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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린북'은 단순한 인종차별 고발 영화가 아니다

다양하고 미묘한 이슈를 담담하게 보여준다.

ⓒhuffpost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문학평론가로서 내가 본 마음에 든 영화를 페북이나 ‘허프포스트’ 같은 온라인 매체를 통해 알리는 경우가 있다. 좋은 작품은 ‘홍보‘하고 싶은게 관객/비평가의 욕망이다. 페친들이나 기사를 통해 추천된 영화를 보는 경우도 종종 있다. 오늘 본 영화 <그린북>은 후자의 경우다. 추천들에 부응하는 영화다. 문학도 그렇지만 영화도 보고나서 뭔가 그에 대해 말을 하고 싶은 경우가 점점 드물다.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어쨌든 내 마음은 그렇다. 그런데 <그린북>을 보고나서는 뭔가 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만큼 이 영화가 언뜻 다소 뻔해보이는 서사구조속에 다양하고 미묘한 이슈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슈들을 상투적으로 ‘말하지‘(telling) 않고 ‘보여준다’(showing). 좋은 작품은 담담하게 보여줄 뿐이다. 느끼는 건 독자나 관객의 몫이다.

먼저 영화의 줄거리.

뉴욕 브롱스에 사는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르텐슨)는 나이트클럽 경호원으로 일하며 문제가 생기면 주먹으로 해결하는 남자다. 일거리를 찾던 중 세계적인 흑인 피아니스트 돈 셜리(마허샬라 알리)의 운전사로 취직한다. 인종분리정책과 짐 크로 법이 존재하던 196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계급과 신분이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은 콘서트 투어를 위해 맨해튼에서 출발해 미국 남부로 길고 긴 여정을 함께하면서 인종차별로 인한 온갖 끔찍한 일을 겪게 된다. - 씨네 21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영화의 도입부에 밝히듯이 1962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약 두달 정도의 여정을 다룬 일종의 ‘로드무비’다.

미국문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친숙한 말이지만 주로 남북전쟁 당시 남부 연방군(Confederacy)에 속했던 지역인 ‘딥 사우스‘(Deep South)‘로 두 사람이 연주 여행을 떠나는 것이 주요한 제재가 된다. 그런 위험한 여정을 왜 돈이 감행하는가를 영화는 묻는다. 영화는 그 물음에 예술가의 ‘천재성‘과 ‘용기’라는 답을 제시한다. 이렇게 적으면 상투적인 답안처럼 보인다. 영화는 이런 답을 상투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이미지화한다. 그점에 흑인 예술가로서 돈이 지닌 개성이 있다. 그 개성에는 영화에서는 전면적으로 다루지 않은 미국역사의 인종주의가 깔려있다.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링컨>에서 실감나게 묘사되었듯이, 1860년대부터 1970년대에 걸쳐 미국은 몇번의 헌법개정(Amendments)를 거쳐 법적인 차원에서는 노예제 폐지, 동등한 투표권과 시민권을 보장한다. 그러나 법은 법일뿐 그로부터 약 100년이 지난 1960년대까지 흑인들은 다양한 형태의 차별을 겪는다. ‘딥 사우스’ 지역은 그런 차별이 노골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드러나는 곳이다.

이런 차별의 상징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그린북’이다. 나도 이번에 이런 책이 실제로 있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영화에서도 토니를 비롯한 백인들은 이런 책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다. 아마, 그게 당대 백인들의 일반적 시각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가 놓인 조건에서 세상을 보는 법이다. 객관적인 시선은 없다. 이 영화는 그런 엇갈리는 시선의 관계를 다룬다. ”<그린북>은 1936년부터 1966년까지 발간된 연간 여행 안내 책자로, 흑인 여행자들이 여행 중 생길 수 있는 희롱, 체포 또는 물리적인 폭력을 피해 여행할 수 있도록 가이드 역할을 했다. 미국 전역을 직접 운전하며 다닌 아프리카계 우편배달원 빅터 휴고 그린이 생존 도구가 필요하다는 현실적인 문제의식”(씨네 21)에서 만든 안내책자다. 영화에서는 특히 숙소가 문제시 된다. 흑인은 흑인이 머물 수 있는 숙소에만 투숙 가능하다. 이런 분리와 차별은 두 주인공이 점점 더 남부로 내려갈 수록 노골화된다. 식당, 화장실 이용에서도 노골적인 차별이 나타난다.

