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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운세' 녹음을 부탁하는 전화를 받다

마부작침④

  • 안지환
  • 입력 2018.05.18 15:37
  • 수정 2018.05.18 15:38
ⓒhuffpost

오늘의 운세

전속 기간이 끝나갈 때쯤의 일이다. 평소처럼 성우실을 지키고 있는데,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거기가 MBC 성우실인가요?”
- 네. 그렇습니다.
“성우분들이 ARS(자동응답전화) 녹음도 해주신다길 래…….”
- 어떤 내용인가요?
“오늘의 운세입니다.”
- 특별히 부탁드리고자 하는 분이 있습니까?
“아니요, 그냥 너무 유명한 분 말고…….”
- 그러세요? 마땅한 분이 계신지 알아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때 성우실에는 나 혼자 있었다. 10분쯤 뒤에 전화를 걸었다. 목소리를 살짝 바꿨다.

- 아, MBC 성우 안지환이라고 합니다.
“아이코. 안녕하세요. 다름이 아니라…….”
- 네, 들었습니다. ARS 녹음을 하고 싶으시다고요?

그렇게 해서 방송국 입사 뒤 첫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다. 녹음을 부탁한 사람이나, 나나 처음 해보는 일이어서 정보가 없었다. “그냥 A4용지 한 장당 얼마에 합시다” 하고 일을 시작 했다. 나중에 알아보니 내가 부른 가격이 시장 가격의 다섯 배
가 넘었다.

ⓒchoness via Getty Images

 

전속 기간을 마친 선배 성우들이 밥과 술을 호기롭게 사길래, 나는 성우들이 방송사 밖에서 그런 대우를 받는 줄 알았다. 성우들은 적은 돈을 자주 번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성우들 주머니 속에 용돈은 넘쳐나는데 재산은 없다는 얘기가 무슨 뜻인지도 나중에야 알게 됐다.

일을 주는 사람 입장에서는 어차피 한 장당 금액이 정해져 있으니, 갈수록 폰트(활자 꼴)를 줄이려 했다. 당연히 녹음 분량이 늘어났다.

“오늘은 동남쪽에서 오는 귀인을 만나 그동안 막혀 있던 일들이 풀리는 날입니다. (……) 문서를 취득하면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슷비슷한 소리를 끝없이 읽다가 나도 졸고, 엔지니어도 졸았다. NG가 나도 모르고 넘어갔다. 2013년에 〈황금어장 무릎팍도사〉에 출연했을 때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웅얼웅얼해가며 애드리브를 했더니, 모두들 배꼽을 잡고 웃었다.

프리

1996년 3월 5일 전속계약 기간이 끝났다. 프리랜서 성우가 된 것이다. 성우협회와 연예인협회에 가서 신규회원 등록을 했다. 감격스러울 줄 알았는데, 막상 회원증을 받을 때는 무덤덤했다.

프리랜서는 잠재적 실업자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일이 있으면 수입이 생기고, 일이 없으면 땡전 한 푼 주머니에 들어오는 게 없다. 그래서 프리랜서 연예인들을 자조적으로 ‘바우처Voucher 인생’이라고 부른다. ‘바우처’란 전표 또는 지불인증권을 뜻하는 프랑스어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영어권에서도 이 단어를 쓴다. 연예인들은 공연이나 출연 대가를 바우처로 받는다. 직장인들의 월급과 비슷하지만, 정기적으로 들어온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전속이 끝나갈 때쯤에는 연기에 대한 자신감도 어느 정도 생겼다. 그럼에도 불안은 여전했다. 프리랜서 성우로서 첫발을 잘 떼야 한다는 부담이 컸다. 사람들이 식당에 들어가서 첫술을 떴을 때 음식이 별로라는 생각이 들면, 그 집을 다시 찾지 않는다. 프리랜서 성우 역시 마찬가지다. 처음 기회가 주어졌을 때 충분히 준비돼 있다는 느낌을 주는 사람만 두 번, 세 번 “같이 일하자” 하는 제안을 받는다.

〈장학퀴즈〉

전속이 풀린 뒤 내가 성우로서 자리를 잡아가는 데 디딤돌이 돼준 프로그램은 〈장학퀴즈〉와 〈이야기 속으로〉였다. 〈장학퀴즈〉는 일반인들이 교양프로그램으로 알고 있지만, 방송사 안에서 예능프로그램으로 분류됐다. 반대로 예능프로그램일 것 같은 SBS의 〈TV 동물농장〉은 교양프로그램이다. 교양이냐 예 능이냐에 따라 만드는 부서가 다르고, 프로그램의 색깔도 달라진다. 일반인들의 눈에는 교양과 예능을 가르는 잣대가 조금 이상하게 비칠지 몰라도, 어쨌든 현실이 그랬다.

