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트라이트
2019년 10월 31일 15시 19분 KST | 업데이트됨 2019년 11월 02일 10시 37분 KST

"남자는 우는 거 아니야" 어린이집 교사들에게 이 교육이 필요한 이유

Beyond Gender|한국 2 - 서울시여성가족재단의 영유아 교사 성평등 교육

*편집자 주: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배운 성별 고정관념이 훗날 성차별이나 여성혐오 인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들이 있습니다. 전문가들이 성평등 교육의 중요성에 주목하는 이유입니다. 허프포스트가 직접 다녀온 인도, 스웨덴, 호주의 성평등 교육 현장 이야기를 4주 동안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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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에 아름다운 공주가 있었다. 공주는 왕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돌발 상황이 벌어졌다. 무서운 용 한마리가 나타나 공주가 살던 성을 불태운 뒤, 왕자를 잡아 가버린 것이다.

공주는 왕자를 찾아 나서기로 했다. 하지만 예쁜 드레스는 몽땅 불타버린 상황. 폐허 위에서 종이 봉지 한장이 눈에 띄었다. 다행히 몸을 가리기 충분한 크기였다. 공주는 종이 봉지를 몸에 걸친 뒤 용을 찾아 나섰고, 우여곡절 끝에 용을 물리쳤다.

드디어 왕자를 발견한 공주. 그런데 기껏 구해줬더니 왕자는 공주의 외모를 지적했다.

″너 꼴이 엉망이구나! 진짜 공주처럼 챙겨입고 다시 와!”

왕자의 배은망덕한 행동에 크게 실망한 공주가 맞받아쳤다.

″그래 넌 옷도 멋지고 머리도 단정해. 하지만 넌 겉만 번지르르한 껍데기야!”

결국, 공주는 왕자와 결혼하지 않기로 했다. 

우리가 흔히 접하던 신데렐라, 백설공주 이야기와는 아주아주 다른 공주 이야기다. 특이해 보이는 이 동화책의 이름은 ‘종이 봉지 공주’(작가 로버트 먼치). 안데르센의 동화 ‘돼지치기 소년’을 페미니즘 시각에서 현대적으로 뒤집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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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주 강사 

22일 서울 마포구 소재 어린이집 3곳의 교사 25명이 참여한 ‘영유아 교사 젠더 감수성’ 교육은 이 동화책을 함께 읽는 것으로 시작됐다.

”혹시 이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나요?”

이현주 강사가 교사들에게 물었다. 단 한명만이 손을 든다. 대부분의 어린이집 교사들은 자신의 힘으로 역경을 헤쳐나가고 왕자를 구해준 뒤, 왕자와 결혼하지 않기로 ‘선택’한 종이 봉지 공주 이야기를 전혀 들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찾아가는 영유아 교사 젠더 감수성’ 교육은 서울시여성가족재단 보육서비스지원센터가 예비·현직 영유아 교사들을 대상으로 2017년 시범사업을 거쳐 진행하고 있는 교육이다. 이 같은 교육을 하는 이유는 아이가 성인지 감수성을 갖춘 사회구성원으로 성장하는 데 있어서 영유아 교사들이 끼치는 영향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많은 전문가들은 성역할 고정관념이 영유아기부터 형성되기 시작한다고 지적한다. 영유아기는 인간발달의 전 영역에서 일생 동안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치는 시기로, 이 시기 이뤄지는 성 정체성·성역할 등의 발달은 평생 지속적으로 아이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이 시기 아이들의 성역할 습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는 보호자와 교사 등 영유아를 둘러싼 ‘의미있는 타인‘(significant others)과 ‘물리적 환경’이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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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유아들이 성평등한 의식을 갖고 성장하도록 돕기 위해서는 아이들이 생활하는 환경을 구성하고 상호작용을 직접 주고받는 ‘주변 성인들’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2018년 기준으로 서울시에 거주하는 영유아 42만명 중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을 다닌 아이는 32만명에 달한다.

서울시여성가족재단 보육서비스지원센터가 서울시 보육교사를 대상으로 하는 역량 강화교육 콘텐츠에는 ‘젠더 감수성 교육‘이 포함되어 있다. 2015년부터 현재까지 교사 7,300여명(10월 기준)이 참여했다. 재단은 보육·유아교육 관련 학과, 어린이집, 유치원 등으로 ‘찾아가는 영유아 교사 젠더 감수성 교육’을 2017년 시범사업을 거쳐 올해도 진행하고 있는데 이 교육에는 10월 기준으로 1,200명의 교사가 참여했다.

교육에서는 젠더 감수성의 정의를 비롯해 교사들이 영유아에게 미치는 영향 등이 두루 다뤄진다. 교사들이 현장에서 곧바로 적용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실천 방안도 제안된다.      

예를 들어, ‘성별에 따라 색을 구분한 게시물·교구·장난감 등이 교실에 있는지’ ‘직업에서 성역할 고정관념을 갖게 만드는 자료가 교실에 있는지’ ‘성평등한 관점이 담긴 그림책이 충분히 마련돼 있는지’ ‘어머니 외 다른 가족 구성원들의 육아 참여를 충분히 격려하고 있는지’ 등 환경 전반을 교사가 다시 점검해 보게끔 한다. 또한 양육자를 ‘어머니’로 전제한 가정통신문도 어떻게 하면 성평등한 통신문으로 바꿀 수 있을지 개선 방안을 생각해 보게끔 한다. 

