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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다니엘 블레이크'와 시간강사의 개강기

ⓒhuffpost

대학구성원들에게 3월은 무엇보다 개강을 뜻한다. ‘학교’라는 공간이 얼마나 불균등한 구성원들의 집합공간인지가 드러나는 시기도 개강 즈음이다. 언젠가부터 매학기 초마다 전업시간강사인지를 묻는 설문을 실시한다. 누군가 통계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몇년째 후속조치는 없다. 대학 시간강사는 수강신청 정정기간이 완료되는 3월 중순이 되어서 설강이 확정되면 조교를 통해 갑과 을이 한장씩 갖는 A4 한장짜리 계약서에 서명을 한다. 통상 6월 둘째주에 학기가 종료되므로, 3월부터 6월 중순까지 15주간 대학 시간강사는 계약직 노동자가 된다. 그리고 학기가 끝나면 채점과 성적입력 등의 학기말 절차를 수행하는 6월 말까지 무임금으로 학사 업무에 종사한다. 평소에도 지정된 시간당 임금 이외에 강의준비에 드는 시간은 고려되지 않는다.

ⓒBrianAJackson via Getty Images

구성원이되 구성원이 아닌

이런 사정이 공공연히 알려진 것도 오래다. 불과 한달 전에도 『교수신문』에 ‘희대의 악법’이라는 시간강사법의 유예를 둘러싸고 정규직 교수와 비정규직 교수 간의 차별 및 시간강사라는 예외적 사안을 다룬 글(박중렬 「“비정규교수에게 대학은 암흑지대”」 2월26일)이 실렸다. 행정주체들이 표한다는 난색은 비단 해답이 없어서만은 아닐 거라는 의심을 보태본다. 따라서 최근의 풍경을 덧붙이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강사실의 열악함이나 연구공간의 부재, 심지어 신분 때문에 학술논문 사이트에 접속할 수 없는 불편부당함은 하루이틀 일이 아니지만 최근에는 정말이지 복사와 출력마저 인색해지고 있다. 안내 데스크로 가로막힌 행정실에서도 복사를 해주지 않아서 학생들에게 줄 수업자료를 학내 복사실에서 사비로 감당해야 하는 학교가 이번 학기에는 두군데나 있다! 시간강사의 마음은 그렇다 치고, 학교는 어떤 마음으로 시간강사를 대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 커피까지 내려주는, 누구에게나 권하고 싶은 모 여대의 안락한 강사실도 있기는 한데, 그 경우는 공간에 상주하는 친절한 조교가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사람을 쓰지 않고 돈을 쓰지 않겠다는 의지에서 차가운 틈이 벌어지는 게 보인다.

내가 애용하는 글쓰기 교재인 『논증의 탄생』(원제는 The Craft of Argument)에는, ‘학교는 학생을 고객으로 대해야 한다’라는 주제로 칼럼을 쓰려고 하는 대학 신입생 슈와 그의 고교 동창인 라지가 토론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슈는 강의담당 교수와 상담을 하고 싶어도 교수를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경험에서 등록금을 지불한 자신이 대학의 고객으로서 충분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점을 설파하고, 라지는 학생이 고객일 수 있다는 점에 동의하지 못한다. 수업에서 이 부분을 읽은 학생들은, 행정서비스라는 점에서는 학교가 학생을 고객으로 대해야 하지만 요즘은 오히려 학교가 노골적으로 학생을 고객으로 대하는 인상을 주는 경우가 많다면서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학생들은 최소한 ‘교육’이라는 틀로 교수와 학생 사이에 이루어지는 소통은 지불한 돈의 댓가를 초월한 다소 예외적이고 인간적인 가치의 산물이라고 이해하는 듯하다. 최소한 그 점을 ‘대학’을 구성하는 주체들이 가진 학문적 관계의 에토스로 이해하는 것이다. 대학교에서 최근 성적 부도덕과 부정부패를 몰아낸 학생들의 상상력은 아마도 이 에토스에서 출발한 것임에 틀림없다.

몸과 마음을 다치게 하는 차별이 엄연한 가운데서도 ‘대학’이 유지되는 것은 이런 무형의 구조 덕분인지도 모른다. 맥이 약해 뛰는지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지만, 공공재로서 학교교육을 받아들여 온 마음의 역사가 조금은 뒷받침하고 있다. 이에 비해 ‘대학’은 학생과 시간강사를 매개하는 용역업체로 군림하고 있지만, 실상은 학문의 상징가치를 가장 많이 수혜 받는 제도이자 공간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와 시간강사의 자존감

국회 앞에서 벌써 몇년째 천막농성을 벌이고 있는 60대 후반의 시간강사 부부는 여러차례의 인터뷰에서 쉽게 연대하지 못하는 시간강사들의 처지를 감싸는 발언을 반복했다. 이들의 연세를 고려할 때, 자신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학문후속세대’를 위해서 투쟁을 대신 벌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몇해 전 어느날 우연히 모 일간신문 인터넷판에 기고된 유명 칼럼니스트의 글 아래에 이 부부 중 한분이 쓴 댓글을 발견한 적이 있다. “○○ 선생님, 글 좀 써주세요. 시간강사 한분이 또 자살하셨어요.” 내가 본 가장 슬픈 글쓰기 청탁이었다. 직접 만나 뵌 적은 없지만, 이후에 그분들을 잊은 적이 없다.

켄 로치(Ken Loach) 감독에게 깐느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안긴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I, Daniel Blake, 2016)는 제도가 꺾어놓은 존엄성 훼손에도 시민적 자존감을 굳건히 지키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선의로 연대를 꾀하는 마음에 대해 말하는 영화이다.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생활이 무너질 대로 무너진다 해도 한 평범한 시민으로서 평생을 살아온 감성과 윤리란 쉽게 무너지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학문적인 정체성을 형성해 온 시간강사의 내면이 비춰지는 대목은 바로 이 부분이다.

제도는 한 인간이 지니는 존엄에 관계한다. 제도를 둘러싸고 몸과 마음의 투쟁이 일어나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다. 문제는, 제도가 관계된 사람들만의 사안으로 인식되면 몸이 아니라 마음만의 문제로 개인화된다는 점이다. 복지행정 절차를 담당하는 하급관리들이 실업상태의 구직자들을 곧 무슨 문제라도 일으킬 것처럼 경계하는 시선과, 이들의 차가운 시선을 관찰하듯 바라보는 다니엘의 시선은 영화 내내 경합한다. 그 사이에서 증폭하는 다니엘의 동공에 마음을 투사해본다. 다니엘이 케이티 가족에게 베푸는 덕은 시민의 에토스로 연대할 수 있는 선한 본성이 사회를 구성한다는 점을 증명함으로써, 타인의 가난과 실업에 애초부터 오불관언이었던 그들이 여지없이 틀렸다는 점을 보여준다. 대학제도와 행정을 담당하는 사람들도 예외일 수 없다. ‘대학개혁’의 풍조가 발생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에서 기초학문이나 다양한 사상과 연구가 발생할 수 있을까? 연구소도 하나 없는 단과대학은 대학으로서의 기능을 담당하는 제도로 볼 수 있을까? 대저, ‘대학’은 이래도 괜찮은 걸까?

*창비주간논평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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