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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청년 마르크스'를 봤다

ⓒhuffpost

영화 ‘청년 마르크스’를 봤다.(나는 마르크스가 아니라 맑스가 맞는 표기법이라고 본다). 단상 몇개.

영화는 맑스와 엥겔스의 청년기를 다룬다. 맑스는 1818년생, 엥겔스는 1820년생이다. 영화는 1843년 맑스가 프러시아로부터 추방된 때부터 1848년 ‘공산주의자 선언’ 까지를 다룬다. 맑스가 프랑스 파리와 벨기에의 브뤼셀에 정치적 망명객으로 살던 때다. 맑스의 나이 만 25세부터 30세까지의 시기다. 엥겔스는 23-28세. 영화의 후반기에 맑스는 엥겔스와의 대화에서 ‘피곤하다. 이제 곧 나도 30세가 된다‘고 토로하는데 그가 살아온 과정을 보면 그 피로감이 느껴진다. 불과 30살이 되기도 전에 느끼는 피로감. 실제 맑스가 이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말에서 ‘인간’ 맑스의 내면이 느껴진다. 그도 인간이었다는 사실.

맑스 같은 사상의 대가를 책으로만 읽게 되면 그또한 육신을 지닌 존재로서 한 시대를 살아갔던 인간이라는 점을 종종 잊게 된다. 이 영화의 매력은 특정한 시공간을 살았던 인간 맑스/엥겔스의 면모를 조명한다. 물론 제한된 영화의 공간에서 그것이 깊이있게 재현되기는 힘들다. 그점에서 이 영화의 선택은 현명하다. 영화는단 5년동안의 ‘청년’ 시절에 초점을 맞추고 그들의 고민과 행동, 그리고 그들의 반려이자 동료였던 맑스의 아내, 엥겔스의 연인이었던 메리와의 관계를 다룬다.

영화에서는 좀 애매하게 처리되었지만 법적 부부였던 맑스-예니와는 달리 엥겔스-메리는 결혼하지 않았다. 1860년대 메리가 죽을 때까지 연인으로만 남았다. 여기에는 당대의 부르주아 결혼에 대한 두사람의 비판적 태도가 작용한다. 영화에서는 귀족 계급 출신인 예니와 노동계급 출신 메리가 남녀관계, 결혼관계(특히 아이를 낳는 문제)와 관련해 미묘한 견해의 차이를 드러내는 장면이 있다. 인상적이다. 이 영화의 매력 중 하나는 두 여인을 독자적인 존재로서 부각시킨 점이다. 특히 메리의 형상화가 눈에 띈다.

이전부터 해온 생각이지만 자본주의의 철저한 비판자로서 맑스도 그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족을 부양해야 했고 먹고 살기 위해 돈이 필요했다. 그점에서 맑스는 자본가의 아들이었던 엥겔스와는 처지가 달랐다. 그런 차이가 영화에서 표현되기도 하며 엥겔스의 재정적인 도움이 대해 맑스가 느꼈던 양가적 감정이 나타난다. 그런 미묘한 양상을 포착한 것도 좋다. 돈의 힘에서 그 돈의 비판자조차도 벗어나기는 힘들다.

이 열혈청년들은 1843-48년의 시기 동안 사상적 동료로서 ‘신성 가족‘(the Holy Family)를 쓰고 인류역사상 가장 선동적이고 중요한 정치팸플릿 중 하나인 ‘공산주의자 선언‘(1848)을 쓴다. 그리고 맑스는 프루동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한 ‘철학의 빈곤‘(1847)을, 엥겔스는 ‘영국노동자계급의 상태’(1845)를 각각 쓴다.

