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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감’이 죄인가?

민감하지 않다고 뽐내는 사회는 잔인하고 미련한 사회다

ⓒhuffpost

“너 민감하구나!” 민감한 사람이 이런 말을 들으면 무척 억울해한다. 어떤 상황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그 사람의 반응은 전적으로 민감한 성격 탓으로 돌려지니 어찌 억울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래도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점잖은 편이다. “너는 매사에 어쩜 그렇게 예민하고 유난스럽게 구니?” 이건 걱정이 아니라 아예 욕이나 다를 바 없다.

우리는 민감을 탄압하고 둔감을 예찬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세월이 너무 길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1970년대와 80년대만 해도 인권에 민감했다간 감옥에 끌려가기 십상이었던지라 둔감해야만 나와 가족의 안녕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런 세상은 지나갔지만, 그때 집단적으로 형성된 둔감의 습속은 오늘날 우리들의 일상적 삶을 여전히 지배하고 있다. 

ⓒjaouad.K via Getty Images

국민적 지탄을 받는 한국 정치가 바뀌기 어려운 이유는 법이나 제도의 문제가 아니다. 정치인이 될 수 있는 첫번째 자격을 둔감력으로 보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우리의 풍토에 있다. 그걸 가리켜 ‘정치적 근육’이라고도 하는데, 그걸 가져야만 정치판에 뛰어들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다는 게 어느덧 상식처럼 자리잡고 말았다.

물론 그 선의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정치가 좀 힘든가. 무엇보다도 수많은 인신공격성 비판을 견뎌내고 위기 상황에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맷집과 뚝심이 있어야 한다는 뜻으로 그리 말하는 것이겠지만, 뒤집어서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그런 자질은 좋은 방향으로만 작동하는 게 아니다. 나쁜 방향으로 작동하면 그건 비판에 둔감해져야 한다는 것이고, 이게 습관으로 굳어지면 ‘후안무치’나 속된 말로 ‘안면몰수’가 된다. 지금 한국 정치가 욕을 먹는 가장 큰 이유는 정치인들의 후안무치와 안면몰수가 아닌가.

그런데 기질적으로 비판에 민감하고 후안무치와 안면몰수를 할 수 없는 사람은 아예 정치판에 뛰어들 수도 없다는 이야기이니, 이러고서야 정치가 어찌 바뀔 수 있겠는가. 정치뿐만이 아니다. 모든 분야에 걸쳐서 우리는 ‘강한 멘탈’과 ‘강한 정신근육’을 가진 사람만이 살아남고 성공할 수 있는 조직문화를 키워가고 있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누가 덜 민감한가 하는 경쟁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게 거스를 수 없는 인간세계의 법칙이라면 내키지 않아도 따라야 하겠지만, 그건 결코 그렇지 않다. 정치인과 관료가 시민의 요구와 비판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정도는 나라마다 다르다. 한국이 세계적인 ‘시위 공화국’이 된 것은 정치인과 관료가 시민의 요구와 비판을 둔감력으로 대처하는 것을 기본 자세로 삼고 있다가 언론 보도가 될 정도의 집단적 시위에 나설 때에 다소 민감한 척하는 행태를 보이기 때문이다.

ⓒAli Majdfar via Getty Images

지금 일어나고 있는 미투 열풍도 바로 그런 풍토가 조성해온 ‘둔감한 사회’에 대한 저항이라고 볼 수 있다. 남성일지라도 일상적 삶에서 여성에 대한 성희롱이나 성추행의 소지가 다분한 언행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 주변에서 “예민해졌다”는 말을 듣기 십상이다. 그런 말을 들을까봐 침묵하는 남자들도 많다. 교수의 성추행에 저항하지 못했던 어느 여학생은 졸업 후 그 이유에 대해 스스로 “제가 너무 유난이고 예민한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다”고 털어놓았다.

정의에 대해 민감한 것이 죄인가? 하긴 우린 때론 그런 민감성이 죄인 세상에 살고 있다. 이런 세상에 익숙해져 있는 다수의 사람들은 정의에 대해 민감한 사람마저 이른바 ‘프로불편러’의 범주에 넣으려고 안달한다. 민감한 사람의 모든 행동이 다 바람직하거나 옳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민감보다는 둔감을 높게 평가하면서 둔감을 사실상 ‘대범’이나 ‘포용’으로 착각해온 그간의 관행을 성찰해보자는 것이다.

너나 할 것 없이 자신이 민감하지 않다고 뽐내는 사회는 잔인하고 미련한 사회다. 이는 민감한 사람이 자책을 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자신이 잔인하지도 않고 미련하지도 않은 게 왜 흉이 되어야 한단 말인가. 민감성으로 인한 탄압을 받더라도 그것이 불의에 의한 것이라는 판단이 서면 견뎌내기가 훨씬 쉬워진다. 자책을 하지 않게 될 뿐만 아니라 이 잘못된 풍토를 바꿔야 한다는 문제의식까지 생겨나면서 오히려 힘을 얻게 된다. 둔감하다고 뽐내는 사람을 우러러보는 게 아니라 경멸하는 마음, 이게 바로 변화를 위한 출발점이다.

* 한겨레 신문에 게재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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