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여자친구는 결혼해도 아이를 낳지 않기로 했다

누군가는 (출산을 거부하는) 여자친구를 잘 다독여 리드하는 게 남자의 역할이라고 내게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게 무슨 '강아지 똥' 같은 소리일까.

“결혼하면 아이를 가질 생각이야?”

나는 결혼을 앞두고 청첩장을 건네는 친구들에게 꼭 질문을 던진다. 그건 굳이 친구의 성별을 가리지 않는다. 그런데 특히 남자인 친구들은 하나같이 무척이나 당혹스럽다는 듯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마치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같은 질문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선택할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선택을 강요하는 나의 짓궂음에 동성 친구들은 “당연한 거 아니야”라는 정해진 답을 머쓱한 웃음과 함께 펼쳐놓는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한번도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들에게 그건 나이라는 숫자가 점점 커짐에 따라 해야만 하거나 마땅히 주어지는 당연한 일인 것처럼 보였다. 서른살쯤 되면 결혼을 하고 또 몇년쯤 뒤에는 당연히 아이를 갖게 될 거라는 거. 그건 딱히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정해진 길인 양 벗어날 수 없는 ‘법칙’ 같은 거였다.

아주 어릴 적, 어느 시점까지는 나도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의문이 들었다. 결혼을 하는 것도 아이를 갖는 것도 결코 당연히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깨달으면서부터다. 그러고는 뭔가 정해진 순서인 것처럼 떠밀리듯 흘러가는 내 삶에 대해 계속해서 되새김질을 했다. 그러다가 결혼은 몰라도, 아이를 갖는 건 어렵겠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아주 논리적이고 그럴듯한 사고의 과정을 거쳐 도달한 합리적 결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계속해서 떠올리고 생각하다 보니 어느새 나만의 목적지에 다다른 것이다.

여친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나는 7년째 연애 중이다. ‘결혼’도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이 연애에 결혼이란 단어를 어색하게 연결시켰던 것은 아니다. 이전에 연애를 하면서도 결혼을 함께 떠올린 적이 없었다. 거창하게 비혼주의자라고 할 것까지는 아니었지만 연애와 결혼이 반드시 같이 이어지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확실히 있었다. 그런데 지금 여자친구를 만나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면서 결혼이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연결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스스로 결혼이라는 것을 선택했다. 물론, 상대방의 의사를 확인하는 과정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였다.

우리는 둘 다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다. 여자친구의 의사가 조금 더 확고하다. 내가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함과 여자친구의 건강에 대한 염려 때문이라면, 여자친구는 확신에 찬 거부감에 가까운 감정이다. 자신이 자라며 지켜본 어머니와 여성의 삶이 무언가 잘못됐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결혼과 출산에 대한 공포와 거부감이 존재했다. 그 어려운 것들을 해낸 우리 부모님들에 대한 존경심은 별개의 문제였다.

누군가는 그런 여성의 감정을 잘 다독여 리드하는 게 남자의 역할이라고 내게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때마다 무슨 ‘강아지 똥’ 같은 소리일까 생각하며 이번엔 어떤 신박한 욕을 꺼내볼까 고민하게 된다. 나는 그냥 여자친구의 그 공포와 거부감을 존중한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 끝에 다다른 우리의 결론 또한 동일하다.

문제는 어른들과의 대화에서였다. 한번은 여자친구의 가족들과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가 있었다. 여자친구의 아버지는 언젠가부터 은근히 결혼을 원하는 눈치였다. 그날은 취기를 빌린 탓인지 “빨리 결혼을 해야 아이를 갖지”라며 한발 더 나가셨다. 일순간 도망치고 싶은 정적이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여자친구는 곧장 “결혼은 몰라도 아이는 갖지 않을 생각이야”라고 받아쳤다. 여자친구 아버지의 눈빛이 만화 영화처럼 과하게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아마 여자친구의 그런 생각을 그 자리에서 처음 들으시는 것 같았다. 동시에 여자친구의 어머니는 모든 걸 알고 있었던 것처럼 드디어 올 게 왔다는 듯 고개를 떨어뜨렸다.

곧장 내 차례가 이어졌다. 여자친구의 아버지는 그래도 ‘너는 제대로 생각이 박힌 녀석이겠지’ 하는 기대감으로 서둘러 나를 찾았다. 그리고 아이에 대한 나의 생각을 똑같이 물었다. 그러나 나는 그 급박한 구조 신호를 매몰차게 외면하며 “저 또한 생각이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여자친구의 아버지는 술 한잔을 급하게 들이켠 뒤 이루 표현할 수 없는 쓸쓸함과 당혹함을 온몸에 풍기며 곧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여자친구의 어머니는 그냥 센스 있게 말이라도 갖겠다고 하면 될 것이지 지나치게 솔직했다며 멋쩍어했다.

그게 과연 센스의 문제였을까. 정말 그 자리에서 부모님께 막연한 기대감과 희망을 드리는 게 옳은 선택이었을까. 하지만 마치 불효를 저지른 듯 묘한 찝찝함과 불편함이 내내 이어진 게 사실이었다. 유일하게 여자친구만이 알 수 없는 만족감을 표정에서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너 같은 남자는 왜 없는 걸까?

내 주변의 경우를 살펴보면 대개 출산에 대한 고민에 남성들이 더 둔감했다. 설마 애를 낳는 건 결국 자신이 아니라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는 아니겠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만약 특별한 이유가 있으면 대화라도 해볼 텐데 그냥 너무나도 당연한 거 아니냐는 식으로만 대화가 이어진다면, 상대방 입장에서는 큰 벽을 맞닥뜨린 느낌일 것 같다.

반면에 여성들에게 출산의 문제는 조금 더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자신들의 문제다. 그런 고민의 지점에서 망설임과 두려움을 가진 여자 사람 친구들은 “너 같은 남자가 왜 주변에 없는 걸까”라는 한탄을 하기도 한다. 그건 나에 대한 호감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출산이 망설여지긴 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마음껏 주장할 만한 마땅한 구실을 찾지 못한 아쉬움에 가깝다. 그래서 얼핏 들으면 칭찬처럼 들리지만 번번이 그건 내게 꽤 큰 씁쓸함을 남긴다. 출산의 문제를 여성이 더 큰 책임인 것처럼 고민하는 그들의 모습, 그리고 결국은 그들 또한 당연히 하나쯤은 낳는 게 안정적인 선택일 거라는 못내 아쉬움이 느껴지는 결과 때문이다.

당연히 나도 정답은 모른다. 다만 출산이 옳은 거고, 출산을 하지 않는 것이 옳지 않다는 식의 흑백논리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나는 여전히 아이를 갖지 않을 생각이다. 이건 누가 뭐라 한다고 해서 바뀔 수 있는 문제가 절대 아니다. ‘설득’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을 수 있을까. 출산은 개개인 각자가, 그리고 남성과 여성이 함께 고민한 끝에 내린 의미 있는 결론이어야 한다. 어느 순간 생각이 바뀔 수도 있고 가까운 미래에 후회가 찾아올 수도 있다. 그런 순간이 찾아와도 나는 얼마든지 고민해서 여자친구와 함께 우리에게 맞는 결론을 다시 찾아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