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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덕동 휘발유] 기안84를 죽어도 못 놓는 '나 혼자 산다', 남은 건 그의 성장기 뿐이다

기안84는 웹툰 여성 혐오 논란 이후 한 달 만에 '나 혼자 산다'에 복귀한다.

  • 라효진
  • 입력 2020.09.15 18:17
  • 수정 2020.10.16 10:30
웹툰 작가 겸 방송인 기안84
웹툰 작가 겸 방송인 기안84 ⓒMBC

″어머나 안녕하세요~”

특유의 첫 인사 이후 평소완 다르게 스튜디오에 어색한 공기가 흐른다. 쭈뼛대는 기안84와 그의 어깨를 한 번 툭 치며 ”오늘 분위기 왜 이래?”라고 말문을 여는 성훈 혹은 이시언. 박나래가 ”아니 그게 아니고~”라고 거들면 한혜진이나 화사가 ”왜 그랬어요”라고 짐짓 기안84를 노려본다. 그러면 기안84는 ”죄송합니다”라고 고개를 푹 숙일 거다. 그러면 박나래가 ”이제 다신 안 그러면 되죠 뭐”라고 오프닝을 마무리한다.

얼마 전 웹툰 작가 기안84가 자신의 작품 ‘복학왕‘에 여성 인턴이 성상납으로 정직원이 됐다는 에피소드를 그려 논란이 된 후, 시청자들은 해당 주 ‘나 혼자 산다’ 방송에서 이 같은 장면이 나오리라 확신했다. 친구에게 장난치다 싸움이 나자 은근슬쩍 사과 없이 얼버무리는 수준의 가벼운 무마가 이 방송이 각종 논란을 처리하는 공식이었던 탓이다.

이들이 시청자와 벌이는 아슬아슬한 기싸움은 제작진의 ‘먼저 사과하면 지는 거다’ 식의 태도를 바탕으로 한다. 다만 이번 논란은 각계의 반발이 있었기 때문인지, 제작진은 기안84를 한동안 스튜디오로 부르지 않았다.

그러나 14일 ‘나 혼자 산다’ 측은 기안84의 컴백을 예고했다. 한 달의 유예기간이 있었을 뿐, 시청자들이 예상했던 ‘기(氣) 살려주기용’ 오프닝을 보게 될 거란 소리다.

MBC '나 혼자 산다'의 기안84 기 살려주기용 오프닝. 시청자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다.
MBC '나 혼자 산다'의 기안84 기 살려주기용 오프닝. 시청자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다. ⓒMBC

제작진이 기안84를 불러들이며 밝힌 입장은 이렇다. ”기안84가 오늘 있을 스튜디오 녹화에 참여할 예정입니다. 더욱 성숙해진 모습으로 찾아 뵐 예정이니 앞으로 지켜봐주세요!”

한 달 동안 기안84 없이 지낸 ‘나 혼자 산다‘가 내놓은 결론이 고작 이 두 문장이라는 점이 실망스럽다. ‘더욱 성숙해진 모습‘, ‘앞으로 지켜봐 달라’는 식상한 표현은 한국 나이 37세에 국내 웹툰 분야 톱에 건물주이기까지 한 기안84라는 존재를 어디까지 퇴행시키고 있는지 황당할 지경이다.

다른 것을 차치하고, ‘나 혼자 산다‘는 기안84의 성장담이 아니다. ‘더욱 성숙해진 모습‘이라는 수사가 기안84가 각종 논란을 책임지는 방식이라면, 우리는 범죄를 저질러 물의를 일으킨 후 ‘음악으로 보답하겠다’, ‘연기로 보답하겠다’, ‘야구로 보답하겠다’는 이들의 말을 전부 받아들여야 한다.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물의와 논란을 일으킨 이들의 통장만 두둑해질 공수표인데, 그걸 믿어주는 수밖에 없다.

 

웹툰 작가 겸 방송인 기안84
웹툰 작가 겸 방송인 기안84 ⓒ기안84 인스타그램

기안84가 없던 지난 4회의 ‘나 혼자 산다’ 시청률은 그야말로 ‘요동쳤다’. 박나래가 남동생 부부 임신을 축하하는 에피소드에서 전주 대비 0.9%p(이하 닐슨코리아, 전국 기준)가 빠지더니, 그 다음주 헨리와 이장우가 1.3%p를 올려 놨다. 때아닌 납량특집 때는 3%p가 떨어져 지난주 시청률은 7%대를 맴돌았다.

