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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미국 대선 : 조연이었던 조 바이든이 주연이 되기까지 생애를 정리했다

아무런 조명도 없는 무대에서 수많은 일을 해내던 바이든은 돌고 돌아 마침내 주연의 자리에 섰다.

젊은 시절의 조 바이든 
젊은 시절의 조 바이든 
 

가족 

초등학교 때 바이든은 선도부원이었다. 그는 학교버스에서 여동생 밸러리가 일어나 장난을 치는 장면을 봤다. 자신의 의무는 이를 선생님에게 보고하는 것이었다. 바이든이 고민에 빠지자, 아버지는 “신고하는 것만이 유일한 선택은 아니다”라고 조언했다. 바이든은 선도부원 배지를 떼어서 반납했다. 가족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고 결정했기 때문이다.

조지프 로비넷 바이든 주니어는 1942년 펜실베이니아 스크랜턴의 아일랜드계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장남으로 1명의 여동생과 2명의 남동생을 밑에 둔 그는 보수적인 가족의 가치를 중시하는 집안 문화 속에서 성장했다.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외할머니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기도 했다. 그가 11살 때 아버지는 일자리를 찾아서 델라웨어 윌밍턴으로 이사했고, 이때부터 바이든의 집은 형편이 나아졌다.

어릴 적의 고생은 가족 사이의 결속을 다지는 계기가 됐다. 어머니 캐서린 유지니아 진 바이든은 이들의 결속을 다지는 접착제였다. 어린 시절 말더듬증으로 고생하는 바이든은 학교 발표시간에 교사에게 질책과 모욕을 받고는 그 자리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는 그 즉시 교장과 교사를 찾아가 “또 한번 내 아들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면, 그 모자를 머리에서 벗겨내 갈가리 찢어버리겠다”고 말하고는 바이든에게 교실로 돌아가라고 호통쳤다.

특히 바이든과 3살 어린 여동생 밸러리는 서로에게 등불과 지팡이가 되는 인생 항로의 동반자가 됐다. 밸러리는 바이든이 말더듬증을 극복하려고 연습하면, 그 옆에서 조언자이자 청중이 되어줬다. 그가 정치인으로서 때론 장광설을 거침없이 쏟아낼 수 있게 된 데는 밸러리의 공이 컸다.

남매들의 결속은 바이든이 고등학교 때 학생회장 선거에 나서면서 ‘원 팀’으로 발전했다. 밸러리가 ‘선거대책본부장’이 되어 바이든의 당선을 일궈냈다. 이는 그 이후 바이든이 치를 수많은 선거운동의 원형이 됐다. 돈과 조직이 턱없이 부족해 누구도 당선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았던 1972년 바이든의 첫 상원의원 선거는 사실상 밸러리와 남동생 지미가 없었다면 치를 수 없었다.

20대에 불과한 햇내기들이었지만 밸러리는 조직을, 지미는 자금을 맡았고, 조부모를 비롯한 나머지 가족은 델라웨어 곳곳을 누비며 유권자들의 집에서 커피 타임을 갖는 밑바닥 선거운동을 벌였다. 그 결과는 3천표 차이의 승리였다. 공화당 성향이 강한 지역에서 생각보다 많은 표가 나왔다. 바이든과 그 가족이 그들 유권자에게는 말 건네기 편안한 사람들로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상원의원으로 당선된 바이든에게 아내와 막내딸이 교통사고로 숨지는 비극이 발생하자, 밸러리는 바이든의 남은 두 아들을 키워줬다. 교사직을 내던지고 바이든의 집으로 들어온 밸러리는 상원의원직을 포기하려는 바이든을 설득하며, 그의 아들들을 적극적으로 돌봤다. 밸러리의 이런 역할이 없었다면 지금의 바이든은 없었다. 

1970년대 초반 초선의 상원의원이던 조 바이든과 그의 여동생 밸러리 바이든 오언스. <a href='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america/968940.html?_fr=mt1#csidxd659ae722868d8eb790105c0504be09'></div></a>
1970년대 초반 초선의 상원의원이던 조 바이든과 그의 여동생 밸러리 바이든 오언스.  ⓒ바이든 선대위
 

도전

학창 시절부터 바이든은 학업 등에서 뛰어난 학생이 아니었다. 하지만 작은 체구에도 미식축구 팀원으로 활약했고, 학생회장을 지내는 등 적극적이고 활발한 학생이었다. 아버지로부터 “너는 대학에 가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서, 그는 집안에서 최초로 대학생이 됐다.

