 내가 먼저 말해주길 바라고 있었다. 졸업 한 달 후, 우리는 뒷마당에 누워 대학 계획을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친구들이 내가 언제 커밍아웃할 건지 물었다. 

나는 충격을 받아 대답을 망설였다. 사실을 말하면 친구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확신하지 못해 주저했지만 그들은 계속 날 압박했다. 화가 났다. 동성애를 혐오하는 세상에서 강제로 커밍아웃 당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걸 계기로 더 많은 사람에게 사실을 알리고, 내가 정말 누구인지 좀 더 공개해야 할 때라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비록 미시간주에서 커밍아웃하는 건 여전히 안전하다고 느끼지 않았지만.

나는 성소수자에게 열린 생각을 하는 진보 성향의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여러 대학에 지원했다. 그래야 내가 게이로 살아가는 게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다. 결국 오렌지카운티의 챕맨 대학교에 진학했다. 오리엔테이션 첫날, 기숙사에 들어가면서 처음 만난 어떤 여학생들이 내게 ‘너 게이니?’라고 대놓고 물어봤다. 

인생 처음으로 난 그 대답에 당당히 답할 수 있었다. ‘응! 나 게이야.’ 그렇게 새로운 학기, 새로운 인생이 시작됐다. 

2019년 결혼식: 저자의 어머니(오른쪽), 남편 이든의 어머니(왼쪽), 저자 옆 남편 이든
2019년 결혼식: 저자의 어머니(오른쪽), 남편 이든의 어머니(왼쪽), 저자 옆 남편 이든 ⓒCourtesy of Addison Rose Vincent

오리엔테이션 도중 그 여자들에게 커밍아웃한 후, 만나는 사람 대부분에게 커밍아웃했다. 마침내 내가 진짜 누구인지 공개할 수 있어 너무 기뻤지만, 여전히 엄마 아빠나 고향 친구들에게는 커밍아웃하지 않았다. 

어느 주말 부모님이 대학교에 방문하기로 했을 때 나는 커밍아웃을 결심했다. 부모님이 오기 몇 주 전부터 긴장했다. 미리 친구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지원을 요청했다. 가족한테 버림받을 각오도 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딱 한 가지는 확실했다: 두 번 다시 미시간주로는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논-바이너리가 뭐야?’

부모님에게 학교를 안내하고 식사를 하고 새 친구들을 소개했다. 부모님이 떠나기 전날 밤 비밀을 고백할 용기를 냈다. 아빠한테 전화해 정말 급히 말할 일이 있다고 전하고 부모님이 머무는 호텔로 달려갔다. 부모님은 그런 나를 매우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는 ‘나 게이에요’라는 말이 도저히 나오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눈물만 흘렸다. 

부모님은 그냥 그런 나를 이해했다. ”우리 이미 알고 있었어”라고 말하며 ”우린 널 사랑해”라고 아빠가 말했다. 부모님은 날 안아주며 위로해 주며 앞으로는 뭐든 말해달라고 말했다. 부모님에게 내 성정체성을 고백한 후 훨씬 마음이 편했고 그들은 그 이후에도 항상 날 지지해줬다.

난 일년 후 해외에서 공부를 하며 ‘드래그’ 문화와 성정체성에 관해 자세히 배웠다. 트랜스젠더와 논-바이너리(여성이나 남성이라는 성별에 제한되지 않는 또 다른 성별)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됐다. 난 가족에게 이 사실을 전하며 사실 난 논-바이너리였다고 알렸다. 그 사실에도 가족은 날 지지했다. 

2013년 난 ‘트랜스페미닌 논-바이너리’로 커밍아웃했다. 가족과 친구들은 이런 날 이해해주었고 이미 여러 번 논의한 주제였다. 

저자와 그의 남편 이든의 모습
저자와 그의 남편 이든의 모습 ⓒCourtesy of Addison Rose Vincent

비록 몇몇 친척과 어린 시절 친구들은 성정체성을 이유로 나를 거부했지만, 많은 가족과 친구들이 날 지지하고 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줬다. 나는 항상 그대로였지만 어떻게 표현할지 몰랐을 뿐이다! 지금 내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는 정말 행복하다. 

나는 내 가장 친한 친구인 이든과 결혼했고 우리 가족도 지지해 주었다. 어린 시절 내 정체성을 숨기기에만 급급하던 아이였던 당시에는 상상도 못한 일이다. 또 내가 커밍아웃한 이후 많은 친구가 커밍아웃했다. 내가 SNS에 올린 글이나 영상을 보고 커밍아웃을 결심했다는 사람도 만났다.

 

준비된 커밍아웃을 응원하며

처음 영어 선생님에게 커밍아웃했을 때도, 부모님에게 커밍아웃 했을 때도 내 성정체성을 알리는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커밍아웃은 단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난 너무 오랜 시간을 내 진짜 모습을 숨기거나 도망가며 살았다. 아직도 그로 인한 아픔이 남아 있으며 나아지려고 노력 중이다. 절대 쉽지는 않지만, 가치 있는 일이다. 나 자신을 알고, 내 남편과 친구들에게 더 진솔하게 다가갈 수 있게 됐다. 

내 이야기가 커밍아웃을 망설이는 다른 이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아직 망설인다면 충분한 준비가 됐을 때 커밍아웃하면 된다. 다른 이의 말에 휘둘리지 않길. 그들이 당신을 얼마나 잘 알든, 얼마나 사랑하든, 결국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그리고 절대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생각보다 더 많은 사람이 당신을 지지한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당신은 완벽하며 당신의 인생은 가치가 있다.

당신이 지금 어떤 위치에 있든, 그 여정을 응원하고 축복한다.

 

저자 애디슨 로즈 빈센트는 28세 교육자이자 성소수자 옹호자, 로스앤젤레스주의 성소수자 커뮤니티 주최자다. 애디슨은 현재 성소수자 컨설팅 회사인 ‘브레이크더바이너리LLC(Break The Binary LLC)의 설립자 및 대표 컨설턴트, 로스앤젤레스 논-바이너리 유니언의 설립자, 캘리포니아주 재단의 ‘리이매진랩(Reimagine Lab)’ 논-바이너리 & 인터섹스 인식 프로젝트의 전무 등 여러 직책을 맡고 있다. 그는 남편 이던과 강아지 스티비와 함께 살고 있으며, 동네 도자기 스튜디오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걸 좋아한다. 

 

 

*허프포스트 미국판에 실린 독자 기고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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