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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스카(NASCAR)가 남부연합기를 퇴출한다. 매우 의미심장한 사건이다.

'블랙 라이브스 매터' 시위가 인종차별의 상징들을 곳곳에서 몰아내고 있다.

  • 허완
  • 입력 2020.06.11 14:35
(자료사진) 나스카(NASCAR)가 앞으로 경기장 안팎에서 남부연합기를 퇴출시키겠다고 밝혔다. 
(자료사진) 나스카(NASCAR)가 앞으로 경기장 안팎에서 남부연합기를 퇴출시키겠다고 밝혔다.  ⓒASSOCIATED PRESS

미국을 대표하는 자동차 경주대회 나스카(NASCAR)가 10일(현지시각) 남부연합(Confederate States)을 상징하는 깃발을 경기장 안팎에서 금지한다고 밝혔다.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으로 미국의 구조적인 인종차별과 백인 우월주의 문화에 대한 자각과 자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나온 조치다.

1920년대 미국에서 유래한 나스카는 이른바 ‘가장 미국적인 스포츠’ 중 하나로 꼽히고는 했다. 경주차들의 외양이나 트랙의 구조, 레이스 전개 방식 등이 ‘미국적으로’ 독특한 데다가 남부의 백인 남성을 전형적인 팬층으로 두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의 마초적 이미지와 통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블랙 라이브스 매터’ 시위가 들끓고 있는 지금, 나스카도 이제는 변해야 할 때임을 인지한 것으로 보인다.

(자료사진) 나스카의 전형적인 팬층은 '남부 백인 남성'으로 요약할 수 있다. 나스카 팬의 90% 가량이 백인이라는 집계도 있다.
(자료사진) 나스카의 전형적인 팬층은 '남부 백인 남성'으로 요약할 수 있다. 나스카 팬의 90% 가량이 백인이라는 집계도 있다. ⓒIcon Sportswire via Getty Images

 

″나스카 이벤트들에서 남부연합기의 존재는 (인종, 성별, 연령, 이념, 종교 등을 불문하고) 모든 팬과 참가자들, 업계가 즐길 수 있도록 따뜻하고 포용적인 환경을 제공하겠다는 우리의 약속과 배치된다.” 나스카가 공식 입장문에서 밝혔다.

″우리의 팬들과 스포츠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레이싱에 대한 열정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 그것이 만들어내는 커뮤니티다. 남부연합기를 내보이는 것은 모든 나스카 이벤트와 시설들에서 금지될 것이다.” 

남부연합기는 노예제 폐지에 저항하며 미합중국을 탈퇴해 남북전쟁(1861-1865년)을 일으켰던 남부 11개주들의 국가 ‘아메리카 연합국’의 육군이 사용했던 깃발이다.

최근 몇 년 사이 흑인을 겨냥한 총기 난사 등 잔혹한 혐오범죄를 저지른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이 깃발을 자랑스레 기념한 사례가 잇따르면서 남부연합기는 인종차별의 상징으로 전락했다.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 이후 미국 전역으로 번진 ‘블랙 라이브스 매터’ 시위대는 남부연합 기념물들을 겨냥해왔다. 이에 따라 길게는 100년 넘도록 자리를 지켜왔던 남부연합 기념물들은 하나 둘씩 철거되는 중이다. 해병대해군은 남부연합기를 내거는 행위를 금지하겠다고 밝혔다.

나스카에서는 유일한 현역 흑인 드라이버인 부바 월러스(가운데)가 '숨을 쉴 수가 없다'는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입은 채 시리즈 개막에 앞서 진행된 국가 연주 행사에 임하고 있다. 애틀랜타 모터스피드웨이. 햄튼, 조지아주. 2020년 6월7일.
나스카에서는 유일한 현역 흑인 드라이버인 부바 월러스(가운데)가 '숨을 쉴 수가 없다'는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입은 채 시리즈 개막에 앞서 진행된 국가 연주 행사에 임하고 있다. 애틀랜타 모터스피드웨이. 햄튼, 조지아주. 2020년 6월7일. ⓒChris Graythen via Getty Images

 

나스카의 이번 발표는 현역으로서는 유일한 흑인 드라이버인 부바 월러스가 남부연합기 금지를 공개적으로 촉구한 지 이틀 만에 나왔다.

월러스는 백인 드라이버 일색인 나스카에서 흑인 드라이버로서는 역대 두 번째이자 50년 만에 내셔널시리즈 우승을 차지(2013년)했던 인물이다. 나스카 전체 역사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적은 흑인 드라이버 중에서 가장 뛰어난 성적을 거두고 있기도 하다.

″나스카 레이스를 보러 오는 그 누구도 불편함을 느껴서는 안 된다. 남부연합기들부터가 문제다.” 월러스가 앞서 CNN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이곳에서 쫓아내버리자.”

그는 최근 벌어지고 있는 시위에 지지를 표하는 뜻에서 전날 자신의 경주차를 검은색으로 칠했고, ‘블랙 라이브스 매터’ 데칼을 부착했다. 엔진 후드에는 백인과 흑인이 손을 맞잡고 있는 그림과 함께 ”연민, 사랑, 이해심”이라는 문구를 집어넣었다.

