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
2020년 12월 01일 13시 35분 KST

"성 착취 없는 AV를 본 적이 없다" : 일본 AV 출연 강요는 ‘동의'와 ‘연기’로 치부된 디지털 성범죄다

AV 피해와 디지털 성범죄가 같다고 보는 이유는 '성적 동의 없는 확산'이기 때문이다.

<한겨레21>이 디지털성범죄를 정리하고, 앞으로 기록을 꾸준히 저장할 아카이브(stopn.hani.co.kr)를 열었습니다. 

* ‘리벤지 포르노’ ‘아동 포르노’ ‘AV’ 같은 용어는 일본 현지에서 쓰는 단어를 그대로 옮겼습니다.

PAPS
일본에서 거의 유일하게 디지털성범죄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PAPS활동가들.

“TV 녹화라는 말을 듣고 야외 촬영 버스에 올라타자 성폭력을 당했다. 그때 촬영된 영상이 판매되고 있다는 걸 들었다.”

“트위터에서 모델 모집 글을 보고 응모했다. 직접 만났더니 성행위를 강요당했고 촬영당했다. 나중에 그 영상이 인터넷에서 판매되고 있었다.”

일본의 한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 단체에 들어온 상담 내용이다. 국적을 지우면 낯설지 않다. 원치 않는 촬영을 강요당했고, 피해 입는 과정이 찍힌 영상은 국경 없이 돈다. 마치 한국의 n번방처럼. 다른 점이 있다면 일본의 피해 여성과 가해자 사이에는 ‘계약서’가 있었고, 그 계약서는 피해자가 벗어날 수 없도록 옭아맸다. 계약서 탓에 이들은 피해자로 호명되기보다는 ‘피해 유발자’로 낙인찍혔다. 또 올가미에 갇힌 피해자들은 AV(Adult Video·성인용 비디오) 배우로 불리며 엔터테인먼트로 소비됐다.

 

계약서 탓에 ‘피해 유발자’로 낙인

‘AV 출연 강요’는 최근 일본에서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일본 정부는 매년 4월을 ‘AV 출연 강요, JK비즈니스(여고생을 코스프레해 돈을 버는 사업) 피해 방지의 달’로 정했지만 정부 차원에서 디지털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하는 제도나 기관은 없다. 거의 유일하게 PAPS(People Against Pornography and Sexual Violence·팝스)가 일본에서 디지털성폭력 피해자를 지원한다. 팝스와 전자우편과 화상으로 세 차례 인터뷰했다. 2020년 8월의 화상 인터뷰에는 팝스의 이사장 가나지리 가즈나와 활동가 오카 메구미가 참여했다.

“피해자들은 대부분 20살 전후다. 20살이 많다.” 가나지리 이사장이 말했다. 사회 경험이 없는 대학생인 경우가 많은데 미성년자는 아니기에 계약을 취소할 수 없어 표적이 된다. AV 강제 출연 피해를 입은 여성이 처음 상담한 2013년 이래 팝스에 들어오는 상담 건수는 매년 늘어나는 추세다. 2013년 1명이던 상담자 수는 2019년엔 181명까지 증가해 2020년 1월 기준 모두 718명이 상담받았다. 팝스는 이 중 60% 이상을 AV 관련 피해자로 분석한다. 나머지 상담 내용은 ‘아동 포르노’, ‘리벤지 포르노’, 아동 성매매 강요 등이다.

일본에서 AV는 “실질적인 합법”(가나지리)이다. 다만 성기를 노출하거나 음모가 드러난 영상물(하드코어 포르노)은 모자이크 처리하지 않으면 판매할 수 없다. 하드코어 포르노가 합법인 미국·캐나다 등엔 모자이크 없이 영상 전송이 가능하다. 이 때문에 일본 내에서도 수정되지 않은 영상을 인터넷으로 손쉽게 구할 수 있다. 영상에는 일본인이 등장하고 일본어로 표기됐지만, 서버가 해외에 있다는 이유로 일본 형법(제175조, 음란물 배포 금지) 적용을 받지 않는다. “(AV 출연 강요를 받은 피해자들이) 아무리 잔학한 성행위를 강요받고 부상을 당해도 ‘동의’ ‘연기’라고 여겨져 강간, 강요, 상해, 폭행죄 등으로 입건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마찬가지로 ‘연기’라는 이유로 성매매 방지법 적용도 받지 않는다.”(‘Human Rights Now’(HRN) 2016년 보고서)’

NurPhoto via Getty Images
(자료 사진) 아일랜드 더블린 도심에 그려진 화가 엠말린 블레이크의 벽화. 성적 학대인 이른바 '리벤지 포르노'를 불법화하는 법과 관련이 있다. '공유할 수 있는 당신의 것이 아니다'(Not yours to share)라고 적혀있다.


