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
2018년 04월 29일 17시 45분 KST

대한항공 ‘직원 단톡방’ 분석하니…그들의 외침은 언론과 달랐다

“회사의 존폐가 갈릴 정도로 정비본부 쪽에는 정말 문제가 많다."

한겨레21

“사우님들 어서 오시고요. 사축(회사의 가축)이나 노무·노조 관계자들은 나가주세요.”

4월18일 정오쯤 카카오톡에 ‘대한항공 갑질·불법·비리 제보방’이 열렸다. 제보방을 개설한 관리자는 “앞에 직종을 붙이고 대화명을 세 글자로 해달라”며 “현재 기자분들이 있으니 제보할 것이 있으면 말하고, 민감한 자료는 텔레그램을 통해 보내달라”고 자신의 텔레그램 아이디(edcrfvk)를 공개했다. 3대를 이어온 한진그룹 재벌 경영에 짓눌렸던 ‘을의 반격’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제보방 참가 인원은 빠르게 늘어 4월28일 현재 1800여 명이 참가하고 있다. 대한항공 전 직원의 10%에 해당하는 수다. 첫 번째 제보방이 정원(1천 명)을 꽉 채워 두 번째 방이 개설된 상태다.

‘한겨레21’은 제보방 개설 시점부터 4월25일까지 올라온 글에 포함된 15만여 개 단어를 분석했다. 채팅 내용을 사용된 단어의 빈도에 따라 크기를 다르게 표현하는 ‘워드 클라우드’(word cloud) 방식으로 시각화했다. 분석을 위해 통계 프로그램 ‘R’를 활용했고, 한국어 형태소 분석 패키지(KoNLP)를 썼다. 그래픽 구현에는 태블로(Tableau)를 사용했다.

한겨레21/그래픽 장은영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일가. 왼쪽부터 첫째 조현아 칼호텔네트워크 사장, 셋째 조현민 대한항공 전무, 부인 이명희 일우재단 이사장, 조 회장, 둘째 조원태 대한항공 사장.

 

■ 아무도 믿을 수 없다. 누군지 모르는 ‘관리자’ 말고는…

조현민(35) 전 대한항공 전무가 광고업체와의 임직원 회의에서 ‘물세례 갑질’을 한 사실이 알려지고, 사건 당시 고성과 욕설이 담긴 음성이 보도되면서 대한항공 구성원들의 울분이 다시 끓어올랐다.

조 전 전무가 업무에서 배제되고 서울 강서경찰서가 수사에 착수한 4월17일, 몇 명의 기자가 ‘관리자’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그는 기자들을 한자리에 불러 자신이 대한항공 직원임을 인증하고, 언론 보도의 자료가 될 수 있는 제보를 모으는 대화방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관리자는 제보를 전달할 기자를 6명으로 제한했는데, 모든 언론사를 신뢰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대한항공 직원들이 총수 일가의 갑질·불법·비리를 용기 있게 제보하지 못하는 이유가 친기업 언론에 제보자의 신분이 노출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라고 봤다.

관리자는 카카오톡에서 링크를 통해 입장하면 익명으로 채팅을 할 수 있는 ‘오픈채팅방’을 개설했다. 직원들은 여기서 자유롭게 토론하되, 제보는 관리자에게 ‘텔레그램’으로 전달하도록 했다. 관리자는 이렇게 받은 제보를 폐쇄적으로 운영되는 텔레그램 방에서 소수의 기자들과 공유했다. 최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유행하는 ‘대나무숲’과 비슷한 운영 방식이다. 대나무숲에선 운영자가 전자우편으로 사연을 받은 뒤 운영자의 이름으로 게시판에 올려 익명성을 보장하고 있다.

관리자의 생각처럼 신분 노출에 대한 대한항공 직원들의 불안감은 컸다. 제보방에서 대화하면서도 회사가 자신들의 대화를 엿본다고 의심했다. 자신이 회사를 비판하는 것이 알려지면 인사상 불이익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다. “회사 컴퓨터에서 대화를 하면 걸릴까요”라거나 “회사 가상사설망(VPN)을 이용해도 괜찮을까요”라며 대화 자체를 조심스러워했다. 전산팀 직원이 “대화를 엿볼 수 없다”고 확인해주자 그제야 안심하며 진짜 하고 싶은 말을 쏟아냈다.

한 대한항공 직원은 “아무도 믿을 수 없다. 누군지 모르는 관리자님만 믿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제보방에서 ‘리자님’(관리자님)이라 부르는 그가 누구인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관리자는 공론장을 운영해본 적 없는 평범한 대한항공 직원으로 추정된다. 그는 제보방을 개설한 지 하루 만에 “이런 일을 해본 것이 처음이라 경험도 부족하고 리더십이 떨어진다”며 어떻게 하면 좋을지 직원들의 의견을 묻기도 했다. 관리자는 4월25일 JTBC 인터뷰에서 “조현민의 녹취 파일을 최초 공개한 직원을 혼자 싸우게 놓아둘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제보방을 개설하고 행동에 나선 이유를 밝혔다.

