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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먼저 사랑해야 한다? 항상 맞는 말은 아니다

  • 박지선
  • 입력 2018.04.13 16:29
  • 수정 2018.04.13 16:44
ⓒhuffpost

사랑은 일종의 광기다. 그러나 이때 광기란 다름 아니라 자아가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높임으로써 힘이 솟는 느낌으로 얻는 독특한 형태의 충만감이다. 낭만적 사랑은 남의 시선을 매개로 자신의 자화상을 멋지게 꾸며낸다. 남이 바라봐 주는 내가 아름답기만 한 것이 바로 사랑의 감정이다.

“나를 사랑한다! 이 얼마나 나 자신을 소중하게 만들어 주는 일인가! ... 그녀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에 나는 나 자신을 얼마나 숭배하는지!” 바로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나오는 구절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상대를 무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본다. 데이비드 흄은 이런 사정에 맞춤한 아이러니로 이렇게 묘사한다. “감각적 욕정으로 불타는 사람은 적어도 잠시나마 욕구의 대상에게 친근한 마음가짐을 갖는 동시에 상대를 평소보다 아름답다고 여긴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평소 자신을 괴롭히던 열등감, 이를테면 내가 너무 보잘것없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감정을 떨쳐버리고, 자신이 유일한 존재이며, 더 나아가 소중하기 이를 데 없는 존재라고 느낀다는 뜻이다.

‘사랑은 왜 아픈가; 사랑의 사회학(에바 일루즈)’ 중에서.

간혹, 자주, 그런 말을 듣는다. ‘혼자서도 잘 살아가는 사람이 건강한 관계를 맺는다.’, ‘나를 먼저 사랑해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말. 사실 그 말이 전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심리적으로 독립되어 있지 않으면 건강한 관계를 맺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고,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야지 다른 사람도 있는 그대로 사랑해줄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다.

예전 내담자 중에 사람을 좋아하고, 타인으로부터 애정과 인정을 받기 원하는 사람이 있었다. 타인의 관심을 원하고 애정을 갈구한다면 이를 얻기 위해 관계를 맺는데 노력을 하고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면 좋을 텐데. 그래야 그다음 단계의 성장 궤도를 밟을 수 있을 텐데, 이 친구는 그러지 못했다. 자신의 그런 모습이 너무 찌질해 보이고, 상대가 자신을 불쌍하게 바라볼까 봐 두려워 오히려 자신의 진짜 마음을 숨기고 쿨한 척 살아왔다.

″애정결핍처럼 보이는 거 싫어요. 나 혼자서도 잘 사는, 독립적인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요. 멋있게. 안 그러면. ‘관심 좀 가져줘’ 이런 거 너무.. 초라해 보이던데..”

그 말을 듣고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잘못 알고 있었네요. 내 헛헛한 마음이 채워지지가 않았는데 어떻게 혼자 건강하게, 독립적으로 잘 살아가겠어요. 다른 사람한테 먼저 관심받고, 애정 받고, 그게 채워져야 혼자서도 잘 지낼 수가 있지요.”

거절 당하는 게 세상 두렵다

사실은 겁이 나는 것이다. 상대에게 애정을 갈구하는데 상대가 나를 거절할까 봐. 나를 받아주지 않을까 봐 겁이 나서 다가가지 못하고 손 내밀지 못하는 거다.

그리고 무서운 거다. 누가 조금이라도 내 마음 받아줬을 때, 상대가 너무 좋아지게 될까 봐. 그래서 걷잡을 수 없이 상대에게 의존하는 마음이 커질까 봐. 그래서 상대방이 나를 귀찮아하고 질려서 도망갈까 봐 내가 먼저 거리를 유지하는 거다.

겁도 나고 두렵기도 해서 우리는 내 마음, 내 감정, 내 모습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드러내지 못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상대가 싫어할 것 같은 내 모습은 감춘다. 멋있고 세련된 이미지로 만들거나, 혹은 애교 많고 친절한 사람으로 꾸미거나. 내가 생각하기에 상대가 좋아할 만한 사람으로 나를 포장하게 된다. 

