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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해방일지' 삼남매 엄마, 배우 이경성은 경력 36년차 베테랑이지만 드라마는 이번이 처음이다(인터뷰)

낯선 배우에서 다시 보고 싶은 배우로.

'나의 해방일지' 스틸컷.
'나의 해방일지' 스틸컷. ⓒJTBC

서울살이를 갈망하던 삼남매는 어머니를 보내고서야 지긋지긋한 산포시를 떠난다. 그들의 아버지는 사별하고 중풍에 걸리고서 싱크대 만드는 일에서 손을 놨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제이티비시) 속 인물들은 종영을 앞두고 제목처럼 모두 해방됐다. 곱씹어 보면, 그 해방은 엄마한테서 비롯됐다. 엄마가 사망하면서 삼남매는 서울에서 살 수 있었고, 아버지는 공장 일을 그만둘 수 있었다. 엄마 역시 죽어서야 “땡볕에서 밭일하다가도 집에 들어와서 밥을 차려야 하는 팔자”에서 해방됐다.

“엄마의 죽음이 모두 해방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 것 같아요. 존재감 없이 살아온 한 사람이 사라짐으로써 큰 존재감을 발휘하게 된 것이 놀라워요.” 지난 26일 전화로 만난 삼남매의 엄마 곽혜숙, 배우 이경성(58)이 말했다.

존재감 없던 사람이 엄청난 존재감을 발휘하는 것. 이경성도 우리에게 보여줬다. <나의 해방일지>가 시작했을 때 그는 천호진, 김지원, 이민기, 이엘, 손석구까지, 알려진 얼굴 틈에서 낯설게 등장했다. 종일 밭일하고, 공장 일 하고, 삼시세끼 밥하고, 구씨 밥 챙겨주고, 있는 듯 없는 듯 같은 일을 반복했다. 그랬던 이경성은 ‘염가’네 식사 자리에서 중심을 잡아주던 엄마처럼, 어느 순간 등장할 때마다 시청자들을 집중시켰다. “저 배우 누구야?” “포털에 프로필이 없다” 등 곽혜숙의 ‘본체’를 궁금해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나의 해방일지' 곽혜숙을 연기한 이경성.
'나의 해방일지' 곽혜숙을 연기한 이경성. ⓒJTBC

볼수록 뇌리에 박혀 떠나지 않는 존재감이 컸다. 외적 표현과 내적 감정을 ‘연기하지 않고 표현’한다. 섬세한 행동과 표정의 일그러짐만으로 말 없는 남편, 사고만 치는 자식 때문에 속 터지는, 그러면서 안쓰럽고, 당연히 사랑하는 마음을 드러냈다. 얼굴에 기미도 그려 넣고 주름에 흰머리까지, 최대한 드라마에 녹아들었다. “엄마는 관절 수술을 해 무릎이 잘 안 굽혀져요. 그 부분에서 사실감을 살리려고 했어요. 실제로 어머니가 관절 수술을 한 분한테 물었더니, 걸을 때는 잘 모르는데 앉을 때 다리가 불편하다고 해요. 뭔가를 짚고 앉고 일어서고.”

엄마의 감정도 디테일하게 내보이며 많은 이들의 공감을 샀다. “매일 해야 하는 노동도 고되고 그 나이 정도면 살림에서 손 떼고 싶은데, 그 집은 손을 뗄 수 없는 상황이잖아요. 그러다 보니 웃을 일이 없고 늘 인상 쓰고 살고, 그러니 말 한마디도 다정하게 안 나가게 되죠. 정신적 여유가 안 생기죠. 저도 두 아이의 엄마니까 공감이 가죠. 보는 이들이 최대한 이해할 수 있게 표현하려고 했어요.”

그는 “‘동네에 사는 아줌마를 데려온 것 같다’라는 소리가 가장 듣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경성은 역할 특성상 내내 한곳에서 촬영했다. 비슷한 옷만 입고 밭일이나 집안일을 하고 트럭을 타고 오가는 촬영을 반복했다. “잘 차려입을 필요도 없고 외모를 신경 쓸 일도 없어서 편했다”지만 “촬영 내내 ‘우리 식구들’(구씨 포함)밖에 못 만난 건 아쉽”기도 했다. 13회에서 기정의 남자친구를 만난 게 그가 이 드라마 시작 후 제대로 만난 ‘외부인’이다.