한겨레/백소아 기자
이정미 정의당 대표와 ‘땅콩회항’ 피해자인 박창진 전 대한항공 사무장 등이 25일 오전 서울 강서구 대한항공 본사 앞에서 열린 정의당 정당 연설회에서 발언을 마친 뒤 대한항공의 황제경영과 갑질경영을 규탄하며 손팻말에 물을 붓는 행위극을 하고 있다.

 

■ 제보방에 쏟아진 15만여개의 상처들

제보방 단어 분석 결과, 대한항공 내에 갑질(461번 언급)·불법(354번)·비리(492번)를 언론에 제보하기 위해 개설된 대화방인 만큼 ‘제보’ 언급이 1528번으로 가장 많았다.

다음으로는 ‘직원’(1109번)이 많이 언급됐는데, 주로 총수 일가의 갑질 경영에 상처받은 직원들의 슬픔과 악화되는 근무환경을 지적할 때였다. 세 번째로 많이 언급된 단어는 ‘노조’(974번)였다. 현재의 노조가 회사 쪽과 유착해 제구실을 다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많았다.

네 번째로 ‘기자’(860번)가 많이 언급됐다. 제보받을 기자를 찾기 위해 주로 언급했는데 직원들의 공분을 사는 기사를 쓴 기자를 비판한 글도 있다. 조현민 전 전무의 폭언 녹취 파일 보도와 관련해 4월16일 한 경제지에 “공개되지 않은 타인 간의 대화를 녹음·청취해선 안 된다”는 통신비밀보호법을 근거로 들어 처벌이 불가피하다는 기사를 쓴 기자가 대표적이다.

대한항공 갑질·불법·비리 제보방은 대한항공(610번) 관련 언론 보도를 주도했다. 조 회장 일가가 정상적으로 세관(230번)을 거치지 않고 외국에서 물건(98번)을 들여왔다는 구체적인 증거(257번)가 제보방에서 나왔다. 이명희(149번) 일우재단 이사장의 갑질 영상, 기내면세품(62번) 판매 수익 편취에 대한 증언도 제보방에서 시작됐다.

언론은 불법성이 인정되는 폭언(102번), 탈세, 횡령 등의 혐의 사실을 집중적으로 보도했지만 대한항공 직원들이 외치고 싶었던 건 그 이상이었다. 비용 절감이라는 명목 아래 줄어드는 객실(663번) 승무원(628번) 수, 높아지는 업무 강도, 열악한 근무(222번) 환경은 직원들의 삶의 질과 직결된 문제였다.

객실 승무원이라고 밝힌 ‘이쁘니’(대화명)는 “인력부족(19번)을 이야기하면서 공상(업무 중 부상)도 팀 고과에 반영하겠다고 한다. 일하면서 다친 것을 고과에 반영하겠다는 건 너무하다”며 불만을 쏟아냈다. 정비(366번)본부에 근무하는 ‘노가다’는 “다치거나 아파도 산재(27번) 처리를 절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병가(67번)를 쓰기 전에 연차를 다 소진하라고 한다”고 토로했다. 대한항공은 직원들의 불만이 쏟아지자, 5월1일로 예정된 객실 승무원 기내 탑승 인원 축소 방안을 ‘보류’했다.

불완전한 정비로 위협받는 승객의 안전 우려도 이어졌다. 정비 업무를 하는 ‘마루치’는 “회사의 존폐가 갈릴 정도로 정비본부 쪽에는 정말 문제가 많다. 양심고백을 하고 싶지만 아직까지는 용기가 부족한 것 같아 혼란스럽다”고 불안해했다.

객실 승무원 ‘웨이컵’은 “비행할 때마다 내가 타는 이 비행이 마지막이 되면 어쩌나 너무 불안하다. 비용을 줄일 걸 줄여야지 비행기 사고가 날까 무섭다”고 했다. 정비 분야 부조리는 심각한 문제라고 직원들이 입을 모았지만 결정적 제보가 나오지 않아 언론의 조명을 받지는 못했다.

대한항공 직원들은 카톡방에서 조 회장 일가의 갑질 경영에 시달렸던 저마다의 경험을 쏟아내며 공감하고, 서로를 보듬었다.

한겨레
이명희 일우재단 이사장으로 추정되는 여성이 2014년 5월 한진그룹 계열사인 인천 그랜드하얏트호텔 신축 조경 공사장에 찾아와 (왼쪽) 현장 직원의 팔을 붙잡고 끌어당기고, (가운데) 직원하게 삿대질을 하고 있다. (오른쪽) 또 손에 들고 있던 도면을 빼앗아 바닥에 던지고 있다. 영상 화면 갈무리

 

■ 노조 집회는 참여거부, 제보방에서 타오른 촛불

‘조 회장 일가 모두 퇴진, 전문경영인 체제로 이행’.

