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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마블 영화 번역의 신, 황석희 “욕 좀 쓰면 어때요!”

'데드풀', '스파이더맨: 홈커밍' 등을 번역했다.

ⓒ임경빈(스튜디오 어댑터)/한겨레

영화 ‘데드풀‘, ‘웜 바디스‘, 최근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콜 미 바이 유어 네임‘까지. 최근 흥행한 외화 뒤에는 번역가 ‘황석희’의 이름이 빠지지 않는다. ‘약 빤 번역’, ‘초월 번역’이란 평을 누리꾼들로부터 듣는 그는 영화 자막 세계에선 이단아이자 개척자다.

ⓒESC

그의 자막엔 불끈 쥔 주먹 모양의 이모지(그림문자)가 튀어나오는가 하면 과격(?)한 욕도 올라간다. 이전에는 상상도 못 한 일이다. 열광적인 팬층까지 거느린 그에게 ‘이번 자막은 압권이다’ 같은 메일도 쏟아진다. ‘스파이더맨: 홈커밍‘, ‘데드풀‘, ‘로건’ 등을 통해 마블 ‘덕후’들 사이에선 조금 과장을 보태 언어의 신으로 추앙받는다.

영어교육과 졸업 이후 버라이어티쇼부터 다큐멘터리, 드라마 번역을 거쳐 영화 번역가의 길로 접어든 ‘이색 경력’의 소유자인 번역가 황석희(39)씨를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서 만났다.

―유학 경험도 없이, 최근 가장 ‘핫’한 번역가로 떠올랐다.

“사범대학교의 특성상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임용고시를 보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 ‘마냥 놀다가’ 대학교 4학년, 갑작스레 책을 번역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번역 황석희’가 쓰여 있는 책 한 권 남기고 싶다는 느닷없는 꿈을 가지고 매뉴얼, 설명서 등 기능적인 번역 일을 하게 됐다. 2005년부터 그렇게 매뉴얼 등을 번역하다가 2006년 티브이 프로그램 ‘닥터 필’ 번역과 인연이 닿게 된 것이 계기다.”

ⓒMarvel Studios

―‘스파이더맨: 홈커밍‘을 통해 한국 영화 자막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일을 해냈다. 주인공 피터 파커가 친구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낼 때 ‘주먹 이모지’가 나온다.

한국 극장 자막에선 최초다. 예전엔 자막은 필름에 글자를 새기는 것이었다. 지금은 ‘디지털시네마패키지’라고 해서 컴퓨터로 자막을 씌우는 식의 디지털 작업이다. 글자(자막)가 이미지인 셈이다. 옛날엔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재미 삼아 이미지를 복사해 붙여 보니 되더라. ‘스파이더맨: 홈커밍’은 제일 어린 히어로가 나오는 영화다. 가능하면 젊은 관객들이 더 몰입하도록, 더 잘 동화되도록 하기 위한 시도였다. 기술적으로 가능한지 영화사에 물어보고 허락받아 진행한 일이다.”

ⓒ20th century fox

 ―반응은 어땠나? ‘데드풀’ 자막에선 욕도 있었다.

“센세이션 했다. 그런 자막을 본 적이 없으니까. 전반적으로 신선하다는, 좋은 평을 들었다. 사실 주먹이나 고양이 이모지는 실제 영화에 나온다. 예전 같으면 영화에 나와도 뺐을 것이다. 극장 번역에도 전문적으로 따르는 문법이 있다. ‘이런 표현을 안 쓴다’, ‘자제한다’ 식으로. ‘데드풀‘(2016) 때는 짧은 경력에 영화 번역계에선 막내였다. 과감한 뭔가를 시도해보고 싶었다. 남들이 안 하는 거 해보자 했다. ‘개새끼’, ‘×까!’, ‘시발’ 같은 우리식으로 바꾼 욕을 쓰자고 영화사 쪽에서 제안했는데 동의해줬다. 이전엔 ‘빌어먹을 놈’ 정도 가장 심한 자막 욕이었다. 영화제에선 노골적인 욕 자막을 쓴다. 극장 개봉할 때 다른 자막으로 바꾼다. ‘청불’(청소년 관람 불가)영화 본 세대는 욕이 나와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기본적으로 영화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많은 것 같다.

“영상물에 대한 관심보다는 영상물에 들어가는 자막에 대한 호기심이 더욱 큰 것 같다. 직업 특성상 자막부터 보이니까.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며 입장을 대입해 보는 순이다. 영상보다는 영화 각본 자체에 주력하는 편이라 대사를 하나하나 뜯어보는 것을 좋아한다.”