이렇게 적고 있으면 이 영화가 다소 뻔해보이는 인종차별 고발 영화처럼 보인다. 그렇지 않다. 모든 좋은 작품이 그렇듯이, 엉성한 줄거리 요약이나 작품의 시대 배경의 설명이 영화의 재미와 감흥을 전하지는 못한다. 좋은 영화는 개별적 인물들의 삶과 관계를 통해, 그 관계가 섬세하게 드러나는 장면과 디테일의 배치를 통해 간접적으로 시대의 정서를 전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런 정서를 전하는 것도 영화의 일차적 목적이 아니다. 핵심은 인물들과 그들이 품고 있는 정감의 고유성이다. 이 영화는 그점에서도 눈에 띈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몇년전 본 프랑스 영화 <언터처블: 1%의 우정>을 떠올렸다. 둘다 다른 인종 사이의 우정과 이해의 문제를 다룬 ‘버디 무비’다. 두 영화 모두 실화에 바탕한다. 하지만 상황은 정반대다. <언터처블>은 부유하지만 신체장애가 있는 백인 남성과 가난하지만 자신만의 개성과 생명력을 지닌 흑인 간병인의 이야기다. 다루는 세목은 다르지만 두 영화의 기본 모티프는 유사하다. 그러나 <그린북>에서 토니와 돈이 맺는 관계는 더 많은 생각거리를 준다. 첫째 이유는 당연히 이 영화가 통상적으로 인종문제를 다루는 영화가 보여주는 관점의 틀을 깨기 때문이다. 백인-부유층-지성, 흑인-하층민-무식함의 틀.

토니역을 맡은 배우 비고 모르텐슨은 이 영화를 찍기 위해 몸무게를 20키로나 불렸다는데, 그만큼의 개성을 잘 보여준다. 거의 식탐 수준으로 묘사되는 톰의 왕성한 식욕이 한 예다. 그는 미국사회의 주류라고 할 수는 없는 이태리계 미국인이다. 영화는 백인-흑인의 단순한 이분법으로 포착할 수 없는 그 내부의 다양한 (계급적, 성적 정체성의) 차이점에 주목한다. 이태리계나 아일랜드계 백인이 잘 보여주듯이, 1870년대 이후 폭발적으로 늘어난 이민자들의 증가 속에서 이들은 종종 흑인들과 경쟁관계에 놓인다. 그들은 ‘백인‘이지만 그 ‘백인다움‘도 미국에서는 오랜 기간동안 역사적으로 규정된 것이다. 혹은 그 백인의 정체성을 쟁취한 것이다. 맑스에 기대 말하자면, 흑인이 그렇듯이, ‘백인’은 원래 백인이 아니라 특정한 관계 속에서 백인이 된다.

영화에서도 비주류 백인의 독특한 위치에 대한 문제의식이 드러난다. 그런 독특한 위치 때문에, 토니 같은 이태리계 미국인들은 자기들만의 강한 (가족)공동체를 유지한다. 그 이유는 이들이 주류 백인사회와는 차별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자신들을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다. 주류 백인사회는 종종 WASP(백인-앵글로색슨-개신교)으로 통칭된다. 이태리계, 혹은 아일랜드계 미국인은 거기에 속하지 못한다. 영화에서는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에피스드가 나온다. 돈이 당시 대통령이었던 J.F. 케네디를 열렬히 옹호하거나 그의 동생이자 당시 법무장관이었던 로버트 케네디에게 자신이 처한 ‘어떤 곤경’을 해결하기 위해 도움을 요청하는 장면이다. 케네디의 당선은 미국역사에서 WASP에 속하지 않는 비주류 백인의 부상을 보여주는 결정적 계기 중 하나로 종종 언급된다. 영화는 백인, 흑인으로 단순하게 범주화할 수 없는 그들 안의 차이, 즉 이태리계 백인-아일랜드계 백인-주류 백인-흑인 등이 맺는 다층적 관계의 모습을 무심한 듯, 하지만 세밀하게 포착한다.

