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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의 시대에 관한 무용한 상상들

ⓒhuffpost

빗나간 예언만큼 상상력을 잃었다. 지난 세기말, 앙골모아 대왕이 내려온다던 하늘은 맑았고 스카이넷에 의한 핵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그것은 다행이었지만 영화 「백투더퓨처 2」의 배경이 된 2015년에 와서는, 해도 너무하다고 생각했다. 하늘을 나는 스케이트보드, 타임머신 기능이 달린 자동차는 아직까지도 개발되지 않았고 기약도 없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미래세계’는 인류의 과장된 농담을 비웃으며 유유히 도래했다. 아직 오지 않은 순간들에 관한 생각을 부풀려 떠올리는 까닭은 다가올 미래가 두렵거나 현재가 못마땅하거나 둘 중 하나, 혹은 둘 다. 이번 생에는 어떠한 혁명도 목격하지 못할 것. 하지만 절체절명의 파멸도 없을 것. 시시했지만 안도했다.

배가 가라앉았다.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다시금 촛불이 켜지고 국민에 의해 정권이 교체됐다. 가능하리라 생각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는 종전을 앞두고 있다. 상상력을 잃은 나로서는 도무지 낌새도 챌 수 없었다.

ⓒ뉴스1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어?

학창시절 교과서와 선생님들을 통해 학습한 개념 속에서 통일을 위한 구체적인 절차나 현실적인 방법론에 관한 얘기는 그다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니까, 본디 하나의 민족이었고 하나의 나라였다는 당위를 설명 듣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따라 부르기는 했으나 어딘지 막연했다고 해야 할까 미온적이라고 느낀 것이 솔직한 속내였다. 언제, 어떻게? 남북의 통합은 앞서 꺼낸 몇몇의 공상보다도 현실과 동떨어진, 영영 오지 않을 무엇처럼 여겨졌다. 그리고 점차 근본적인 명분에 대해서까지 숙고하게 되었다. 우리가 왜 그래야 하지? 그도 그럴 것이 하나가 된 우리를 꿈꾸자던 국가가 한편으로는 북측을 주적으로 규정하고 싸우거나 계도해야 할 대상으로 교육시켰던 것이다. 대한민국은 사실상 사면이 바다인 고립된 섬이었고 언제 잿더미가 될지 모를 국가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나의 세대에 더이상 한 핏줄이라는 기조만으로는 친근감을 느낄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 어색한 나라였을 따름이다.

그러던 어느날, 뜻밖의 악수와 미소로 적대국가 간의 경계가 허물어졌다. 새 시대가 약속되었다. 그 순간을 기점으로 섬나라와 대륙을 이어주는 전설 속 땅이 수면 위로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남쪽의 일꾼들은 희망을 품었다. 개발되지 않은 토지, 풍문으로만 듣던 천연자원과 통한 적 없는 무역의 경로. 그들보다 비교적 젊은 층은 조금 다른 꿈에 부풀었다. 때가 맞지 않아 가보지 못한 금강산 여행과 시베리아열차를 타고 떠나는 세계일주, 오리지널 평양냉면의 맛 등등. 연일 SNS와 인터넷 기사 댓글란에는 축복과 환호가 가득했다. 특히 북측 인사에 관한 우호적이고 친근한 감상평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이것 봐, 역시 우린 같은 뿌리였어!

잠깐. 우리 조금 이상하지 않아? 얼마 전까지 ‘저들’을 조롱하고 싫어했잖아. 입장변화가 너무 갑작스러운 거 아니야? 이런 비틀린 심사가 내 안에서 음험하게 똬리를 틀고 요지부동인 것에는 나름 이유가 있다.

상상력의 부활

지난해 초 어느 밤, 나는 잠에 들지 못했다. 실시간으로 인터넷 기사를 확인하다가 지금 당장 서울이 불바다가 될 확률에 대한 의견을 지인과 나눴다. 북한의 지속적인 무력 도발과 한미 연합의 위협적인 합동훈련은 으레 있어왔던 일이라고 하더라도 아직 예측불허인 인물이었던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 간의 기싸움은 상황을 어떤 방향으로 전개시킬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북한의 우방국인 중국과 러시아마저 북한을 외면하거나 압박했다. 유사 이래 지구상에서 단 한순간도 전쟁이 멈춘 적은 없다지만 베트남전 이후 이른바 제3세계라 호명되는 장소 외에서 전쟁이라 불릴 만한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았다. 나의 국가를, 한반도를 어떤 분류에 두어야 할지는 어려운 얘기지만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커다란 전투가 일어나기는 힘들다고 믿었다. 하지만 다가올 미래가 두렵고 현재를 신뢰할 수 없는 순간 나의 상상력은 다시금 활력을 되찾았다. 가장 파멸적인 모습으로 말이다.

다행히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는 평창올림픽을 기점으로 안정되었다. 언제 터질지 모를 파국에서 벗어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기꺼운 마음이지만, 어딘지 찜찜한 구석을 지우기 힘들었다. 시대는 밝고 아름다운 곳을 향해 걸음을 내딛는데 나만 혼자 과거에 머물러 있는 기분이었다. 기대를 배신당하고 싶지 않은 비겁한 심리와 아직 완전히 걷히지 않은 타국에 관한 불신이 뒤엉켜 축복의 언어를 틀어막았다. 한 시대의 변곡점에 서서 나는 어떤 것도 함부로 부정하거나 긍정하기 힘들었다. 다만 나의 걱정이 기우가 되고 희망이 현실이 되는 미래를 기도처럼 상상할 따름이었다.

ⓒtimbrado via Getty Images

파를 썰 때 눈물이 나는 이유

판문점에서 있었던 남북정상회담의 날, 나는 스마트폰으로 두 정상의 연설을 시청했다. 사장님과 함께 부엌에서 야채를 손질하고 있었고(나는 올해로 7년째 일식집에서 근무하고 있다) 속으로 차츰 종전시대 이후에 어떤 소설을 써야 하는가,라는 다소 약삭빠른 생각을 떠올릴 만큼 차분해진 시점이었다. 그때 사장님이 다듬던 파와 칼에서 손을 뗐다. 그가 뒤돌아서 눈가를 훔쳤다. 불에 데든 칼끝에 손을 베든 사장님은 내 앞에서 결코 눈물을 보인 적이 없었다. 말하자면,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그런 장면이었다. 잠시 후 다시 칼을 든 사장님에게 나는 굳이 까닭을 캐묻지 않았다. 나중에 들은 바로 그는 그저 아버지 생각이 났을 뿐이라고 했다.

* 창비주간논평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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