〈장학퀴즈〉는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퀴즈프로그 램이다. 1973년 방송을 시작해 1996년 10월까지 MBC에서 방 송된 뒤 1997년부터 EBS로 옮겨갔다. 지금은 〈장학퀴즈—학 교에 가다〉라는 이름으로 방송되고 있다. 나는 이 프로그램에 2년간 출연했다. 현장에서 문제를 바 로 읽어야 했기 때문에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했다. 더빙이라면 실수해도 다시 갈 수 있지만, 현장 낭독은 그럴 수가 없다. 만일 내가 지문을 읽다가 실수를 하게 되면 그 문제를 버려야 했다. 모든 스태프가 매달려 촬영한 부분을 ‘통편집’해야 하니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다.

퀴즈에 잘못된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를 가려내는 내용이 들어 있으면, 그것도 힘이 들었다. 성우들은 평소에 표준어를 구사하는 훈련이 돼 있기 때문에 일부러 틀린 단어나 비문을 사용하는 것이 어색하고 불편했다. 나중에 경력이 쌓인 뒤 큰 국제경기 진행을 생방송으로 할 때도 그때만큼 긴장되지는 않았다.

〈장학퀴즈〉에 출연하게 된 데는 운도 한몫했다. 나를 성우로 기용하자고 제안한 사람은 이수연 작가였다. 아무런 친 분도 없었는데 성우 수첩에 실린 내 프로필을 보고 PD에게 추 천했다고 했다. 이 작가는 그 뒤 프로듀서로 전향해 활발한 활 동을 하고 있다. 현재 ‘이수연 PD의 방송이야기’라는 제목으 로 일간지에 칼럼도 연재하고 있다.

〈이야기 속으로〉

〈이야기 속으로〉는 시청자들의 체험이나 제보에 바탕을 둔 재 연프로그램이었다. 1996년 7월부터 1999년 1월까지 방송되 는 동안 40% 가까운 시청률을 기록했다. 1990년대 인기 프로 그램들의 시청률이 지금과 비교해 전반적으로 높았던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상당한 수치였다. 〈이야기 속으로〉는 처음에는 월요일 저녁에 방송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금요일 밤으로 시간대를 옮겼다.

나는 이선주 씨와 함께 내레이션을 맡았다. 더 정확히는 내가 제작진에게 이선주 씨를 추천한 제안이 받아들여졌다. 보통 무서운 이야기는 내가, 코믹한 이야기는 이선주 씨가 진행했다. 당시 다뤘던 소재들은 ‘도깨비 집터’, ‘파출소의 소복여인’, ‘용꿈 대 돼지꿈’, ‘해롱해롱 결혼식’ 등 지금 감각으로 보면 약간 촌스러운 것들이 많았다. 이 프로그램은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1999년 초 종영됐 다. 과학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소재를 다뤄 미신을 조장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폐지 사유였다. 〈경찰청 사람들〉도 같은 시기에 폐지됐는데, 사유는 ‘모방범죄’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는 것이었다. 〈이야기 속으로〉와 〈경찰청 사람들〉은 둘 다 MBC TV의 화제작이었던 터라 담당자들이 몹시 아쉬워했다.

평판

〈장학퀴즈〉와 〈이야기 속으로〉에 출연하는 동안 “일을 야무지게 한다”라는 소문이 났다. 방송계는 보수적인 동네다. 야구에 비유하면, 한 번 홈런을 친 뒤 내리 삼진을 당하는 타자보다는 꾸준히 3할을 쳐주는 타자를 선호한다. 또 시속 140km의 공을 던질 수 있는 투수에게는 제구 불안을 무릅써 가며 시속 150km짜리 공을 던지기보다 안정적 인 컨트롤을 유지하면서 시속 130km짜리 공을 던져줄 것을 요구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제법 괜찮은 점수를 받으며 그라운드에 첫발을 내디딘 셈이다.

물론 이런 평판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내 나름대로 준비와 노력이 있었다. 일반 시청자들은 잘 모르 겠지만, 방송 현장에서는 중요한 대목은 A안, B안 두 가지 버 전을 만든다. 이 중 시사, 편집 과정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안을 최종적으로 내보낸다. 나는 늘 또 하나의 안을 준비해갔다. PD가 1안과 2안 녹 음을 마친 뒤 “수고하셨습니다”라며 OK 사인을 낼 때 “하나 만 더 해보지요”라며 준비해 간 보따리를 풀었다. 이런 식으로 제시한 안이 채택되는 사례가 늘면서 “방송 콘셉트를 안다”라는 평을 듣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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