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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기억은 사라진 게 아니라 잠자고 있었다

유년 시절의 경험은 쉽게 잊힌다.

  • 김태우
  • 입력 2018.07.13 09:56
  • 수정 2018.07.13 09:58
기억의 처리 기능을 하는 해마 치아이랑 부위의 영상. 빛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단백질(채널로돕신)이 발현된 기억 세포들이 녹색으로 나타나 있다. 알츠하이머 질환모델 쥐의 뇌 영상.
기억의 처리 기능을 하는 해마 치아이랑 부위의 영상. 빛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단백질(채널로돕신)이 발현된 기억 세포들이 녹색으로 나타나 있다. 알츠하이머 질환모델 쥐의 뇌 영상. ⓒ일본 이화학연구소(RIKEN)

유년 시절의 경험은 쉽게 잊힌다. 서너 살 때의 사진을 보며 별 기억을 떠올리지 못하고 낯섦과 신기함을 느끼는 일은 흔하다. 그래서 ‘유아 기억상실(infantile amnesia)’ 또는 ‘유아기 망각’이라는 말도 생겨났나 보다. 뇌가 발달 중인 유아 시절의 기억은 잘 저장되지 않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기억을 끄집어내기가 힘들기 때문일까? 달리 말해 유아기의 잃어버린 기억은 저장의 실패 때문일까, 회상의 실패 때문일까?

이런 물음에 답하려는 동물실험 결과가 새로 발표됐다. 연구진은 유아기의 경험은 사라지는 게 아니라 신경세포들(뉴런)에 저장되지만 끄집어내기가 힘들다는 것을 쥐 실험을 통해 보여준다.

캐나다 토론토대학 어린이병원의 신경과학자인 폴 프랭클랜드(Paul Frankland) 연구진은 갓난 어린 쥐와 성장한 어른 쥐를 대상으로 광유전학 같은 첨단기법들을 이용해 기억의 저장과 회상에 관한 실험을 벌이고서 얻은 새로운 발견을 생물학저널 ‘커런트 바이올로지(Current Biology)‘에 ‘쥐에서, 잃어버린 유아 기억의 회복’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발표했다. 이 실험에서 다뤄진 기억은 ‘공포’ 기억이다. 특정한 실험 상자에다 쥐를 넣고서 발에다 약한 전기 충격을 가해, 쥐가 그 실험 상자를 공포의 대상으로 기억하게 하는 방식이다. 유아 쥐와 어른 쥐는 직접 겪은 전기 충격의 공포를 어떻게 기억할까?

연구진은 먼저 유아기의 기억이 쉽게 망각되는 일반적인 현상을 쥐에서 다시 확인하고자 했다. 전기 충격을 경험한 유아 쥐와 어른 쥐를 며칠 뒤에 전기 충격이 있었던 그 상자에다 다시 넣었을 때, 몸이 ‘얼어붙는’ 공포 반응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관찰했다. 젊은 어른 쥐들은 공포 기억을 되살려 15일, 60일, 90일 뒤에도 그 상자에 다시 들어갔을 때에 얼어붙는 공포 반응을 보였으나, 유아 쥐들에서는 얼어붙는 공포 반응이 급격하게 줄어들어 90일 뒤에는 거의 망각 상태를 보여주었다. 그 기억은 어디로 간 걸까?

연구진은 그 기억이 정말 사라진 것인지(저장의 실패), 또는 그저 끄집어내지 못하는 것인지(회상의 실패)를 확인하기 위해서 기억 연구에 쓰는 기존 기법들을 발전시켜 실험했다. 

광유전학을 이용한 신경과학 실험의 모델동물 마우스.<br /></div>
광유전학을 이용한 신경과학 실험의 모델동물 마우스.
ⓒhttp://webstanfordedu/group/dlab/optogenetics/

세포가 활성화 할 때에 형광을 발현해 활성 신경세포들만을 시각적으로 식별하게 해주는 ‘형광 단백질’, 그리고 빛에 반응해 신경세포를 흥분 상태로 만드는(활성화 하는) ‘광유전학 단백질(채널로돕신)’이 발현되도록 쥐 유전자를 변형함으로써, 특정 기억 생성 때 활성을 띠는 특정 신경세포들을 골라내고, 또 빛을 쪼여 그 세포들만을 활성화시킬 수 있게 실험을 설계했다. 공포 상자 기억이 생성될 때 활성을 띤 세포들에서 형광과 광유전학 단백질이 지속적으로 기능하도록, 다시 말해 ‘공포 상자 기억에 해당하는 기억 세포들’에다 “영구적인 식별 표지를 붙이는(permanently tagging)” 기법도 고안해 사용했다.

