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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차피 모두 난민이다

  • 권용득
  • 입력 2018.06.18 18:03
  • 수정 2018.06.18 18:44
ⓒ뉴스1
ⓒhuffpost

자국의 내전을 피해 제주도로 입국한(탈출한) 예멘 난민 560여명을 거부해 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단 나흘만에 17만 명 넘게 서명했고, 해당 청원은 돌연 삭제됐다고 한다. 청와대 관계자는 “허위 사실이나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내용이 포함된 청원 등을 삭제할 수 있다는 운영 규정에 따라 청원을 삭제했다”고 하는데, 비슷한 내용의 또 다른 청원에도 현재 20만 명 넘게 서명한 상태다. 해당 청원의 요지는 외국인 불법체류자가 “난민신청자는 난민인정 여부에 관한 결정이 확정될 때까지 대한민국에 체류할 수 있다”는 난민법* 제5조 6항을 악용하거나, 문화적 차이로 인한 마찰을 무시할 수 없다며 관련법과 제도의 폐지를 요구하고 있다.

한편 해당 청원을 지지하는 상당수는 여성 인권이 상대적으로 낮은 이슬람 국적의 난민을 함부로 받아줘서는 안 된다며 그들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한다. 예멘 난민 대부분이 성인남성이고, 이들은 저 혼자 살겠다며 제 가족을 팽개친 파렴치한이라는 얘기(그러므로 한국 사회에도 악영향을 줄 거라는 얘기)도 서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해당 청원 지지자들은 난민 수용 문제로 골머리를 썩고 있는 유럽을 보라며 여론의 공분을 부추기는 편인데, 말하자면 제주도로 입국한 예멘 난민을 사회적 위협으로 간주하는 셈이다.

예멘 난민이 하필 제주도를 선택한 까닭은, 난민법보다 제주도가 무사증 제도를 시행 중이기 때문이다. 무사증 제도는 무비자 입국 제도로써, 테러지원국을 제외한 180개국 외국인에 한해 한 달간 비자 없이 국내에 체류할 수 있다. 제주도는 관광산업 활성화 차원에서 2002년부터 무사증 제도를 시행 중이다. 즉, 난민법을 악용하는 제주도 내 외국인 불법체류자를 걸러내고 싶다면, 난민법을 폐지할 일이 아니라 난민선청자에 한해 제주도 외 다른 지역까지 무비자 입국을 허락해주면 될 일이다. 이왕이면 그 참에 난민 수용 시설 문제와 난민 처우에 관해 함께 논의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고.

그런데 예멘 난민은 해당 청원 지지자들 말처럼 제 가족을 팽개친 파렴치한이며 동시에 잠재적 범죄자일까. 전시 상황에 가장 큰 희생자는 상대적 약자가 틀림없지만, 전시 상황만큼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건 상대적 강자인 성인남성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예멘을 탈출하지 않았다면 반군에 징집돼 이웃을 죽이는 살상 도구로 동원됐거나 아니면 반군에 협조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가장 먼저 사살됐을 거란 얘기다. 무엇보다 그들은 저 혼자 예멘을 빠져나왔다는 죄책감과 예멘에 두고 온 가족에 대한 걱정으로 불면의 밤을 보내야 하는 전쟁 피해당사자들이다. 게다가 제주도로 입국한 예멘 난민 중에는 어린아이도 있다. 그 오갈 데 없는 전쟁 피해당사자들을 사회적 위협으로 간주해 거부하는 것과 총으로 생명을 위협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폭력적일까. 둘 다 폭력적이지만, 전자는 총만 없을 뿐 인격 살해나 다름없다.

제주도 서귀포에는 이중섭 미술관이 있다. 이중섭은 평안남도 평원 출신인데, 왜 제주도에 이중섭 미술관이 있는 걸까. 이중섭은 한국전쟁 당시 가족과 함께 이곳저곳을 떠돌다 제주도로 피난했었다. 대표적 난민 화가인 셈이고, 이중섭은 제주도에 머무는 동안 제주도의 아름다움과 제주도에서의 일상을 부지런히 그림으로 기록했다. 사람에 따라 제주도로 입국한 예멘 난민 560여명을 잠재적 범죄자로 볼 수도 있겠고, 아니면 이중섭처럼 잠재적 예술가로 볼 수도 있겠다. 굳이 후자로 대할 필요는 없겠으나 전자처럼 예멘 난민을 악의적으로 대할 수밖에 없다면, 그 사회는 내전만 없을 뿐 얼마나 불행한가 싶다. 다시 말해 환대는 해주지 못할망정 뺨은 때리지 말자. 우리는 어차피 모두 난민이다. 저마다 먹고살기 바빠 기댈 곳이 마땅치 않은 정서적 난민.

*난민법은 「난민의 지위에 관한 1951년 협약」(난민협약) 및 「난민의 지위에 관한 1967년 의정서」(난민의정서) 등에 따라 2012년에 제정됐으며, 난민법 전문은 아래 주소를 통해 누구든 열람할 수 있다.

- http://www.law.go.kr/lsInfoP.do?lsiSeq=188376&efYd=2016122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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