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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치료 피해자에 모자이크를 입히면서 든 생각

ⓒhuffpost

‘얼마나 가려야 할까?’

영상을 완성하기 전 마지막으로 거치는 단계. 모자이크와 음성변조를 얼마나 할 것인지 결정한다. 나는 이 단계에서 의사결정을 하면서 종종 마음이 착잡하다. 또렷했던 피해자의 얼굴이 흐릿해지고, 분명했던 목소리가 변조 후에 조금 뭉개져서 들린다. 피해자 보호를 위한 작업이므로 필수적인 일인데, 때론 그런 생각이 든다. ‘무엇으로부터의 보호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이 얼굴을 드러낼 수가 없지?’

괜한 질문이다. 답을 이미 안다. 시선으로부터의 보호다. 사회의 차별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을 차별적 시선을 가진 많은 사람에게 다시 보여주는 일이니까. 이 사람을 선명한 화면으로 마주할 수 있는가. 2차 피해가 우려될수록 모자이크는 진해진다. 차별이 이들의 얼굴을 흐릿하게 만든다. 돌 맞은 사람을 보고 또 돌 던질 사람들이 기다리는 사회에는 모자이크 없이 피해자를 드러낼 수 없다.

얼마 전, 모든 인터뷰이의 얼굴을 가릴 수밖에 없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전환치료 피해에 대한 이야기였다. 전환치료(Conversion theraphy)는 ‘동성애, 양성애를 성적 지향의 하나로 인정하지 않고 치료, 치유 등을 통해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하는 유사치료행위‘다. 부모님에게 커밍아웃을 하고 나서 피해자들은 억지로 기도원에 끌려가고 상담을 받으러 가야 했다. 아픈 곳이 하나 없는데, 강제로 어딘가로 끌려가서 눈이 맛이 갔다느니, 동성애 하는 악령을 내쫓아야 한다느니 하는 소리를 들으며 기도를 ‘받았다’.

가장 안타까운 건 이러한 폭력이 ‘사랑’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이다. 가족의 강요로 전환치료를 받게 된 피해자들이 많았다. 부모는 자식이 세상에서 내쳐지지 않기를 바라고, 차별적인 세상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기 때문에, 자식이 바뀌길 간절히 바랐다. 전환을 강요하는 과정에서 반복되는 말은 ‘사랑‘이다.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 사회에서 네가 살아남기를 바라기 때문에. 차별받지 않고 살기를 바라기 때문에. 병든 세상을 고칠 자신이 없는 부모의 마음이 병든다. 마음이 병든 부모가 아이에게 ‘네가 병들었다’고 말한다. 아이는 노력하려 들고, 전환치료를 받으러 간다. 그것이 서로를 위한 구원이라고 믿으며.

물리적 폭력을 동반하지 않은 탈동성애를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그런 ‘극단적 폭력‘이 일어나는 곳과 자신들은 확연히 다르다고 말한다. 자신들이 행하는 것은 ‘전환치료‘가 아니라 ‘내적 치유’라고 말한다. 성경을 통해 죄를 성찰하도록 사랑으로 돕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자기를 돌아보는 일은 왜곡되지 않은 거울을 보고 해야 하는 일이다. 탈동성애라고 쓰여 있는 거울을 들고 무엇을 비추려 하나? 따뜻한 폭력도 폭력이다.

사람들이 병이라고 말하니 실제로 병이 되어 버리고, 죄라 말하니 실제로 죄가 되어 사람을 옥죈다. 고려대 보건정책관리학부 김승섭 교수는 “동성애가 질병이 아니란 것은 이미 오래전 의학계에서 내려진 결론이다. 전환치료가 효과가 있는가는 다룰 만한 가치가 있는 질문으로도 여겨지지 않는다”고 말한다. 또 “전환치료는 오히려 자기혐오를 유발해 우울증, 자살 시도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미국, 캐나다 등지에서 전환치료를 금지한 이유는 명확하다. 효과가 없고 비윤리적이며, 전환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사람이 병들기 때문이다.

병든 건 그 사람이 아니라, 그를 바라보는 시선들이다.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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