델라웨어대학교에 진학한 그는 졸업할 때 평균 시(C) 학점에 688명 중 506등이었다. 졸업 뒤 그는 로스쿨인 시러큐스법과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를 인터뷰한 교수들이 입학을 허가한 것은 그의 학업 성적이 아니라 갈망을 높이 산 까닭이었다. “강력한 동기”였다고 바이든은 회상했다.

그는 청소년 시절에 존 케네디 등의 정치인 연설에 매료됐고, 그들이 이끄는 미국의 변화의 일부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갖고 있었다. 변호사는 그 길로 가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시러큐스를 택한 것은 대학 때 만나 부인이 되는 네일리아 헌터가 그곳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졸업 뒤 델라웨어에서 가장 큰 로펌 ‘프리켓, 워드, 버트 & 샌더스’에 취업했다. 바이든은 그저 그런 로스쿨의 졸업생 85명 중 76등을 한 “그다지 내세울 것 없는 이력서”를 가진 자신을 그 로펌이 받아줬다고 회고했다. 그를 추천한 교수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고, 책임감이 매우 뛰어나다. 그는 모험도 기꺼이 불사할 사람”이라고 평가해줬다.

책임감과 모험이 그를 정계로 이끌게 된다. 로펌 취업 초기 그는 산재를 당한 용접공에게 제소당한 회사를 대리하는 주임 변호사를 도왔다. 재판은 그 용접공이 자신의 실수로 재해를 당했다는 쪽으로 흘러갔다. 법정에서 용접공의 아내가 고개를 숙여 자신의 발을 내려다보는 장면을 목격한 그는 뭔가 꽉 막히는 듯한 기분이었다고 한다. 그는 “원고는 장애인이 되는 영구 손상을 입었지만, 아무 보상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있었다. 내가 원고를 대리했어야 했다고 느꼈다”며 법정을 나오면서 로펌을 그만두기를 결심했다.

바이든과 카말라 해리스  
바이든과 카말라 해리스   ⓒKevin Lamarque / Reuters

 

도약

그가 정계에 입문하게 된 계기였다. 로펌 취업 초기에 바이든은 공화당 쪽으로부터 모임에 참여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그는 리처드 닉슨과 공화당이 싫어서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하다가 퇴사와 동시에 민주당을 찾게 된다.

1968년 당시는 반전 민권운동이 절정에 달해, 델라웨어에서는 소요 사태로 6개월 동안 계엄령 상태였다. 학창 시절 흑인 전용 수영장에서 유일한 백인으로 아르바이트를 한 경험 등으로 인해 인종 사이의 화합과 소통은 그의 꿈이자 장기였다. 그는 “4만명의 윌밍턴 흑인 시민 중 백인과 서로 교류한 사람들은 극소수라는 것”을 수영장의 구조요원으로 일하면서 알게 됐다. 그는 국선변호사로서 윌밍턴의 가난한 흑인들을 대리했다.

수입이 넉넉지 않던 그는 로펌에 다시 취직했고, 민주당을 개혁하려는 포럼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70년 그는 델라웨어 뉴캐슬카운티의 의원으로 출마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그 지역의 60%가 공화당원이어서, 아무도 나서려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동자 계층이 많은 선거구에서는 민주당이 우세할 수 있었고, 그 적임자로 바이든이 추천됐다. 바이든은 피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1970년 11월 선거에서 델라웨어 민주당은 완패했으나, 바이든은 2천표 차이로 당선됐다.

28살의 무명 카운티 의원 바이든은 갑자기 델라웨어 민주당의 최고위 인사 중 하나가 됐다. 그만큼 델라웨어 민주당은 한심한 상태였다. 2년 뒤 바이든은 더 큰 모험에 내몰렸다.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를 찾는 데 그도 나섰으나 유력 인사들은 모두 거절했다. 공화당의 경쟁 상대는 케일럽 보그스였기 때문이다. 1946년 이후 델라웨어에서 치러진 모든 선거에 승승장구한 3선 현역 의원이었다.