영화에는 당대 사회주의/공산주의/무정부주의 운동의 중요한 인물들이었던 프루동, 바쿠닌, 바이틀링 등이 등장한다. 맑스가 이들과 맺었던 관계, 사상투쟁 등이 꽤 실감있게 묘사된다. 특히 노동자(재단사) 출신이었던 바이틀링과의 논쟁에서 맑스가 했던 그 유명한 발언이 나온다. 노동자계급 출신이라는 점과 그 경험을 내세우며 노동자 계급 출신이 아닌 맑스와 엥겔스에 대해 제기되는 비판에 대한 반론의 발언. ‘무지가 도움이 된 적은 없다.’ 이 발언을 생생한 ‘현장음’으로 듣는 충격이 있다.

나는 이 영화에서 맑스보다는 엥겔스, 그리고 그의 반려였던 메리와의 관계가 더 다가왔다. 그만큼 엥겔스에 대해 잘 몰랐다. 그는 언제나 맑스의 ‘조력자‘(sidekick)로만 각인되어 있는데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인물의 형상화는 흥미롭다. 자본가의 아들로서 자본을 비판해야 하는 일종의 내적 분열이 가져오는 고통이 잘 나타난다. 나는 지금도 오래전 읽었던 ‘영국노동자계급의 상태‘가 묘사하는 당대 노동계급의 삶에서 느꼈던 충격을 기억한다. 맑스가 사상가라면 엥겔스는 역사가적 면모가 두드러진다. 그들의 ‘우정’은 지금봐도 각별하다. 그 우정의 깊이가 놀라울 뿐이다.

이 영화가 ‘영화‘로서 좋은지는 내가 판단하기 힘들다. 어느 영화평에서 이 영화가 또 하나의 ‘위인전‘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는데 동의하기 힘들다. 맑스, 엥겔스의 ‘인간적 면모‘가 좀더 표현되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느낄 수는 있지만 이들에게는 사상이 곧 삶이었다. 사상가/혁명가의 ‘인간적 면모’를 쉽게 말하는 것도 조심할 필요가 있다.

영화는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한 이들의 사상이 되풀이해서 읽히고 여전히 현재성을 지닌 이유를 몇개의 장면으로 제시한다. 나는 그 진단에 동의한다. 많은 이들이 1990년대 초반 소위 ‘현실사회주의‘의 붕괴과 더불어 맑스(주의)의 생명력도 끝났다고 말한다. 일단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이 과연 맑스가 사유한 사회주의에 부합하는지도 문제다. 맑스는 관념적 이상으로서 사회주의/공산주의를 말하지 않는다. 그에게 공산주의는 미래의 관념적 이상이 아니라 ‘현실의 모순을 지양하는 운동‘이다. 둘째, 설령 맑스의 사회주의 구상이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자본주의의 가장 철저한 분석가이자 비판자로서 맑스의 위상은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한 우회하기 힘들다. 셋째, 영화에서 맑스는 모든 형태의 애매하고 추상적이고 뭉뚱그리는 사상이나 이론을 격렬히 비판한다. 그에게 철학과 사상은 언제나 ‘구체적 상황의 구체적 분석‘(레닌/알튀세르)이었다. 연구자들, 작가들, 비평가들이 새길 말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사유하는 법의 기초를 맑스에게서 배웠다. 이른바 유물론적 사유의 방법. 물론 그렇다고 ‘맑스주의자’는 아니지만.

이제는 ‘이상‘을 말하고 ‘대안’을 말하면 비웃음을 받는다. 그저 주어진 현실에 충실 혹은 굴복하고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이 최고의, 유일한 가치로 평가받는다. 현실추수주의의 승리다. 그만큼 자본주의의 힘이 세졌다는 뜻이다. 그런 이들에게 영화에서 맑스/엥겔스가 꿈꾸는 대안과 연대의 꿈은 냉소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과연 그럴까. 지난 시대를 낭만화하거나 이상화하는 것은 언제나 경계해야 하지만 이상과 대안을 가졌던 시대를 되돌아보는 건 의미있다. 곧 영화관에서 내릴 듯한데 찾아볼 만하다.

이 영화를 보고나니 임화를 비롯한 한국현대사의 비극적 인물들의 삶과 사유를 영화로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다시 든다. 좋은 영화만큼 인물들을 다시 살리는 매체도 없다.

* 필자의 페이스북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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