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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30살이고, 싱글이고, 행복하다. 솔직히 말해 그래서 무섭다.

ⓒivanCHANG via Getty Images

일요일 아침이다. 음악 앱으로 ‘피아노 발라드’를 들으며 빵집에 와 있다. 보통 지금쯤 맨해튼은 브런치 손님들로 붐빌 시간인데 오늘따라 조용하다. 형광색 요가복을 입은 여성들이 구석에서 설탕을 뿌린 머핀을 나눠 먹고 있고, 맥북을 앞에 두고 9분째 폰으로 문자를 보내고 있는 프리랜서가 있다. 그가 컴퓨터로 아이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는 걸 모르나 싶다.

오랫동안 나는 싱글로 맞이하는 일요일 아침을 두려워했다. 내가 혼자라는 걸 불안해하며 일어나곤 했다. 스스로에 대한 미움 때문에 생긴 상처들을 치유해 줄 파트너를 원했다. 나는 애인과 함께 하는 ‘게으른 일요일’을 갈구했다. 정신없는 상태에서 하는 아침 섹스, 껴안고 있기, 커피나 브런치, 커피를 마시고 브런치를 먹고 손을 잡고 함께 걸으며, 사랑의 열병으로 숙취가 덜해지는 것에 대한 판타지를 가졌다.

하지만 오늘 나는 혼자 보내는 일요일 오전을 즐겼다. 여러 해 동안 내 생각과 감정에서 도망쳤던 나는 혼자 있는 것을 깊이 즐기게 되었다. 가끔 슬프거나 불안하거나 외롭지 않은 것은 아니다. 창작하고 사람들을 연결하고 요가를 하는 사이사이에, 내 빚, 내가 언젠가는 죽는다는 사실, 최근에 차인 일들이 떠오르곤 한다. 하지만 이런 경험들은 과거에 비해 덜 괴롭다. 견디기가 더 쉬워졌다. 예전만큼 두렵지도 않고, 이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을 비판하지도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침착함은 힘이자 고마운 선물이 된다. 내가 세라피를 하며 클라이언트들에게 가르치는 기술이고, 모든 인간이 이번 생에서 일구어 내야 할 '보호구역' 같은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내가 내 감정과 평화롭게 지낼 수 있게 된 것에 의문을 품을 때가 있다. 내가 연애를 하게 만들던 필요 영역 하나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나는 혼자 있는 것이 너무 편해져서, 관계의 헌신의 위험, 희생, 책임을 지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스스로를 미워하던 때는 그런 걸 우선시했다).

나는 지금 결코 모든 여성들에게 내면의 비판자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혹은 스스로의 가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연애를 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전통적인 사회적 맥락을 잊지 말자! 올 여름에 나는 초등학교 때의 여자 친구들과 30번째 생일을 축하하러 라스 베이거스에 갔다(뻔하다는 것은 나도 안다). 풀 파티에서 어떤 남성과 몇 분 정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내가 베이거스에 왜 왔는지 물었다. 이유를 말하자 그는 역겹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가 30살이라는 걸 알았다면 내게 말을 걸지 않았을 거라고 했다. 30세 여성은 나이가 너무 많고 필사적이라고 생각한다. ‘아기 시계’가 째깍거리고 있고 ‘어떤 남성이든 붙잡으려’ 한다고 본다. 그는 내가 ‘30살로 보이지 않고’ 이미 친해졌기 때문에 내게 여전히 관심이 있다고 안심시켰다. 휴! 내가 아직도 남성을 유혹할 수 있다니 얼마나 다행인지!

나는 24세 때 여성이 연애를 끝내는 경험에 대한 석사 논문을 썼다(놀랍지 않게도, 두 번째 애인과 헤어진 내 경험에서 최초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나는 외도나 학대를 경험한 사람들은 일부러 배제했다. 싱글로 지내기를 선택하는 이유 중 사회적으로 받아 들여지는 ‘핑계’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여성이 연애를 해야 한다고 느끼는 부정할 수 없는 압박을 표현하려 했다. ‘정말 멋진 남성’을 만나기를 선택하기보다 싱글이기를 선택하는 여성들에게는 큰 결함이 있을 것이라는 사회적 압박 말이다.

당시 논문을 쓰면서 한 연구 중에는 충직한 파트너와의 관계보다는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잘 가꾸기로 한 ‘이기적인’ 여성들과의 심도 있는 인터뷰도 있었다. 내면의 비판자를 가라앉히기 위해 연애를 사용하지 않는 여성들조차도 ‘파트너에 대한 압박’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141페이지에 달하는 나의 논문은 이런 불안과 죄책감을 느끼는 여성들을 카운슬링할 때 쓸 수 있는 자료가 되었고, 페미니스트 서사 이론에 여러 해 동안 빠져 있으면서 나는 여성들이 내면화하는, '연애를 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상당히 해방되었다.