민주당은 ‘패전 처리 투수’로 바이든을 쓰겠다는 계획을 세웠고, 바이든은 피하지 않았다. 1972년 선거에서 바이든은 3천표 차로 당선되는 최대 이변을 일으켰다. 당시 그는 연방 상원의원의 자격 조건인 30살 생일을 당선 뒤에 맞는 최연소 의원이기도 했다. 

2011년 부통령 시절 오바마 대통령과 함께 걷고 있는 바이든 
2011년 부통령 시절 오바마 대통령과 함께 걷고 있는 바이든  ⓒPAUL J. RICHARDS via Getty Images
 

비극

화려한 변신은 한달 만에 비극으로 변했다. 당선된 지 한달이 지나서 아내 네일리아와 막내딸이 숨지고, 아들 둘이 중상을 당한 교통사고가 터졌다. 도약의 시기에 찾아오는 비극은 바이든의 인생에서 반복됐다.

1987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출마도 큰 시련으로 귀결됐다. 선거운동 중에 한 유세가 당시 영국 노동당 지도자 닐 키넉의 연설을 표절했다는 비난에 시달렸다. 며칠 뒤에는 로스쿨 시절에 썼던 논문도 표절 의혹을 받았다. 그해 9월 경선에서 물러난 바이든은 실의의 시간을 보내다가, 몇달 뒤인 1988년 2월 앰뷸런스에 실려 응급실로 가야 했다. 뇌동맥류가 터져 사경을 헤매면서 두차례나 수술을 받았다. 7개월 동안 상원의원 직무를 이행하지 못했다.

2015년 대통령에 다시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왔을 때, 또 크나큰 시련이 닥쳤다. 큰아들 보 바이든이 뇌종양으로 사망했다. 바이든은 몇년 전부터 생명이 위태롭던 아들이 먼저였기 때문에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참가할 수 없었다. 델라웨어 주법무장관이었던 보 바이든의 죽음은 깊은 슬픔인 동시에 그의 정치 행로에서 큰 손실이기도 했다.

 

배려  

첫 상원의원 선거 후보 토론회에서 신출내기 바이든은 거물인 현역 의원 보그스를 보기 좋게 망신시킬 기회가 있었다. 보그스가 유대인 홀로코스트 사태와 같은 대량학살을 막는 조약에 대해 질문을 받고는 대답을 못 했기 때문이다. 보그스에게만 주어졌던 질문이지만, 바이든도 대답하라는 이례적인 기회가 왔다. 바이든은 이 사안을 잘 알고 있었지만 자신도 모르겠다고 답했다. 그는 그런 식으로 보그스를 당혹스럽게 하는 모습을 자아내고 싶지 않았다.

상원의원에 취임하고 나서 진보파인 에이브 리비코프는 바이든에게 낙태 등 민감한 사안에 대해 “한쪽만 골라, 정치적으로 그게 나을 거야”라는 충고를 했다. 바이든은 그 말이 여전히 좋은 충고라고 생각은 하지만, 갈등을 자아내는 많은 민감한 사안에 한쪽 편을 들기보다는 조정과 타협을 우선시했다.

그는 “낙태에 반대하지만, 개인적인 믿음에 의한 견해를 사회에 강요할 권리는 없고, 정부가 낙태 문제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30년간 고수했다. 여성단체에는 불신을, 생명권 단체에는 적개심을 불러일으킬, 정치적으로 유리할 것 없는 입장을 유지한 것이다. 그는 근본적이지 않은 사안에서 동료가 정치적 도움을 요청하면 정치적으로 편의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그가 의회에서 할 일은 “동료의 좋은 점, 즉 그들의 유권자가 본 것을 찾아내려고 하는 것이지, 나쁜 점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의 동기도 공격하지 않으려 했다.”

바이든은 “우리가 결정하는 문제의 80%는 근본적으로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의 지지가 필요하다”며 의회 운영의 원칙으로 삼았다.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을 용공으로 모는 보수 매파 제시 헬름스 공화당 의원에게서는 그가 뇌성마비를 앓는 9살 아이를 입양했다는 좋은 점을 찾고서 관계를 풀어나갔다. 