삼남매 엄마, 곽혜숙의 뒷모습.
삼남매 엄마, 곽혜숙의 뒷모습. ⓒJTBC

그 외부인을 만나 처음으로 활짝 웃은 날, 엄마는 공교롭게도 미정의 아픈 마음을 알게 되어 자신을 자책하며 흐느껴 울었다. 13회에서 골목길을 걷다가 우는 엄마의 뒷모습은 이 드라마의 명장면으로 꼽힌다. 연출도 좋았고, 뒷모습만으로 북받치는 감정을 표현한 이경성의 연기도 좋았다. “캐릭터에 빠져서 그때 어떤 느낌으로 연기했는지 기억나지 않아요. 방송으로 보니 그 장면이 담백하게 담겨서 눈물이 나진 않았어요. 전 오히려 14회 때 눈물이 났어요. 엄마가 떠난 뒤 남겨진 가족들을 보니, 그 모습이 너무 슬프더라고요.” 엄마 곽혜숙의 마음이자 시청자 이경성의 마음이다.

드라마에서 좀처럼 볼 수 없었던 활짝 웃는 곽혜숙.
드라마에서 좀처럼 볼 수 없었던 활짝 웃는 곽혜숙. ⓒJTBC

배우 경력 36년차인데 드라마는 <나의 해방일지>가 데뷔작이다. 영화는 두편 했지만, 연극 무대에 쭉 올랐다. “지난해 <구멍>이라는 연극을 했는데 그걸 보고 캐스팅 디렉터한테 연락이 왔어요. 그리고 <나의 해방일지>에 출연하게 됐죠. 그간 매체 연기와 인연이 잘 안 닿았는데 이렇게 좋은 작품을 만나려고 그랬나 봐요.” 그는 <눈이 부시게>의 감독이 연출하고 <나의 아저씨>의 작가가 집필한다는 소리에 무조건 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드라마는 ‘신인’이지만, 연극판에서는 알아주는 연기파 배우다. 그는 동국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1986년 극단 광장의 작품 <어두워질 때까지>로 데뷔했다. 1987년 국립극단 단원으로 8년 정도 활동했다. 결혼하고 아이 낳고 1~2년 쉬다가 대학로에서 지금까지 수많은 작품에 출연하고 있다. 현재는 창작공동체 아르케 소속이다.

연기는 고등학교 때 연극반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처음 접했다. 고등학교 연극반이 동랑청소년연극제에서 3년 내내 대상을 받았고, 그러면서 연기의 재미를 느꼈다. 연극반 선생님이 연극영화과를 권했고, 대학에 가서 연극배우의 길을 생각하게 됐다. 하지만 “드라마 쪽은 전혀 생각 안 했다”고 한다. “너무 예쁜 애들이 많은 거예요. 그때는 예뻐야만 방송 하는 시절이었으니까요. 지금처럼 개성 있는 배우를 찾아서 할 때가 아니어서.” 한석규, 나종미 등이 대학 동기다.

배우 이경성.
배우 이경성. ⓒ창작공동체 아르케 제공

그는 인터뷰 내내 “저는 연기를 재능이 있어서가 아니라 운이 좋아서 하게 됐다. 연극반 동아리도 친구 따라서 간 거였고 하다 보니 재미있었고 그래서 했으니 무조건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경성은 자신의 가치를 낮추는 것에서 해방되어야 할 것 같다고 말하니, 그가 답했다. “전 이미 해방되어 즐겁게 잘 살고 있어요.” “1년에 연극 두편 하고 친구들과 여행 가고 더는 바랄 게 없는 삶”이란다.

덧붙이는 이야기를 들으니 물음표가 사라진다. “10년 전부터 연극배우들이 모여서 합창단을 하고 있어요. 얼마 전에 <뜨거운 씽어즈>에 나갔어요. 또 춤추는 걸 좋아해서 지난 4월에 연극배우들과 같이 댄스팀을 만들었어요. 최근에는 차차차를 배우고 있어요. 4~5년 전부터는 사투리 연구 모임도 하고 있어요. 예전에는 사투리로 연기하면 안 됐는데 요즘은 사투리가 특기가 되는 시대잖아요. 배우들은 기본적으로 늘 훈련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전 늘 뭔가를 해야 힘이 나요.(웃음)”

곽혜숙과 다른 해방된 이경성을 보고 싶다면 다음달인 6월24일부터 7월10일까지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오르는 연극 <툇마루가 있는 집>(예매 인터파크티켓 1544-1555, 공연 문의 070-7869-2089)으로 들어가보자. 남자 주인공이 옛날에 살던 집이 허물어지기 전에 찾아가 옛날을 회상하는 이야기다. 이경성은 남자의 엄마와 아내 1인2역을 맡는다. “<해방일지> 엄마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어요. 우리 엄마들이 대부분 억척스럽게 가정을 꾸리셨으니까요.”

<나의 해방일지>는 ‘구씨 열풍’과 함께 이경성이라는 좋은 배우를 발견했다. 이 배우를 <나의 해방일지>에만 기록해둘 수는 없지 않은가. 이경성이 곽혜숙에게서 해방되어 더 다양한 작품에서 만날 수 있기를.

한겨레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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