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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이라곤 1g도 없는 가짜 반성문: 대법원 양형 기준에는 '진지한 반성'이 감형 요소로 떡하니 적혀있다(ft. 대필업체)

진지한 반성을 하든 말든.

조주빈.
조주빈. ⓒ뉴스1

″손석희 JTBC 사장님, 윤장현 광주 시장님, 김웅 기자님을 비롯해 저에게 피해를 입은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멈출 수 없었던 악마의 삶을 멈춰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성범죄자 최초로 신상 공개가 결정된 조주빈이 언론 앞에 처음으로 얼굴을 드러내고 한 사과다. 미안한 기색은커녕 어찌나 당당한지, 유명인사 이름을 나열하며 허세를 부리는 성착취범에게 온 국민이 분노했다. 이 범죄자는 정작 사과를 해야 할 진짜 피해자들에게는 침묵했다. 사과할 생각이 없냐고 묻자 조주빈은 입을 꾹 다물었고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었다.

조주빈.
조주빈. ⓒ뉴스1

기세등등했던 조주빈이 납작 업드려 사죄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조주빈은 지난 2020년 5월부터 10월까지, 약 5개월 동안 112편의 반성문을 재판부에 제출했다. 호소문도 17편이나 썼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조주빈은 수없이 ″반성한다”라고 말했는데, 그 사과가 피해자를 향하진 않았다. 재판부 제출용이었다. 

n번방 성 착취에 대한 강력처벌을 촉구하는 시위가 열렸다. 2020.3.25
n번방 성 착취에 대한 강력처벌을 촉구하는 시위가 열렸다. 2020.3.25 ⓒ뉴스1

N번방 피해자 공동대리인 조은호 변호사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조주빈의 반성문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솔직히 저는 조씨가 작성한 게 반성문이라고 생각 안 한다. 반성문의 전제는 본인이 무얼 잘못했는지 인정하는데서 시작되어야 하는데, 조씨의 반성문은 자신의 범행과 책임을 부인하고 있었다. 일반인의 상식으로 생각해도 반성하겠다면서 어떻게 본인 범행에 대한 선처해달라는 말이 곧장 같이 나올 수 있겠는가?”

반성 없는 반성문을 써대는 건 조주빈만이 아니다. 수많은 범죄자들이 재판부에 반성문을 제출하고 있다. 재판에서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형법 제53조에서는 참작할 만한 사유가 있는 경우 법관이 형을 감경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대법원 양형기준에는 범죄별로 감형할 수 있는 요소가 적혔는데, 여기에는 ‘진지한 반성’도 포함된다. 이런 이유로 피고인들은 진지한 반성을 하고 있다고 판사에게 보여주기 위해 반성과 사죄를 쥐어 짜내어 가짜 반성문을 쓴다. 판사 입장에서는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 반성문을 반성으로 보는 셈이다.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는 정인이.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는 정인이. ⓒ뉴스1

그렇게 쓴 반성문의 효과는 대단했다. 지난 2020년 대한민국을 충격에 빠트렸던 ‘정인이 사건’ 피의자 양모 장모씨는 반성문 덕을 톡톡히 봤다. 생후 16개월 아기를 상습적으로 폭행하고 학대한 혐의로 재판 받았던 장씨는 1심에서 무기징역을 받았지만, 2심에서는 반성한다는 이유로 징역 35년으로 감형됐다. 장씨는 정인이가 아닌 어린이집, 남편 등에 사과하는 내용으로 반성문을 써 재판부에 수차례 제출했다. 

승리.
승리. ⓒ뉴스1

성매매 알선 등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빅뱅 출신 가수 승리도 ‘진지한 반성’ 수혜를 입었다.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던 승리는 혐의를 인정하고 반성한다는 이유로 2심에서 형량이 절반으로 줄어 징역 1년6개월이 됐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전체 성범죄자 피고인 중 70.9%가 ‘진지한 반성’을 이유로 감형받았다. 

'반성문' 검색 결과.
'반성문' 검색 결과. ⓒ네이버

오직 감형을 위해 반성문을 필요로 하는 이들이 생겨나면서, 반성문을 대신 써주는 사람까지 등장했고 업체는 문전성시다. 포털 사이트 네이버에서 ‘반성문‘을 검색하면 ‘반성문 대필’이 연관 검색어로 뜬다. 검색 결과는 더욱 놀랍다. 반성문 대필 업체들은 홈페이지에 ”저렴한 가격보다는 경험을 참고하라”라고 강조하면서 반성문 샘플까지 친절히 걸어두었다. 보통 5만원선이었다. 

'경험이 실력'이라고 홍보하는 반성문 대필 업체.
"경험이 실력"이라고 홍보하는 반성문 대필 업체. ⓒ반성문 대필 업체 홈페이지

지난 27일 방송된 tvN ‘알쓸범잡2’에서는 반성문 대필 업체의 실태를 다뤘는데, 제작진이 업체에 직접 의뢰해서 받아낸 반성문은 피해자 아닌 판사에게 사과하기 바빴다. 8만원을 주고 산 법률 전문가표 반성문은 ”존경하는 판사님께, 먼저 판사님께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드리고 싶습니다”라고 시작했다. 

박지선 교수.
박지선 교수. ⓒtvN

박지선 숙명여자대학교 사회심리학과 교수는 반성문 내용에 주목했다. 박 교수는 반성문 대필 업체가 의뢰인이 말하지도 않은 구체적인 상황 묘사까지 더해 말 그대로 소설을 써내려가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5만원에 양심을 판 거다”라고 일갈했다.

다행히 ‘반성 없는 반성문’을 근절하기 위한 법 개정 움직임이 시작됐다. 검사 출신 송기헌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달 형사재판 양형에 피해자 의견 진술권을 보장해야 하는 내용을 담아 형법 개정안과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송 의원은 ”재판 편의적·가해자 중심적인 양형 조건으로 피해자는 두 번 울 수밖에 없다. 피해자 보호 관점의 양형기준 마련을 통해 피해자의 눈물을 닦아줘야 한다”라고 설명했다.

 

도혜민 기자: hyemin.do@huffpos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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