하지만 반전이 있다. 나는 연애를 하고 싶다. 내게 사회 규범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바랄 때도 있다. 내가 ‘압박’을 느낄 때도 있다. 예를 들면 30살이 될 때 내가 느꼈던 저항감, 나이 앞자리가 '2'에서 '3'으로 바뀌었을 때 느꼈던 불안, 어머니가 내 나이 때 아이가 둘이었다고 생각할 때 느끼는 죄책감이다. 그런 압박을 느끼면 내 마음 한 구석에서는 몇 살 때까지는 정착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길 원한다. 그게 내 힘든 감정에 대한 대처법인 ‘내 불안과 수치를 잘 의식하고, 사회적으로 구성된 그것의 기원을 되새기고, 그게 지나가게 하기’보다 더 생산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이미 아는 걸 모른 척 할 수는 없다. 연애를 하고 싶은 내 욕구는 이제는 ‘필요’에 의한 게 아니고, 사랑이 가득한 30세 여성으로서, 인식적, 감정적으로 연애를 하고 싶은 여성으로서 그 사실은 굉장히 불만스럽다. 나는 일을 잘 미루는 고기능 타입이다. ‘필요’가 있어야 행동을 할 수 있다. 필요가 없어서 나는 제단에서 나를 만날 유니콘을 기다리고 있다. 이런 극단적인 ‘정착하지 않음’은 아이를 갖는 것에 대한 나의 양가감정 때문에 더 심해진다. (대부분의) 사회적 압박과 스스로에 대한 증오에서 해방된 나는 적어도 내 ‘아기 시계’로 인해 ‘내 아이들의 아버지’를 찾는 것을 우선시할 수는 있다. 그러나 내 ‘시계’는 고장난 것 같다.

나는 두 아이와 커다란 집을 갖기를 원하길 원하기 때문에 좌절스럽다. 결혼을 원하길 원하기 때문에 좌절스럽다. 그런 것들을 원하면 내겐 없는 긴박함이 생길 것 같다. 그리고 게으른 일요일을 함께 보낼 사람은 정말 원한다. 휴가 때 브리티시 컬럼비아로 데려가서 함께 부두에 누워 유성우를 보고 무한함을 이해해 보려 애쓸 사람을 원한다. 다시 사랑에 빠지고 싶다. 20대 초반의 어디에도 비할 데 없는 마법 같은 감정을 갖고 싶다. 내가 전통적인 삶에 가치를 두었다면 무언가에 헌신하려고 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나 혼자 보내는 ‘쿨’한 시간의 상당 부분은 내가 처한 갈등 상황을 개념화하며 보낸다. 심리 세라피스트로서 나는 심리학적인 ‘의학도 신드롬’을 겪는다. 치료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내 독립성에 진단을 내리는 것이다. 대수롭지 않은 진단부터 병적인 진단까지 다양하다. 회피성 인격 장애. 감정적 부재. 자기애 인격 장애. 이기적. 헌신 공포. 내가 옹호하곤 하는 취약성에 대한 공포. 낮은 자존감. 과도한 자존감. 완벽주의. 어린 시절의 일관되지 않은 정서적 지지에서 비롯된 불안 양가적 애착 유형. 버려짐 문제. 아버지 문제. 자존감 문제. 어쩌면 내가 불교 관련 서적을 너무 많이 읽고 ‘마음 두지 않기’를 너무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는지도 모란다. 아니면 그냥 내가 너무 까다로운 걸 수도 있다.

그 경험들이 내게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주었나 겁이 나서 2011년과 2012년의 이별을 생각해 본다. 내가 우울증에 빠져 있을 때 나를 찬, 내가 너무나 사랑했던 남성. 18개월 뒤에 내가 반한, 아직 남은 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나중에 알고 봤더니 우리가 만나는 기간 내내 다른 여성과 장거리 연애 중이었던 남성. 이 배신들이 나를 ‘질리게’ 만든 걸까. 30세 이상의 싱글 여성들은 정말 많다. 나는 질린다는 단어를 그들에게 쓸 때면 주저하게 된다. 우리 부모님이 여러 번 이혼해서 내가 진정하고 지속되는 사랑을 믿지 않게 된 것인가, 혹은 내가 보았던 관계에서의 행동 때문에 감정적으로 잘 맞는 파트너에게 끌리지 않게 된 것인가 생각해 본다. 감정이입을 못하는 운동 선수 같은 타입에게 내가 끌리는 것이 보호적, 회피적, 혹은 내가 어렸을 때 경험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아버지로부터의 인정을 구하려는 헛된 시도일까. 내가 매일 밤 가족들과 저녁 식사를 하며 자랐다면 나는 그걸 재현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내가 스스로에게 진단 내리는 저런 병들에 걸리지 않았다는 걸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다. 내가 다른 인간처럼 로맨틱한 사랑을 갈망한다는 걸 인식하고 있다. 내 ‘진단’은 (‘가엾은, 절박한, 상처 받은’) 싱글 여성에 대한 사회의 혐오를 반영한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내 ‘해방적인’ 자각이 관계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에는 의문이 든다. 자신에 대한 공감을 전도하는 내가 나의 자아 수용에 화가 날 때도 있다. 내가 스스로를 더 비판적으로 대했다면 일요일 아침을 함께 보낼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케네스 거겐의 ‘사회 구성으로의 초대 An Invitation to Social Construction’를 읽지 않았다면 내 삶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나는 잠시 외롭거나 심심할 때, 혹은 뒤처지는 게 두려울 때 별 생각없이 틴더를 보다가 전체감이 돌아오면 답을 하기가 싫어진다. 만약 내가 사회 규범에 의문을 품는 것을 지지하지 않았다면 나는 틴더 메시지에 답을 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일과 우정에서 목적 의식을 느끼지 못했다면 나는 아내가 되고 어머니가 되는 것에서 의미를 찾으려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렇지 않다. 이 사실은 내게 힘을 주는 동시에 두렵게 한다.

나는 연애를 하고 싶으니까.

하고 싶어하는 것만으로 괜찮은 게 아닐까.

*허프포스트US의 I’m 30, Single And Happy. And Truthfully, That Scares Me를 편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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