어릴수록 온몸으로 교사를 느낀다

김정원 한국성서대학교 영유아보육학과 교수는 ”영유아기 아이들은 초중고 때보다 교사의 영향력을 훨씬 많이 받는다”며 ”어릴수록 ‘온몸으로 교사를 느낀다’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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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어린이집에서 남자아이가 인형 놀이를 하고 있을 때 교사는 ‘남자는 그런 거 하는 거 아니야‘라고 굳이 말하지 않고 찡그린 표정으로 쳐다만 봐도 아이는 ‘선생님이 내가 이 놀이 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걸’ 눈치채고 놀이를 더이상 하지 않을 수 있다.

또,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은 여러 활동을 하는데 만약 교사가 ‘남자애들은 블록 쌓기를 좋아해’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면 자연스럽게 관련 놀이에 대한 기회가 더 제공된다. 사실 남아와 여아는 블록쌓기에서 유사한 수준이었음에도, 남아들은 관련 경험을 훨씬 많이 하게 되고 결국 여아보다 유능해지는 것이다. 블록 쌓기는 공간지각능력과 연결되는 놀이다. 모든 아이가 다양한 놀이를 할 수 있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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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를 처음으로 들은 교사들은 ”좀 충격이었다”는 반응이다.

12년차 어린이집 교사 A씨는 ”나도 모르게 ‘남자가 왜 이렇게 울어‘라고 말하고, ‘간호사 언니‘, ‘경찰관 아저씨’라고 무의식중에 표현해 왔음을 깨달았다”며 ”성평등 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아온 세대가 아니다 보니 교실 현장에서 놓치고 있었던 게 많았던 것 같다. 교육자로서 그동안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었던 반성의 시간이었다”고 했다. 

A씨는 ”안전교육은 교직원도 받아야 하고 아이들도 받아야 하지만 성평등 교육은 커리큘럼 자체가 없다”며 ”정보 자체도 부족하고, 교사가 그냥 알아서 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7년차 어린이집 교사인 B씨 역시 ”귀엽고 예쁜 스티커를 보면 ‘여자애들 갖다주면 좋아하겠다’는 생각을 했었다”며 ”스티커를 남자애들도 좋아할 수 있는데 무의식적으로 성별에 따라 다르게 대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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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교사 개인의 노력만으로 성평등한 환경이 곧바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교사 B씨는 ”교사가 노력해도 활동 자료에 이미 소방관은 ‘남성의 모습‘, 간호사는 ‘여성의 모습’으로 표현돼 있다”며 ”아무리 아이들에게 (누구나 다양한 직업을 가질 수 있다고) 설명을 해줘도 시각적인 자료가 이미 성차별적으로 표현돼 있기 때문에 이런 것들도 함께 개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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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주 강사는 ”한국의 영유아 성평등 교육은 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라며 ”그렇다 보니 ‘여자는 빨강‘, ‘남자는 파랑’ 정도만 바꾸면 된다고 단순하고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이들도 많이 만난다”고 전했다.

이현주 강사는 ”그러나 ‘그럼 남자가 빨강, 여자는 파랑‘이라고 어른들이 정해주는 것은 색깔만 바꾸는 것일 뿐 그게 젠더 감수성은 아니다”라며 ”특정 성별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색깔 중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걸 선택할 수 있도록 교사가 환경을 조성해줘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현주 강사는 ”강의를 한번 할 때 ‘한번의 교육‘이 아니라 ‘만번의 교육’이라고 생각한다”며 ”한명의 교사가 영향을 미칠 아이들의 숫자가 그만큼 많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젠더 감수성 키울 수 있는 ‘성평등한 어린이 책’ 리스트 보러 가기 (시민단체 씽투창작소·초록우산어린이재단·롯데·여성가족부 선정)

 

*비욘드 젠더 시리즈를 마칩니다.

 

[Beyond Gender Project] 

1편. 인도

‘여성에게 위험한 나라 1위’ 인도의 ‘페미니즘 학교’를 찾아갔다

18세에 억지로 결혼해야 했던 소녀는 ‘위대한 교육자’가 되었다(인터뷰)

”남자가 성평등 교육을 받는 이유는 ‘더 나은 남자의 삶’을 위해서다”

2편. 호주

”맞을만해서 때렸다”는 말에 호주는 이렇게 대처했다

- “여성을 일상적으로 비하하는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이 일어난다”

가부장적인 남성들과 가부장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법

”포르노가 성교육을 대신해서는 안 된다”

호주 학교들은 어린이들에게 ‘젠더 공교육’을 한다

조카에게 사주는 핑크색 머리띠가 왜 문제인 걸까?

3편. 스웨덴

’라떼파파’들은 아이 키우기를 피하지 않는다

“나는 여자 안 때린다”고 말하는 남자들 뿐이라면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 세계 최초로 ‘페미니스트 정부’ 표방한 나라의 장관이 한국인에게 전한 말

- 이 나라의 유치원에는 ‘남자아이’, ‘여자아이’가 없다 

4편. 한국

- ″유치원부터, 교대부터 바뀌어야 한다” 현직 초등교사들이 말하는 성평등 교육

- 영유아 교사들이 성평등 교육을 반드시 받아야 하는 이유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취재 지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