여론 악화에 부담을 느낀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은 4월22일 조현아·조현민 두 딸을 한진그룹의 모든 직책에서 손 떼게 하겠다고 발표했다. 대신 전문경영인 부회장직을 신설해 석태수 한진칼 대표이사를 선임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제보방에 들어온 대한항공 직원들이 10여 일간의 대화(157번)에서 제시한 ‘갑질 대책’은 회사 쪽 대책보다 진일보한 게 많았다. 이들은 ‘을의 반격’이라는 구호 아래 촛불(97번) 집회(533번) 개최 등 집단행동을 계획하고 있다. 관리자는 4월26일 “집회를 이끌어줄 사람을 찾았다. 조 회장 일가가 퇴진(134번)하는 그날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촛불집회를) 계속할 것이다. 집회 세부 내용에 대해 직원분들의 의견을 반영하고 싶으니 좋은 아이디어를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현재는 우선적으로 5월1일 조현민 전 전무가 강서경찰서에 출석하는 날 경찰서 앞 집회를 계획하고 있다. 직원들의 집단행동은 그 후에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대한항공 3개 노동조합(대한항공노동조합·조종사노동조합·조종사새노동조합)은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 4월27일 오후 12시10분 김포공항 대한항공 본사 건너편에서 집회를 계획했다가 직원들의 빈축만 샀다. 대화명 ‘바꾸자’는 “대한항공은 직원의 권리를 찾으려던 노조원들을 무력화시키고, 사측 입장을 대변하는 노조 세력으로 대체했다. 회사가 현재의 모습이 된 데 기여한 어용노조”라며 집회 참여거부(113번) 의사를 밝혔다.

집회에 대한 직원들의 여론이 악화되자 조종사새노동조합은 “재벌갑질 오너경영, 대한항공 무너진다. 오너갑질 재발방지, 서면으로 약속하라”였던 구호를 “오너일가 지금당장 경영일선 물러나라. 총수일가 물러나면 대한항공 영원하다”로 바꿀 것을 요구하며 집회 불참을 선언했다.

이병훈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갑질 경영에 분노한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기업의 소유와 거버넌스 변화를 주장했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될 때까지 경영자의 횡포로부터 직원들의 권익을 보호하지 못한 노조도 큰 문제다. 노조 집행부를 바꾸거나 노조 운영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2014년 12월에도 조현아(44) 전 대한항공 부사장의 이른바 ‘땅콩 회항’ 사건으로 조양호 회장 일가의 갑질 경영이 도마 위에 올랐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지난해 대법원은 조 전 부사장에게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2년의 형을 확정했으나, 집행유예 기간이 채 끝나지 않은 3월29일 칼호텔네트워크 사장으로 경영에 복귀했다.

‘땅콩 회항’ 사건으로 회사생활이 되레 힘들어졌다는 지적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대한항공 관계자는 “‘땅콩 회항’ 이후 객실 승무원은 총수 일가의 적이 됐다. 객실 승무원과 관련해 고객의 소리가 올라오면 회장은 무더기로 징계하라고 했다”며 “이들은 당시 사건에 대해 ‘서비스 잘못된 걸 지적했을 뿐’이라고 생각하는 듯 보였다”고 말했다.

제보방 참여자들은 상황을 주시하거나 적극적으로 토론에 참여해 촛불집회를 기획하고 있지만, 현실은 엄혹하다는 평가도 많다. 여전히 조 회장의 퇴진은 ‘먼 길’이라는 것이다.

한겨레/그래픽 김승미

 

■ 을은 승리할 수 있을까

대한항공 직원 ㄱ씨는 “제보방에서 뭔가 큰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서로 불만만 털어놓는 것이 보기 싫어서 결국 카톡방을 나왔다. 카톡방 밖에서는 동기들하고도 관련 이야기를 잘 안 하는 분위기다. 조 회장이 물러나고 전문경영인이 들어오면 제일 좋겠지만 그럴 가능성이 크지 않아 무력감에 빠진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ㄴ씨도 “촛불집회가 의미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나갈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함께 연대해서 승리한 경험이 없다. 이번에 관세청 등의 수사로 구체적인 변화가 있지 않으면 바뀌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병훈 교수는 “조양호 회장이 물러날 만큼 상황이 진전돼 전문경영 체제로 간다면 역사적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번 일로 회장을 물러나게 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고 말했다.

일단 대한항공에서 조 회장이 물러난다면 이런 일이 사회 전반에 퍼져나갈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도 있다. 조돈문 가톨릭대 교수(사회학)는 “미투운동이 확산하듯 기업 조직 내 갑질을 고발하는 행위도 퍼져나갈 가능성이 있다. (대한항공 고발이) 사회운동으로 조직되고, 성공 가능성을 보여준다면 다른 기업으로 확산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