AV 피해와 디지털 성범죄의 공통점


‘AV 출연 강요’가 일본에서 사회문제로 인식된 것은 2014년 국제 인권단체인 HRN이 관련 사건을 폭로한 덕분이다. 고등학생 ㄱ은 2011년 길거리에서 ‘화보 모델’로 스카우트됐다. 연기자에 관심이 있던 터라 ㄴ프로덕션이 제시한 계약서에 서명했다. 하지만 실제 ㄱ에게 주어진 일은 노출이 심한 복장으로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이었다. 그만두고 싶다는 ㄱ의 말에 프로덕션은 “위약금 100만엔(약 1060만원)을 내라”고 했다. ㄱ은 어쩔 수 없이 촬영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ㄱ이 20살이 되자 프로덕션은 ㄱ에게 AV를 찍으라고 강요했다. ㄱ은 다시 몇 번이나 그만두고 싶다고 말했지만 ㄴ사는 또다시 위약금을 언급하며 ㄱ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참다못한 ㄱ이 지원단체의 도움을 받아 ㄴ사에 계약 해지를 통보하자, ㄴ사는 ㄱ을 상대로 2460만엔(약 2억6천만원)을 배상하라고 민사소송을 냈다. 다행히 도쿄 지방법원은 “성인 비디오 출연은 출연자인 피고의 의사에 반해 작업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 성질의 것”이라며 2015년 프로덕션 쪽의 손해배상 청구를 기각했다. 이후 비슷한 피해를 입었다는 여성들 목소리가 잇따랐다.

팝스는 ‘성적 동의 없는 확산’이라는 점에서 AV 피해와 디지털성범죄가 본질적으로 같다고 말한다. AV도 널리 유포돼 인터넷상에 반영구적으로 남는데다 2차, 3차 반복적으로 사용되거나, 신작으로 가공되기도 한다. 또, 피해자가 촬영에 동의했더라도 찍힌 동영상이 어떤 식으로 취급되는지 예측할 수 없고, 피해자 동의 없이 시청도 가능하다. “촬영자와 교섭력, 정보량의 격차를 깨닫지 못한 채 촬영당한다. 구체적 촬영 내용도 모르고 상호 합의를 포기했다는 인식도 없이 촬영에 임하는 경우가 많아, 인터넷상에서 영상물이 퍼진 뒤에야 인권침해를 당했음을 깨닫는다.”(오카)

하지만 ‘돈’을 받고 ‘계약’했다는 이유로 AV 피해자들은 ‘디지털성폭력 낙인’ 피라미드의 가장 말단에 놓인다. 그래서 더 가혹한 손가락질을 당한다. 오카는 “‘계약서에 사인을 안 했으면 되잖아’ ‘싫었으면 (촬영 장소에) 안 갔으면 되잖아’라는 식으로 피해자가 비난받는다”고 설명했다. 트위터에 자신의 몸 사진을 올렸던 10대 여성이 주로 ‘텔레그램 성착취’ 대상이 됐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사진을 올린 사람이 잘못’이라는 손가락질이 있었던 것과 유사하다. “일본의 성교육은 ‘자신의 몸은 자신이 지켜라’이다. 그러다보니 더 피해자를 탓한다.”(가나지리)

팝스가 지난 1년 동안 디지털성범죄 피해자 요청으로 인터넷 사이트 제공자에게 영상물을 삭제해달라고 요청한 경우는 1만7839건이다. 이 중 일부라도 삭제된 경우는 41.7%, 캐시 삭제는 20%이고, 삭제되지 않은 경우는 38.2%에 이른다. ‘아동 포르노’나 ‘리벤지 포르노’ 삭제율은 100%지만, AV 출연 등 상업적 경로로 확산된 영상물 삭제율은 52%에 그친다. 가나지리가 말했다. ​“합법이기 때문에 피해가 더욱 심각해진다. 언더그라운드화(불법) 하면 피해를 호소하기 쉬워지는데 합법화함에 따라 피해를 호소하는 힘을 빼앗긴다.”

 

“성적 착취 없는 AV를 본 적이 없다”

산업으로 포장된 디지털성범죄를 겪은 팝스는 ‘n번방 사건’이 한국에서 발생했을 때 그리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범인이 잡히고 사건이 재판으로 넘어갔다는 소식에 놀랐다.”(가나지리) 일본에서는 수사가 좀처럼 진행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한국과 비슷하다. ‘서버가 해외에 있다.’ ‘게시자 신분을 특정하기 어렵다.’

가나지리 이사장은 “경찰에 신고했을 때 영상 플랫폼 회사가 미국에 있다는 이유 등으로 조사가 어렵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팝스가 2020년 4월에 낸 ‘삭제 요청사업 보고서’를 보면, 사이트의 등기상 주소지가 있는 국가는 미국이 1334건으로 가장 많았다. 그다음으로 일본(433건), 네덜란드(60건), 싱가포르(38건), 홍콩(33건) 순이다. 한국은 20건이었다. 국제 수사 공조가 필요하다고 팝스가 느끼는 이유다.

“성적 착취에 의존하는 AV 산업은 없어져야 한다. 촬영 당시 동의하더라도 훗날 취소를 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또 촬영하다보면 본인 예측이나 의사에 반하는 상황도 있다. 나는 아직 성적 착취가 없는 AV를 본 적이 없다.”(오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