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2022년 04월 29일 17시 19분 KST | 업데이트됨 2022년 04월 29일 18시 22분 KST

그 많던 소녀들은 어디로 갔는가: '페미사이드 국가' 멕시코의 거리에 나선 여성들

18세 소녀 데바니 에스코바르의 실종과 사망, 그리고 더 이상 잃을 수 없는 여성들.

게티 이미지/ 로이터
데바니 오스코바르의 모친/거리로 나선 멕시코 여성들.

″여자들이 나를 무시해서.” 

2016년 5월, 피의자 김성민은 강남역 한 상가의 화장실에서 일면식도 없는 여성을 흉기로 찔러 숨지게 한 후 이렇게 말했다. 김성민의 한마디는 대중들이 여성 혐오 범죄와 페미사이드에 대해 자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추모 물결이 일었다. 피해자를 기리는 문구를 적은 포스트잇이 일대를 뒤덮었다.

그리고 2022년 4월, 집으로 귀가하던 길에 실종된 멕시코의 18세 소녀 데바니 에스코바르는 13일 만에 한 모텔의 지하 물탱크에서 발견되었다. 머리를 둔기로 맞아 숨진 채였다. 

Daniel Becerril/Reuters
실종 13일째 까지 딸을 찾는 전단지를 건네던 데바니 에스코바르의 모친.

가디언에 의하면 데바니가 실종되기 직전 찍힌 마지막 사진이 공개되며 많은 멕시코 여성들은 절망과 자괴감에 빠져야 했다. 택시기사가 찍은 사진 속 데바니는 주변 친구, 동생, 선배 혹은 그 모두의 모습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데바니의 유족은 택시운전사가 성추행에 실패하자 고속도로변에 그를 내려두고 갔다가 돌아와 살해했다고 보고 있다. 하지만 수사당국은 여전히 용의자를 특정하지 못한 상태다. 데바니의 시신 또한 실종 지점에서 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물탱크에서 악취가 난다는 모텔 직원의 신고를 받고서야 찾아낼 수 있었다. 

이에 분개한 수많은 여성들은 지난 24일(현지시간) 멕시코시티 거리로 나와 소녀의 죽음을 추모하고, 페미사이드에 대항하는 시가행진을 벌였다. 그들은 경찰과 폭력적인 충돌을 벌이는 대신 평화시위를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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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바니 에스코바르 시신 발견 이후 행동에 나선 멕시코 사람들.
Future Publishing via Getty Images
여성인권운동가들이 붙인 실종 여성들의 사진들. 한 시민이 꽃을 들고 눈물짓고 있다.

멕시코시티를 대표하는 석상에는 지금까지 실종된 여성들의 이름과 현황을 적은 종이 포스터가 부착되었고, “2만 4000여 명 실종”을 알리는 내용, ”법의 심판”과 ”정의”를 요구하는 플래카드가 거리를 뒤덮었다. ”페미사이드 국가”라고 적힌 글귀도 찾아볼 수 있었다. 시위대는 수사당국이 앞서 4차례나 모텔을 수색했지만 데바니를 찾지 못했던 점을 문제 삼기도 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멕시코 내 페미사이드 피해자는 점점 늘고 있다. 2020년 977명을 기록했던 피살자의 수는 2021년 1015명으로 늘어났으며, 2022년이 채 절반도 지나지 않은 현재 약 1600명가량 여성의 실종신고가 접수된 상태다. 그중 829명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고, 16명은 목숨을 잃은 채 발견되었다. 올해 들어 멕시코의 여성들은 하루에 7명 꼴로 없어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Daniel Becerril via Reuters
데바니 에스코바르 시신 발견 다음날인 4월 22일, 페미사이드에 대응 않는 정부를 규탄하는 시위에 나선 여성이 눈물짓고 잇다.

멕시코 정부에 따르면 지금까지 멕시코에서 행방불명된 여성의 숫자는 2만 4천여 명을 넘었다. 지난해 약 2800명을 기록한 여성 실종자 수는 2017년에 비해 거의 40%가 증가한 수치다. 

보안 전문가와 인권 단체는 이런 현상을 실종 여성에 대해 제대로 조사하지 않고 페미사이드를 막지 못하는 멕시코 당국의 문제라고 파악했다. 데바니의 아버지는 ”나라의 무능함과 성추행범들이 내 딸의 목숨을 앗아갔다. 우리는 마음이 망가졌다”며 오열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국도 별반 다를 바 없다. 한국여성의전화에 따르면 지난해 언론에 보도된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 의해’ 목숨을 잃은 여성 피해자는 모두 103명이다. 살인미수 건은 216명이다. 보고서는 “이는 언론에 보도된 최소한의 수치로, 보도되지 않은 사건을 포함하면 살해된 여성이 훨씬 많을 것”이라는 사실을 짚었다.

한국여성의전화
'2021 분노의 게이지 : 언론보도를 통해 본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 의한 여성살해 분석’ 보고서 갈무리

한겨레는 남성이 여성을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들을 추적, 2016년 1월부터 2021년 11월까지 1심 판결이 선고된 427건의 사건과 3500쪽의 판결문을 분석해 국내 연구가 미진한 페미사이드에 대해 조사했다. 그리고 ”경찰청 범죄통계를 보면, 살인·강간·강도·폭행 등 5대 강력범죄로 목숨을 빼앗기는 여성은 한 해 평균 300명 안팎”인 현실에 대해 보도했다. 

한겨레는 ”피해자의 몸에 불을 붙이거나, 갖은 둔기로 내리치고, 셀 수 없이 찌른 남성 가해자들”에 대해 말하며 ”제주도에서 전남편을 살해하고 주검을 훼손해온 국민의 지탄을 받은 고유정씨의 경우와 유사한 잔혹범죄가 ‘페미사이드의 세계’에선 적어도 스무 날에 한 번은 일어났다. ‘일탈’이 아니라 ‘구조’라는 뜻이다”라고 전했다.

한겨레
페미사이드 500건의 기록.
JULIO CESAR AGUILAR via Getty Images
데바니 에스코바르 시신 발견 다음날인 4월 22일, 페미사이드에 대응 않는 정부를 규탄하는 시위에 나선 여성이 눈물짓고 잇다.

분노한 멕시코 시민들을 의식한 듯, 멕시코 하원은 지난 26일(현지시간) 페미사이드에 대한 형법 개정안을 대다수의 찬성으로 가결한 후 상원으로 넘겼다. 미수에 그친 경우에도 실제 여성살해 범죄에 가하는 형량의 절반 이상, 최고 3분의 2까지의 형량으로 처벌하도록 하는 것이 개정안의 내용이다.

법안을 주도한 파울리나 루비오 페르난데스 하원의원은 본 개정안에 대해 ”범행으로 안타까운 희생자가 발생했을 경우뿐만 아니라 문제의 최초 징후부터 대처하기 위한 방안”이라고 설명했다.

내가 데바니가 될 수 있었고 데바니도 내 미래를 가질 수 있었다. 우리는 더 이상 어떤 여자도 잃기 싫다. 

 

문혜준 기자: huffkorea@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