나 또한 그러했다.

아주 오래전에, 두 번 다시 만나보지 못할 완벽한 남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사회적 지위나 경제적으로 안정적이었고 사람 관리도 제대로 잘 하는 사람이었다. 더욱이 처세술까지 좋아서 여러 면에서 의지도 많이 했었다. 게다가 외적으로도 어디 하나 흠잡을 데가 없이 완벽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나야 당연히 완벽한 그이를 좋아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그 완벽남이 나를 좋아한다니, 믿을 수 없었고 세상을 다 얻은 기분까지 들었다.

허나, 우리가 교제를 하는 그 1년 동안 손 한 번 밖에 잡아보지 못했다. 그 흔한 뽀뽀도 못해봤다. 그만큼 불편했고 조심스러웠다. 그를 만날 때마다 그에게 걸맞은 여자가 되기 위해 항상 노력했고, 나의 실체를 알게 되면 실망해서 떠나갈까 봐 항상 격식 차리고 내숭떨며 꾸며댔다. 나의 행동으로 인해 우리는 거리감이 전혀 좁혀지지 않았고, 결국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 나는 이별을 고해야 했다.

상대방은 나에게 최선을 다했겠지만 나는 계속해서 부족한 마음이 들었다. 내 진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방의 마음도 진정으로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네가 사랑하는 모습은 내 진짜 모습이 아니야.”
″진짜 나를 알게 된다면, 넌 실망하겠지. 내가 매력적이지 않겠지.”

집단상담의 치료적 요인_I can “let it all out” in my group(나는 집당상담에서 모든 것을 내보일 수 있다)

예전의 나는 자존감이 그렇게 높은 사람이 아니었다. 잘난 오빠 밑에서 나는 항상 ‘모지란 애’라는 생각을 하며 살았다. 부모님도 나에게는 크게 욕심내지 않았고, 나는 그냥 내 뜻대로 살아가면 됐었다. 오히려 그 태도가 내가 부족한 사람이라고 느끼게 하여 열등감 가득한 사람으로 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사람들을 대할 때도 내가 똑똑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고, 똑똑하지 못한 나는 똑똑함 대신 착한 아이로 비치길 바라며 항상 웃는 낯으로 사람들을 대했었다.

집단상담을 하면서 내가 생각했던 것들이 무너지는 순간들이 많았다. 상대가 바라는 것과 내가 생각했던 것이 완전히 달랐던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했던 내 못난 모습, 사실은 열등감 덩어리에, 잘난 척하기 좋아하며, 한없이 이기적인 내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는데. 오히려 집단 안에서 잘난 척하고, 쿨한 척하는 모습을 사람들이 싫어했다. 대신, 똑똑하고 예쁜 사람을 부러워하고, 시기하고, 그리고 미움받을까 봐 겁내는 내 모습을 좋아하고 공감해주었다. 

내가 나를 좋아하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사람들이 내 진짜 모습을 좋아해 주니 나 스스로도 나를 좋아하게 되었고, 내 못난 모습도 편안하게 드러낼 용기가 조금씩 생겼다. 어느 자리에서든, 어떤 사람 앞에서든 내 모습을 굳이 꾸미지 않게 됐다.

즉, 우리는 타인으로부터 조건 없고 평가 없는 사랑을 받고 관심을 받아야 나에 대한 자존감이 높아지고,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초석을 마련하게 되기도 한다. 물론, 타인의 인정에 따라 나의 자존감이 좌지우지되는 것은 건강한 자존감이라고 할 수 없지만. 소위 말하는 그 ‘자존감’이라는 것을 형성하기 위한 초기 단계는 타인으로부터 받는 관심과 애정을 받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누군가로부터 진정으로 수용되고 사랑받길 원한다면, 먼저 그 누군가를 조건 없이 사랑해야 할 일이다.

* 필자의 블로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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