ⓒASSOCIATED PRESS

 

조연 

2008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다시 도전한 바이든은 주목을 받지 못했다. 힐러리 클린턴과 버락 오바마라는 화려한 개성의 두 후보가 일찌감치 선두에 나섰다. 그는 첫 경선지인 아이오와에서 1%도 득표하지 못하고 5등을 했다. 그는 그날 밤 사퇴했다.

하지만 그는 곧 오바마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일등공신이 됐다. 오바마는 바이든이 민주당 성향 노동자층에 인기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바이든도 오바마가 진짜 ‘물건’임을 알아챘다. 그는 오바마를 지원해줬다.

예상을 깨고 클린턴을 물리친 오바마는 바이든에게 러닝메이트를 제안했으나, 바이든은 허깨비 부통령직보다는 상원에서 자신의 지도력을 유지하고 싶었다. 오바마는 풍부한 대외정책 및 국가안보 경험에다 경합주의 노동자층 및 중산층에 대한 소구력이 있는 바이든이 절실히 필요했다.

선거운동 때 주목받지 못한 바이든은 악역만 맡았다. 의회에서 가장 절친한 관계였던 존 매케인이 공화당 후보였다. 그는 매케인을 공박하는 역을 담당해야 했다. 그는 매케인에 대해 “내가 알던 그 친구는 사라졌다. 말 그대로 나를 슬프게 한다”고 말했다. 한편으로는 공화당의 깜짝 부통령 후보 세라 페일린에게 조명을 빼앗겼다. 언론들은 ‘미모의 젊은 여성 정치인’이라며 앞다퉈 페일린의 이야기를 들었고 기사로 쏟아냈다.

바이든은 대선의 승패가 갈리는 남부 선벨트 및 북부 러스트벨트의 경합주 시골을 돌아다녔다. 동서부 연안의 엘리트 출신들에게 소외감을 느끼는 이곳 보수적인 백인 중하류층 유권자가 그의 몫이었다. 오바마는 조명이 화려한 무대에 출연했고, 바이든은 아무런 조명도 없는 무대에서 조연 혹은 단역으로 출연했을 뿐이다. 그가 거쳐간 경합주들은 오바마의 두차례 대선에서 경합주가 되지 않았다. 경합주들에서 여유있는 승리는 바이든이 아니고서는 설명이 안 된다. 

ⓒDrew Angerer via Getty Images

타협

버락 오바마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이 된 그가 처음 한 일은 전임자인 딕 체니가 남용한 부통령의 직책을 원상회복시키는 것이었다. 오바마는 그에 대해 “기록판에 나타나지 않는 수많은 일을 하는 농구 선수”라고 비유했다. 부통령으로 그는 두가지 주요한 일을 수행했다.

하나가 백악관에서의 ‘스컹크’ 역할이었다. 얕은 경험에다가 자유주의적 가치를 앞세운 오바마 측근들이 야기할 수 있는 문제를 먼저 걸러내는 역할을 맡았다. 백악관에서 그는 고약한 방귀 냄새를 풍기는 스컹크였다. 그는 “상황실의 악당”(제이 카니 대변인), “집단 순응사고를 막는 역할”(람 이매뉴얼 비서실장), “모든 각도에서 사물을 바라보게 하는 나에게는 귀중한 존재”(오바마)였다.

2010년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다수당 지위를 잃어버리자, 바이든의 공간은 의회가 됐다. 상하원을 틀어쥔 공화당과의 협상이 그의 몫이었다. 미치 매코널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와 각별한 사이인 그는 의회에서 오바마 행정부의 입법안을 통과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러시아와의 신전략무기감축협정(뉴스타트) 비준을 주도했으며 부시 시절의 감세법을 임시 연장하는 대신에 실업보험 및 일자리 창출 법안을 교환하는 협상도 성공시켰다. “바이든은 실질적인 협상 권한을 가진 유일한 사람이고, 타결의 열쇠였다”고 공화당 쪽은 인정했다.  