토니는 스스로를 허풍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말하듯 거짓말장이는 아니며 말과 논리보다 주먹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거친 남자‘다. 그런 백인 남성이 사회적 관습에 따르면 백인 밑에서 굽실거려야 하는 흑인 예술가를 ‘보스’로 모시고 길을 떠나는 데서 이 영화는 범상치 않은 경로를 예고한다. 그런 경로의 시작은 영화의 초반부부터 나온다. 집에 찾아온 흑인 수리공들이 마신 컵을 몰래 쓰레기통에 버리는 토니의 행동. 흑인은 토니에게도 ‘불결한 검둥이(니거)’일 뿐이다. 그런 한 인물의 편견이 범상치 않은 여정을 통해, 상투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조금씩 깨져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이 영화의 매력이 있다.

남부 곳곳에서 벌어지는, 영화가 보여주는 사건들은 어느 정도는 예상할 법한 것들이다. 1960년대 미국 남부를 지배했던 견고한 인종주의의 벽들이 보여주는 모습들. 그 벽 앞에서 돈같은 교양있고, 지적이고, 명성있는 연주자도 예외는 아니다. 더욱이 단정할 수는 없지만, 돈은 동성애적 기질이 있는 걸로 묘사된다. 통상 이런 종류의 영화는 미국사회의 인종문제에 포커스를 맞추게 되는데, 영화는 토니와 돈의 계급적 차이, 성적 정체성의 차이에도 주목한다. 그런 차이들이 단순하게 정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영화가 전해주는 메시지의 복합성과 깊이가 있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에서 토니는 돈에게 자신과 돈의 계급적 차이를 언급하면서 왜 흑인으로서 네가 속한 공동체를 외면하느냐고 힐난한다. 그러나 흑인이라고 해서 모두 ‘프라이드 치킨‘을 좋아하지 않듯이, 돈이 지닌 다양한 정체성은 그가 어느 집단에도 편하게 속할 수 없다는 걸 드러낸다. 토니가 ‘백인’이지만 주류백인에 속하지 않듯이, 돈은 백인사회에도, 흑인사회에도 속하지 못한다. 각기 다른 이유로 그는 백인-흑인사회에서 배척된다. 더욱이 그는 동성애자이다. 돈은 어디에서나 주변인이다. 카메라는 종종 그런 돈의 고독을 포착한다. 그런 점에서 영화의 끝부분에서 돈이 자신을 차별하는 연주회를 거부하고 우연히 들른 흑인전용식당에서 흑인들과 어울려 경쾌하게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영화는 이렇게 다른 개성을 지닌 두 인물이 맺는 관계를 재미있게, 때로는 그 상황에서 나올 법한 유머를 보여주면서 표현한다. 종종 이런 영화는 시대의 압력에 눌린 인물들의 비극적인 이야기로 끝을 맺는데, 이 영화는 그렇지 않다. 나는 그점도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주는 따뜻한 감흥은 감상주의가 아니라 두 인물이 맺어온 이해가 낳은 자연스러운 귀결로 느껴진다.

이런 종류의 ‘버디 무비’에서는 역시 배우들의 연기가 관건이다. 토니 역의 비고 모르텐슨과 독특한 위치에 놓인 흑인예술가를 연기한 돈 역의 마허샬라 알리의 과장되지 않은 연기는 뛰어나다. 나는 비고 모르텐슨을 <반지의 제왕>으로만 기억하고 있고, 마허샬라 알리는 잘 몰랐는데, 좋은 배우를 만난 느낌이다.

강하고 센 영화만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고 믿는 이상한 경향이 한국영화계에 있다고 느껴왔다. 영화를 좋아하는 문학평론가로서 그점이 아쉬었다.(하지만 한국영화가 한국문학보다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관객보다 영화가 먼저 흥분하고 열을 내는 경우도 종종 목격한다. 그렇지 않은 영화도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영화를 만나서 반갑다. 그리고 좋은 영화는 역시 디테일의 묘사에 좌우된다는 걸 보여준 영화를 만나서 또한 반갑다. 세상사가 그렇듯이 영화의 진실이나 힘도 거창한 주제의 제시가 아니라 디테일에서 나온다. 이 영화 추천한다.

*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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