유전자 변형을 통해 실험용 쥐를 만듦으로써, 연구진은 이제 공포 기억을 생성할 때 활성을 띠었던 특정 신경세포들을 늘 식별하면서 그 세포들만을 선택적으로 자극할 수 있게 되었다. 연구진은 이미 공포 기억을 잃어버려 공포 반응을 보이지 않는 어린 쥐의 뇌에서 공포 기억 세포로 식별된 그 세포들을 다시 빛으로 자극해 활성화한다면, 잃어버린 공포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실험을 벌였다.

실험 결과는 유년 기억이 사라진 게 아니라 잠복해 있었던 것임을 보여주었다. 특정 파장의 빛을 쪼이자 공포 기억 세포들이 다시 활성화했으며, 어린 쥐들은 공포 상자의 기억을 떠올려 얼어붙는 공포 반응을 보여주었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기억의 회상은 90일 뒤에도 다시 나타났다.

연구책임자인 크랭클랜드는 자신의 트위터에서 연구결과를 요약해 소개하면서 “이런 결과는 유아 기억상실이 어느 정도는 (저장 문제가 아니라) 회상의 문제임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는 ‘유아 기억상실’이라는 개념을 처음 제시하며 심리치료로 그 유년 기억을 다시 끄집어낼 수 있다고 주장했던 프로이트를 언급하면서, 이번 연구가 “프로이트의 주장과도 어느 정도 일치한다”라고 덧붙였다.

흥미로운 점은, 이번 실험에서 관찰 대상이 된 기억 세포들은 학습과 기억의 중추인 해마 차아이랑 부위에 있는 것들이었는데, 기억의 회상 과정에서 해마에서 멀리 떨어진 피질 부위에서도 기억 회상과 관련한 활성 세포들이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기억 세포들이 해마 부위 외에 더 넓은 영역에 걸쳐 분포할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으로 풀이된다.

치매환자도 새 기억을 저장한다, 다만 다시 끄집어내지 못할 뿐 -쥐실험

한편, 사라진 것처럼 보이던 기억이 실은 회상하기 어려울 뿐이지 기억 세포들에 저장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동물실험 결과는 2016년에도 발표된 적이 있다.

알츠하이머로 소실된 기억, 복원하다 -쥐 실험 [사이언스온, 2016년 3월17일치]

일본과 미국의 공동연구진은 기억의 저장과 소실, 복원에 관한 쥐 실험에서, 조금 전의 경험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알츠하이머 질환모델 실험쥐의 뇌 기억 신경세포(뉴런)들의 연결지점들(‘spines’)을 활성화하는 인위적 자극을 가했더니 경험 기억이 복원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과학저널 네이처에 밝혔다. 이 실험에서도 광유전학 기법이 사용됐다. 이런 연구결과는 알츠하이머 질환의 기억 장애가 기억 저장의 문제에서 비롯한 게 아니라 저장된 기억을 끄집어내는 과정의 문제에서 비롯할 가능성을 보여준다.

동물을 대상으로 한 이런 연구결과들은 기억의 저장과 회상에 관해 새로운 인식을 던져주며 기억 상실에 대한 치료 연구에도 희망을 보여주지만, 동물실험 결과를 뇌 구조와 기능에서 크게 다른 인간에 적용하는 것은 섣부르다는 의견들도 있다. 현재로선 여러 실험연구들이 기억 생성, 저장, 회상의 기본 원리에 관한 기초적인 이해를 조금씩 넓혀가고 있는 중이다.

논문 요약 (우리말 번역)

인간과 동물에서, 초기 유아기에 형성된 해마 의존성의 사건 관련 기억은 빠르게 잊힌다. 최근에 우리는 해마에서 일어나는 높은 수준의 신경발생이 유아기의 망각 속도 증가에 기여함을 밝혀낸 바 있다. 이번 연구에서는, 우리는 유아기에 형성된 이런 기억이 영구히 지워지는지(즉, 저장 실패) 또는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접근할 수 없게 되는 것인지(즉, 회상 실패)를 묻는다. 이 연구를 위해, 우리는 유아 쥐에서 특정 상황에 놓인 공포 기억의 생성(fear encoding) 동안에 활성화 된 신경세포 조합(neuronal ensembles)에서 채널로돕신-2(ChR2)가 영구적으로 발현하도록 하는 광유전학 기법을 개발했다. 우리는 해마 치아이랑에서 채널로돕신 표지가 붙은 신경세포 조합을 다시 활성화할 때 성인기에 그 기억이 충분히 회복되는지를 살폈다. 우리는 표지된 치아이랑 신경세포들의 광유전학적 자극이 공포 기억이 생성되고 최대 3개월이 지난 뒤에도 ‘잃어버린’ 유아 기억을 회복시켰으며 기억 회복이 표지된 해마와 피질 신경세포 조합의 더 넓은 재활성화와 관련 있음을 발견했다.

[Current Biology, https://www.cell.com/current-biology/fulltext/S0960-9822(18)30695-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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