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나의 해방일지: 어설프게 조언하지 말고, 값싸게 위로하지 말고, 그저 "추앙"하라

윤석진의 캐릭터로 보는 세상

이웃집  구씨, 염미정 
이웃집  구씨, 염미정  ⓒJTBC

내가 좋아하는 만큼 상대방도 그랬으면 좋으련만, 안타깝게도 감정의 크기가 일치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상대방을 좋아하는 나의 마음이 강할수록 안절부절못하면서 사랑을 갈구하는 약자가 되기 쉽다. 그러다 문득 “내가 왜?”라고 억울해하면서 계산기를 두드릴 때가 있다. 영원하기를 바랐던 사랑에 금이 가는 순간이다. 감정의 기울기 때문에 상처받고 힘들어하다가 지치면 다시는 사랑하지 않으리라 다짐하지만, 그것도 쉽지만은 않다. 사랑은 삶의 원동력이자 자존감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해방일지>(제이티비시)의 염미정(김지원)은 “사랑으론 안 돼, 추앙해요”라고 요구한다.

삼남매의 막내 염미정은 “이사 나가는 사람은 있어도 들어오는 사람은 없는” 경기도 끝자락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면서 자존감 없는 일상을 살고 있다. 복지 차원에서 지원한다는 사내 동아리 활동에도 관심이 없다. 전철역을 오가는 마을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출퇴근길을 서둘러야 하는 것도 있지만, 뭘 더 배우고 싶은 생각이 없다. 종종 막차가 끊긴 시간 함께 택시를 이용하는 언니와 오빠는 노른자위 서울을 둘러싼 계란 흰자위 같은 경기도 끝자락에서 탈출하고 싶어 하지만, 그는 그것도 별로 관심이 없다. 서울과 경기도를 연결하는 광역전철 노선처럼 변화 없는 일상에 몸을 맡기고 하루하루를 살아낼 뿐이다.

염미정 
염미정  ⓒJTBC

어릴 때 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모든 일에 재미를 느낄 정도로 활달하고 야무졌다. 성인이 된 지금도 청약통장과 적금통장을 갖고 있을 정도로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부모의 시선에서 바라본 모습일 뿐이다. 그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겠는데, 그냥 지쳤어요. 모든 관계가 노동이에요. 눈 뜨고 있는 모든 시간이 노동”이라는 상념에 사로잡혀 있다. 직장 동료들 앞에서는 웃음을 잃지 않지만, 그의 속내는 사람에 대한 실망과 앙금에서 비롯한 환멸로 가득 차 있다. “자신의 사랑스러움을 발견하고자 달려들었다가 자신의 볼품없음만 확인하고 돌아서는 반복적인 관계”가 그를 힘들게 하고 지치게 했다.

부모의 생각과 달리, 염미정은 어려서부터 자존감을 느껴본 적이 없다. 그래도 “왜 살아야 하는지,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지만, 사는 동안 단정하게 가” 보겠다는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며 살았다. 도와달라는 선배의 부탁에 신용대출을 받아 거금을 빌려주기도 했다. 하지만 선배는 그를 “돈 빌려 가고도 적반하장으로 지랄 떨면 찍소리 못 하고 찌그러질” 만만한 존재로 여겼다. 결국 그는 돈 못 받는 것보다 자기 자신까지 밑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청약통장과 적금통장을 해약해서 대출금과 연체 이자를 갚았다 .

염미정 
염미정  ⓒJTBC

“나는 큰 사람이다. 사랑을 갈구하지 않는다”라는 주문을 수시로 읊조리는 염미정에게 필요한 것은 어설픈 조언이나 위로가 아니다. 오직 추앙이다. 그래야 한번도 채워져 본 적 없는 그의 허전한 내면이 채워질 수 있다. “난 한번은 채워지고 싶어.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라는 그의 갈구에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이웃집 구씨(손석구)가 응답한다. 집에서 한참 떨어진 전철역까지의 동행으로 고단한 출퇴근길에 활기를 넣어주는 구씨의 추앙에 표정 없던 그의 얼굴에 생기가 돈다. 서울로 들어가기 직전 그를 기분 좋게 만드는, “오늘은 당신에게 좋은 일이 생길 겁니다”라는 간판 문구가 비로소 현실이 된 것 같다. 염미정은 이제 “늘 혼자라는 느낌에, 버려진 느낌에 시달리”지 않는다.

술을 마시지 않으면 하루를 견디지 못하던 구씨 또한 염미정의 추앙으로 채워지면서 달라진다. 추앙이 사랑보다 강력한 응원임을 보여주려는 것 같다. 하지만 염미정과 구씨의 서로에 대한 추앙이 그들의 인생 내내 응원이 될지 알 수 없다. 높이 받들어 우러러볼수록 감정의 기울기가 달라지면서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기 때문이다. 어쩌면 염미정이 꿈꾸고 구씨가 동참한 해방은 결코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에 갇힌 건지 모르겠지만, 뚫고 나가고 싶어요. 진짜로 행복해서 진짜로 좋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아, 이게 인생이지, 이게 사는 거지, 그런 말을 해보고 싶어” 해방을 꿈꾸는 그들을 응원한다.

구씨, 염미정 
구씨, 염미정  ⓒJTBC

모든 인간은 소중하고 행복할 권리가 있다. 별 볼 일 없고 하찮은, 그래서 갱생이 필요한 인간은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바라보는 시선만이 있을 뿐이다. 인간을 갱생시키겠다는 오만한 의도를 숨기지 않는 어설픈 조언 따위는 하지 말자. 한번뿐인 인생을 소중하게 살기 위해 사랑하되, 만약 그 사랑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주어도 행복하지 않다면, 염미정처럼 추앙을 요구하자. 인간을 존중하지 않으면서 건네는, 어설픈 조언과 값싼 위로에 현혹되지 말고 당당하게 추앙하라 말하자.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추앙하라. 그래야 세상의 통념과 주변 사람의 시선에 갇힌 삶에서 해방될 수 있으리라.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대중문화평론가 

저작권자 © 허프포스트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관 검색어 클릭하면 연관된 모든 기사를 볼 수 있습니다

#연예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