부바 월러스는 인종차별 반대 시위에 대한 지지와 연대의 뜻으로 자신의 경주차를 검정색으로 새로 도색했고, '블랙 라이브스 매터' 데칼을 입혔다. 2020년 6월10일.
부바 월러스는 인종차별 반대 시위에 대한 지지와 연대의 뜻으로 자신의 경주차를 검정색으로 새로 도색했고, '블랙 라이브스 매터' 데칼을 입혔다. 2020년 6월10일. ⓒRob Carr via Getty Images

 

자료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나스카 팬들 중 백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많게는 94%로 집계될 만큼 압도적이다. 또 나스카는 미국 남부 지역에서 가장 인기가 높고, 중산층 남성이 팬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월 이번 시즌 개막전에 등장해 10만여 관중의 환호를 받기도 했다.

미국의 다른 메이저 스포츠에 비하면 다소 늦은 편이기는 하지만, 사실 나스카는 2000년대 초반부터 다양성 확보 캠페인(‘Drive for Diversity)’을 벌여왔다. 오랫동안 소외됐던 소수인종과 여성 등에게 문을 넓혀 미국 국내와 해외의 팬베이스를 넓히기 위해서다. (이 프로그램이 낳은 인물 중 하나가 바로 부바 월러스다.)

나스카 측은 이미 지난 2015년에 팬들에게 남부연합기를 경기장에 들고오지 말아달라고 요청한 바 있다. 찰스턴 흑인교회에서 총기를 난사해 9명을 살해한 백인 우월주의자가 남부연합기를 들고 찍은 사진들이 공개돼 논란이 커진 뒤의 일이다.

(자료사진) 나스카 팬들이 남부연합기 등으로 장식된 버스 위에서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모습. 2015년 8월2일.
(자료사진) 나스카 팬들이 남부연합기 등으로 장식된 버스 위에서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모습. 2015년 8월2일. ⓒASSOCIATED PRESS

 

그럼에도 나스카 경기장 안팎에서 남부연합 깃발이나 장식은 어렵지 않게 목격됐다. 2017년 USA투데이 기사를 보면, 남부 지역 사람들에게 남부연합기는 (그들의 말에 따르면) 그냥 내다버릴 수 있는 그런 물건이 아니다. 

″나는 지금도 내 깃발을 흔들고 있다.” (테네시주) 채터누가에서 온 팬 브라이언 엘리스씨는 자신의 남부연합기에 대해 USA투데이스포츠에 말했다. ”이건 내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내 조상들이 이 깃발 아래서 싸웠기 때문에 이건 내 헤리티지의 일부분이다. 대통령이든 누구든 뭘 어떻게 한다고 해서 그게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중략)

″이 깃발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다른 의미로 다가갈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테네시주 프랭클린에서 왔다는 (드라이버) 클린트 보이어의 팬 낸시 컬러스씨가 USA투데이스포츠에 말했다. 그는 남부연합 두건을 쓴 채 경기장 근처에서 자신의 RV차량을 청소하고 있었다. 

″그런 (백인 우월주의) 단체들이 이 깃발을 사용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고, 나는 그들 중 어떤 단체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가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깃발을 사랑하는 우리 남부 사람들에게서 이걸 빼앗아갈 수는 없다. 내게 이건 그저 우리 같은 남부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물건이다.”

엘리스씨와 컬러스씨 모두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를 찍었다고 말했다. 두 사람 모두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일으킨) 샬러츠빌 사태의 책임을 트럼프에게 물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USA투데이 2017년 8월19일)

(자료사진) '너의 뿌리를 잊지 말라' - 남부연합 재향군인 단체가 달링턴 레이스웨이 경기장 위에 띄운 문구. 달링턴, 사우스캐롤라이나주. 2007년 5월12일.
(자료사진) '너의 뿌리를 잊지 말라' - 남부연합 재향군인 단체가 달링턴 레이스웨이 경기장 위에 띄운 문구. 달링턴, 사우스캐롤라이나주. 2007년 5월12일. ⓒASSOCIATED PRESS

 

뉴욕타임스(NYT)는 이번에 나스카가 발표한 남부연합기 금지 조치가 스티커나 티셔츠 등을 빼고 단순히 깃발에만 해당되는 것인지, 또 주차장 같은 경기장 바깥 공간에서도 적용되는 것인지 등은 아직 분명하지 않다고 전했다.

남부연합기 금지 조치를 알리는 나스카의 공식 트윗에는 분노한 일부 이용자들의 댓글이 달렸다.

″이건 최후의 결정타다. 난 70년대부터 나스카를 봤다.” 성조기 이모티콘 세 개를 나란히 프로필에 적어놓은 한 이용자가 적었다. ”모든 목숨은 소중하다. 정치에서 손을 떼라. 당신들은 팬을 잃었다.”

″나도 이쯤에서 입장을 정해야할 것 같다. 또 다른 이용자가 적었다. ”‘정치적 올바름’을 취하는 게 항상 최선인 건 아니다.”

″잘 되기를 바란다. 나는 레이스 때마다 내 깃발을 들고 갈 거다.” 이용자 ‘테네시 패트리엇(테네시의 애국자)’의 트윗이다.

아마도 가장 노골적인 반응이었을 트윗은 ‘레드 스테이트 패트리엇(공화당 주의 애국자)’이라는 이용자에게서 나왔다.

″화풀이 좀 해야겠다.” 트윗은 이렇게 운을 뗐다. ”이제는 모든 사람을, 심지어 여성들까지도 동등하게 대해야 하고 그 누구의 심기도 거슬러서는 안 된다니.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기대하면서 트럼프를 찍었다. 정말 화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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