4회의 에피소드를 거치며 배우 곽도원 편이 운 좋게 호평을 받았으나 그 기세가 2주를 가지 못했다. 김영광 편도 휘황찬란한 요리 장비를 동원해 우아하면서도 현실적인 식사를 보여줬지만 크게 화제를 부르진 못했다. 나머지는 전부 ‘무지개’ 고정 멤버들의 일상이었다.

여기서 ‘나 혼자 산다’는 기안84를 다시 호명한다. 만일 방송의 시청률 하락이 그저 기안84의 부재라고 판단해 그를 불러 들였다면, 이 얼마나 빈약한 방송인지 제작진은 깊이 고민해야 할 터다. (물론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기안84가 없어도 시청률은 올랐다.)

사실 기안84는 ‘나 혼자 산다’ 제작진에게 당한 피해자일 가능성도 있다. 기안84의 기행(?)들은 편집을 거쳐 어느 정도 순화될 수 있었다. 그러나 제작진이 기안84라는 콘텐츠를 활용하는 방식이란 손에 꼭 틀어쥔 채 욕 먹기 딱 좋은 부분만 들이미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공황장애로 사람 많은 곳에 가지 못한다는 기안84를 굳이 연말 시상식에 참석시켜 연신 약을 들이키며 떠는 모습을 보여주고, 이를 ‘극기(克己)‘처럼 묘사하는 대목은 몹시 폭력적이다. 또 패션쇼 ‘성훈이 형′ 연호 사건은 시청자들에게 굳이 알게 할 필요가 없는 장면이었다. ‘나 혼자 산다’ 제작진이 기안84의 수호자를 자처하지만, 사실은 가장 그를 사지로 몰아 넣고 있다는 추측이 가능한 이유다.

또 최근 몇 년 간 ‘나 혼자 산다’라는 프로그램의 정체성과 초심이 사라지고 있다는 점 역시 제작진이 기안84를 이렇게밖에 활용하지 못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나 혼자 산다’의 당초 기획의도 일부는 이렇다.

이제는 1인 가구가 대세!
연예계 역시 1/3은 1인 가구!
기러기 아빠, 주말부부, 상경 후 고군분투 중인 청년, 독신남 등 각기 다른 이유로 싱글족이 된 스타들!

하지만 2016년부터 이 프로그램을 이끌고 있는 황지영 PD는 2018년 ″사실 제가 맡기 전에는 좀 가난하고 우울하고 인지도가 조금 (떨어지는) 그런 분들이 많이 나왔죠”라는 발언으로 그가 ‘나 혼자 산다‘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어느 순간부터 ‘나 혼자 산다‘는 ‘연예인도 사람이구나’ 대신 ‘연예인은 연예인’이라는 감성을 입었다. 각종 범죄와 물의로 연예계를 은퇴하고 군대에서 재판을 받는 승리 편은 공감을 위한 방송을 구경을 위한 방송으로 탈바꿈시킨 대표적 예다.

전혀 소소하지 않은 규모의 집과 가구들에 둘러싸인 연예인의 잠옷 바람을 다루는 ‘나 혼자 산다‘는 소위 ‘인싸(인사이더)‘에 대한 제작진의 집착을 방증한다. 이름 있는 연예인을 노출시킬 수 없는 날엔 무지개 회원들이 모여 ‘친목질‘을 한다. 시청자들 사이에서 ”‘나 혼자 산다‘가 아닌 ‘나 얘랑 논다’가 됐다”는 볼멘소리가 나오는 것도 과언은 아니다. 무지개 모임은 당초 친목 모임이 아닌 1인 가구 연대 모임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싸그리 잊혔다.

벌써 햇수로 7년을 이어 온 ‘나 혼자 산다’는 기안84 다시 한 번 터닝포인트를 맞았다. 이건 논란만 가득했던 프로그램이 다시 초심을 찾는 기회일 수도 있다. 다만 새로 시작하기 위해서는, 기안84를 놔 주는 것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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