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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금 어겼다고 삭발당한 10대 여성 고민에 "예뻐서 그래" : 이것은 조언이 아닌 '가스라이팅'이다

딸은 인형도, 소유물도 아니다.

  • 이인혜
  • 입력 2021.01.19 13:35
  • 수정 2021.01.19 15:53
이수근과 서장훈, 삭발당한 여성의 모습
이수근과 서장훈, 삭발당한 여성의 모습 ⓒKBS JOY

 

“네가 너무 예뻐서 그래”, “내가 아빠라도 똑같이 그럴 것” 아빠의 과도한 집착으로 힘들다는 10대 여성에게 성인 남성들이 한 조언이다. 여성은 통금을 어겼다는 이유로 강제삭발 당하고 사진까지 공개했는데 돌아온 것은 “두상이 예쁘다”, “삭발해도 예쁘다”는 소리였다.

10대 여성 : “아빠가 오빠와 저를 차별한다. 오빠는 자유롭게 컸다. 그런데 아빠가 저한테는 집착이 너무 심하다.”

아버지 : “오빠는 아들이잖아.”

진행자는 “사랑하는 딸을 보호하고 싶은 마음에서 그런 것”이라며 오히려 아버지를 두둔한다. 이어진 장면에서 여성은 어색하게 웃고, 그 아래로 ‘이제 괜찮아요’라는 자막이 나온다. 도대체 누가 괜찮다고 말했는가? 전혀 고민이 해결되지 않았지만, 진행자들은 “지금은 잘 지내고 있어 다행”이라면서 아무렇지 않게 넘겨버린다.

이는 지난 18일 KBS JOY ‘무엇이든 물어보살’에서 나온 장면이다. 아버지 이만복씨와 서장훈과 이수근 같은 진행자들, 그리고 자막까지 똘똘 뭉쳐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것”을 딸에게 강요한다. 그 누구도 여성의 마음을 진심으로 헤아리지 않았다. 이들은 이제 겨우 15살에 불과한 여성을 이른바 ‘가스라이팅’하는 데 동참했을 뿐이다. 

'물어보살' 미성년 여성이 털어놓은 고민
'물어보살' 미성년 여성이 털어놓은 고민 ⓒKBS JOY

 

가스라이팅의 정의부터 살펴보자. 가스라이팅은 정신적 고통을 주는 행위로,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그 사람이 스스로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자신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것을 뜻한다. 대체로 가족이나 배우자처럼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나며, 주로 한쪽이 다른 한쪽보다 권력 우위를 가질 때 발생한다. 부모 자식 사이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부모가 자기 생각을 억지로 주입하면서 자식을 통제하는 행위도 가스라이팅이다.  

‘무엇이든 물어보살’에서 아버지 이만복 씨는 “제가 어렸을 때 놀아봤다 보니 (세상이 위험한 걸 알아) 잡는 것”이라면서 딸을 억지로 삭발시켰다. 딸이 “오빠는 다했는데”라고 서운함을 토로하자 이씨는 “오빠는 아들이잖아”, “아들 같은 경우는 좀 풀어주는데, 딸은 여자라서”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이는 ‘여자이기 때문에 자유를 주면 안 되고, 통제 당해도 마땅하다’는 성차별적 사고에 기인한다. 성차별을 성차별로 인식하지 못하고, 성별이 여성이라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듯 얘기하는 행위, 또한 그 얘기를 반복하면서 딸을 세뇌하는 행위는 분명한 ‘가스라이팅’이다. 

더 큰 문제는 아버지의 태도를 지적한 사람은 없고 오히려 아버지의 입장을 합리화하는 사람만 있었다는 점이다. 부녀의 대화를 듣던 서장훈과 이수근 같은 진행자들은 “아빠 입장에선 딸을 보호하고 싶은 마음이 커서 오바처럼 보일 때가 있다”, “네가 예뻐서 그렇다”며 아버지를 두둔한다.

예뻐서 그렇다고? 가해 행위를 한 사람은 아버지인데, 왜 ‘예쁜’ 딸 탓을 하는가? 예쁘면 그래도 되고, 안 예쁘면 그러면 안 된다는 건가? “네가 예뻐서 그래”라는 말을 우리는 그동안 너무 많이 들었다. 性.暴.力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주변 사람들이 가장 쉽게 하는 말이자, 문제의 원인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 탓으로 돌려버리는 전형적인 ‘2차 가해’ 멘트다. 이는 가해자를 두둔하고 문제 원인을 피해자 탓으로 돌림으로써 피해자가 ‘내가 너무 예민한가?’ ‘내가 잘못한 건가?’ 식으로 자기자신을 의심하게 한다는 점에서 가스라이팅의 정의에 부합한다. 한국사회에 만연한 ‘피해자 비난 문화’가 사회적 차원의 가스라이팅이라는 점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기도 하다. 

가스라이팅에 대해 이현혜 양성평등교육진흥원 교수는 머니투데이에 이렇게 말했다. “피해자가 처음에 저항하더라도 경제, 지위, 연령 등에서 발생하는 권력 차이를 이길 자신이 없고, ‘(사랑하면) 그럴 수도 있지’라고 치부하는 주변의 시선에 체념할 수밖에 없다” 

해당 발언에 이날 딸의 어색한 웃음이 겹쳐 보인다면 우려일까, 기우일까. 그런 점에서 기껏 용기내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은 딸이 더 큰 상처를 받고 체념하지는 않을지 우려스럽다. 이쯤에서, 방송에 나온 아버지 이만복씨에게 꼭 하고 싶은 말, 딸은 인형도 아니고 자신의 소유물도 아니다. 당신이 딸에게 한 일은 엄연한 가해 행위다. 

내가 인형을 가지고 놀 때 / 기뻐하듯/ 

아버지의 딸인 인형으로 / 남편의 아내 인형으로/

그들을 기쁘게 하는/ 위안물 되도다

노라를 놓아라 / 최후로 순수하게/ 

엄밀히 막아 논 / 장벽에서 / 견고히 닫혔던 / 문을 열고/

노라를 놓아주게. 

-나혜석, 「인형의 가(家)」 부분 <매일신보> 1921.4.3 

 

이인혜 에디터 : inhye.lee@huffpos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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