―좋은 번역가는 어떻게 되나?

“어렸을 때부터 글 쓰는 것을 좋아했다. 읽고 쓰는 것을 좋아한 것이 영화 번역을 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됐다. 있는 것을 옮기되 ‘나만의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 정확히 번역을 하되, 번역가의 시각이 들어갈 수 있는 여지가 많은 일이라 재미있다. 원작의 뜻을 그대로 담되 가장 자연스러운 한국어로 대사의 뜻을 온전히 전달하는 것이 좋은 번역가의 기본이자 전부인 셈이다.”

―외국 생활을 한 이가 많아진 것이 번역가에게는 부담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1990년대에는 영미권 문화를 접하기 쉽지 않았다. 이 때문에 관객은 자막에 대한 호기심이나 의구심 없이 수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번역이 비판받는 일은 거의 없었다. 요즘에는 오역과 오타 등과 관련된 피드백이 많이 온다. 어차피 모든 문화에 대해 알 수 없기에 관객을 통해 배우는 점도 많다.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본다.”

―번역 실수도 하나?

“번역 한 편에 1800개 정도의 문장이 나온다. 1800개의 문장을 시험 보는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그러니 실수는 나올 수밖에 없다. 이때 관객한테 ‘혼나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 ‘에러’ 가능성은 모두에게 있기 때문에 실수에 대해 빨리 인정하고 사과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잘못을 ‘쿨하게’ 인정하고 블루레이 디스크(광 기록 방식 저장매체), 브이오디(VOD) 출시 때에는 재감수해서 번역을 넘긴다. 메일, 에스엔에스(SNS) 계정 등을 열어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임경빈(스튜디오 어댑터)/한겨레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믿고 보는 황석희 번역’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올 정도로 인기다.

“B급 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있고 ‘덕후’ 기질이 있는 것을 관객들이 알아봐 준 것 같다. 관객과의 소통도 적극적으로 하려 한다. ‘최고의 번역가’ 대신 ‘관객과 가장 친한 번역가’로 남고 싶다.”

―단순히 외국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것을 번역이라고 하지는 않는가 보다.

“번역은 문화를 해석하는 것에 더 가깝다. 외국의 문화도 중요하지만 우리나라의 문화를 익히는 것이 더 중요하다. 문어가 아닌 구어를 다루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다. 어떤 맥락에서 어떤 단어를 쓰는지, 언어의 맥락을 따져야 한다. 한국어를 어떻게 풀어내느냐가 가장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외국어 실력 역시 무시할 수는 없다. ‘잘된 자막’으로 평가받는 자막은 아주 사소한 디테일이 살아 있다. ‘올드패션드’(Old Fashioned)라는 단어를 ‘구식이다’보다는 ‘촌스럽다’로 번역하는 것이 더욱 자연스러운 것처럼 말이다. 물 흐르듯 흘러가는 편안한 단어를 고르는 것이 중요하다.”

―2013년 ‘웜 바디스’ 영화의 엔딩 자막에 처음 이름을 올렸다. 그때의 소감은 어땠나?

“각본 자체가 일단 좋았다. ‘무조건 된다’는 감이 왔다. 욕심났다. 번역 의뢰가 들어왔을 때는 너무 기뻐서 아내와 손을 붙잡고 펄쩍펄쩍 뛰었을 정도다.(웃음) 100만 관객이 넘으면서 ‘번역가 황석희’ 이름을 널리 알렸으니 나한테는 효자 같은 작품인 셈이다.”

―‘황석희가 번역한 노래 가사’ 시리즈가 유행한다. 콜드플레이, 켈리 클라크슨, 밥 딜런 등.

“영화보다 호흡이 짧은데다 시어로 이루어진 가사가 대부분이라 처음에는 고민을 많이 했다. 음악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인지 재미있게 작업하고 있다. ‘인사이드 르윈‘과 같은 음악영화의 오에스티(OST) 번역을 하는 데도 노래 가사 번역이 도움이 됐다. 한국어 번역 가사를 불러도 어색함이 없어야 한다. ‘가사를 보면서 노래를 들으면 노래가 한국어로 들린다’는 피드백을 받았을 때 가장 감동했다. 반년 전부턴 워너뮤직코리아의 발매 음반 노래를 번역하고 있다.”

―번역가 황석희의 궁극적 목표는 무엇인가?

“할 수 있는 한 영화 번역을 아주 오랫동안 하는 것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힘든 과정을 거쳐 여기까지 온 만큼 큰 욕심은 없다. 지금처럼 좋은 영화를 꾸준히, 오래 번역하는 것이 목표다.”

백문영 라이프스타일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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