11월 6일 조 바이든 지지자들이 워싱턴 스퀘어 파크에 모여있다. 
11월 6일 조 바이든 지지자들이 워싱턴 스퀘어 파크에 모여있다.  ⓒASSOCIATED PRESS
조 바이든과 카말라 해리스 지지자 
조 바이든과 카말라 해리스 지지자  ⓒASSOCIATED PRESS

2016년 대선 후보로 거론됐으나 결국 출마하지 못하면서, 그가 정계에서 잊히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대선 승리가 확실해 보이던 힐러리 클린턴 이후에 고령인 그가 대선에 나갈 수는 없다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기회는 돌고 돌아 바이든의 곁으로 찾아왔다.

2016년 민주당의 대선 패배에는 힐러리 클린턴에 대한 반감이 크게 작용했고, 민주당 진영은 보수적 백인 중하류층의 분노를 깨달았다. 2020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초반에는 이념적으로 도널드 트럼프와 대척점에 있는 진보파 버니 샌더스가 돌풍을 일으키다가 좌초된 이유이기도 했다. 강렬한 개성의 샌더스가 지지층 결속에는 유리하겠지만 확장력은 없을 것으로 민주당은 진단했다. 대안은 바이든뿐이었다.

백악관으로 걸어가는 그의 앞에는 가시밭길이 펼쳐져 있다. 우선, 19세기 남북전쟁이나 1960년대 반전과 인종 분규 때와 같은 분열과 대결이 부글거리며 미국을 감싸고 있다. 지난 30년간 미국 사회 전반에서 진행된 양극화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집권 아래서 극단적인 진영화로 귀결됐다. 계층적으로는 빈부 격차가 커지고, 지역적으로는 도시 대 비도시, 동·서부 연안 대 내륙으로 분열되었으며 성별·인종 사이의 갈등은 커져서, 이념적으로 보수 대 자유주의 진영 사이의 증오가 시위와 폭력으로 분출하고 있다.

그동안 백악관을 거쳐간 빌 클린턴, 조지 부시, 버락 오바마, 도널드 트럼프라는 강렬한 개성의 대조적인 대통령들은 미국 사회의 이런 진영화를 상징한다. 하류층 출신의 젊은 여피족, 대를 이어 대통령을 하는 정치 명문가 장남, 외국인을 아버지로 둔 소수인종, 투기판과 연예계를 오간 부동산 재벌로 이어진 대통령들은 미국 사회의 진자가 양극단으로 번갈아 움직여왔음을 말해준다.  

바이든 지지자가 개표 결과를 보며 울먹이고 있다. 
바이든 지지자가 개표 결과를 보며 울먹이고 있다.  ⓒHannah Mckay / Reuters
ⓒKevin Lamarque / Reuters

이들 대통령의 강렬한 개성과 뚜렷한 정체성은 대척점에 서 있던 이들의 반작용과 결속을 불렀다. 이는 상반되는 개성과 정체성의 대통령을 낳았고, 서로를 배척하는 악순환의 과정을 되풀이했다. 급기야 트럼프라는 미국 역사상 가장 ‘비대통령적’인 대통령이 등장해, 모두가 합의한 것으로 여겨진 가치마저 형해화하는 분열과 대결을 배태했다.

그래서, 그런 대통령과는 대조적인 인물인 바이든이 등장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평범한 중산층에서 태어나 서민적인 삶을 살고, 자수성가해서 정계에 입문한 뒤, 의회에서 평생을 보낸 온건 중도 성향의 주류 백인 남성이다. 미국 역사에서 많이 보아온 전형적인 대통령의 모습이기는 하나, 워싱턴에 넘쳐나는 전형적 정치인의 하나이기도 했다.

그는 상원에 50년 가까이 있으면서 지도자나 대통령감으로 주목받거나 부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50년이나 상원에서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워싱턴 정가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 되어왔기 때문이다. 미국 정가에서 가장 많이 입에 오르내리지만 갈수록 그 구현이 힘들어지는 ‘바이파르티잔’(초당적)을 가능케 해왔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백악관행도 그가 깃발을 들고 앞장서 간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백악관으로 가려는 사람의 뒤에서 반대하는 사람들의 손까지 잡고 밀어주다가, 어느덧 그 깃발이 자신의 손으로 넘어오고 앞장서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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