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스
2021년 04월 22일 16시 35분 KST

아빠는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생존자고 94세가 돼서야 내게 그 끔찍했던 과거를 들려줬다

강제 수용소 도착 직후 모든 남성은 한 줄로 향하고, 여성과 어린이, 노인은 다른 행으로 보내졌다.

COURTESY OF LISA KANAREK
저자와 그의 아버지

 

아빠는 15세 때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 끌려가 19세에 자유를 찾을 수 있었다

1월 6일 미국 의사당에서 일어난 폭동을 취재하면서 한 남성이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가 써진 을 입는 걸 봤다. 아우슈비츠는 독일 제3제국 최대 규모의 유대인 대상 강제 수용소로 대량 학살의 현장이다.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미국 40대 이하 성인 중 48%는 이런 수용소를 잘 모르고 독일 나치의 역사도 거의 모를 거다. 하지만 나는 ‘아우슈비츠’라는 이름을 잘 알고 있다. 지난 가을 세상을 떠나기 전, 우리 아빠는 전 세계 2000명의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의 생존자 중 한 명이었다. 그의 94세 생일 몇 주 전, 마침내 어린 시절 그곳에서 진짜 일어났던 일들을 털어놓았다. 이전까지 그는 내게 그가 겪었던 일을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는 걸 피했다. 

그 후 2년간 그가 이야기하는 내용을 영상으로 남겼다. 그 이야기를 하는 게 너무 고통스러웠기에 숨겨왔다고 말했다. 아빠는 미국 중서부에서 소아과 의사로 일하며 엄마와 함께 우리 네 형제를 키웠다. 그리고 성장하면서 우리 형제는 부모에게 과거를 묻는 게 금지됐다.

여전히 온라인 등에서 유대인을 배척하는 ‘반유대주의’를 외치거나 신(新) 나치주의자가 활동하는 걸 보면 소름이 돋는다. 우리가 절대 홀로코스트(나치 독일의 유대인 대학살) 과거을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다. 아빠가 71세 때 나는 당시 증언을 모으는 연구소인 USC쇼아 재단에 그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아니. 난 아직 준비가 안됐다.” 그리고 난 20년을 더 기다려서야 진실을 들을 수 있었다. 사실 이야기를 하겠다고 동의했을 때 놀랐다. 글로는 아빠의 폴란드 억양, 회색 머리를 가지런히 빗어 넘긴 머리, 거의 주름 하나 없는 얼굴로 원래 나이보다 10년 이상 젊어 보이는 그의 모습을 담을 수 없다는 게 아쉽다. 전쟁 전을 이야기할 때는 푸른 눈에서 빛이 났다. ”정말 폴란드에서 행복한 시절이었다.” 하지만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후, 아빠 가족의 집을 몰수했고, 그의 부모와 여동생은 그의 조부모와 함께 이주해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1940년부터 1942년까지 2년 동안, 그들이 살던 폴란드 프원스크의 빈민가로 옮겨졌고 이후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 수감됐다.

전쟁 이야기를 하며 인생 2장을 이야기하는 얼굴은 엄숙했고 슬퍼 보였다. 그의 가족이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직후, 모든 남성은 한 줄로 향하고, 여성, 어린이, 노인은 다른 행으로 보내졌다. 15세치고는 키가 컸던 아빠는 그의 아버지(나의 할아버지)와 함께 남성 줄에 섰고 엄마와 여동생과 헤어졌다. 나치는 일할 능력이 있는 여성과 노인을 몰아세웠고 아이들과 강제로 떨어뜨렸다.

그날 이후 그는 영원히 그의 엄마와 여동생을 볼 수 없었다. 아바는 할아버지와 함께 1944년까지 같은 수용소에서 일했지만, 할아버지는 다른 수용소로 이송돼 세상을 떠났다. 가족을 잃은 일을 묘사한 후, 촬영을 잠시 멈추라고 요청했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의 어깨가 떨리고 눈물을 참지 못했다. 나는 그를 안아주며 괜히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게 해서 실수한 게 아닐까? 두려워졌다.

″여기서 그만해도 돼요”라고 말하자 ”아니다. 살아 있는 동안 지금 이야기해야 해.”라고 말했다. 

 

COURTESY OF LISA KANAREK
저자와 그의 아버지

낯선 간호사가 나치로부터 아빠의 생명을 구했다

″수용소에서 부엌에서 일했는데 어쩌다 손가락이 염증에 감염됐다.” 퇴근 후, 그는 수용소 병원을 방문했고 수술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다. 수용소에서는 매주 수감자를 점검하고 일을 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별했다. 일을 하지 못하면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가고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마침 내가 병원에서 검진 중, 수용소 감독들이 수감자들을 검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한 남성 간호사가 다급히 내게 검사를 피할 수 있는 옷을 건네주고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직까지도 그 간호사가 왜 내게 그런 호의를 베풀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사람이 내 생명을 구했다.” 무사히 치료를 마친 이후 그는 의류 창고에서 일하도록 배치됐다. 

 

COURTESY OF LISA KANAREK
저자 리사 카나렉

전쟁 막바지에 러시아군이 다가오자, 독일 경비병들은 서둘러 수용소를 비웠다. 수감자들도 강제로 이동해야 했다. 1945년 아빠는 도라-미텔바우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기 위해 다른 수감자들과 ‘강제 사망 행진’을 해야 했다. 기차역에 도착한 후, 그들은 며칠 동안 음식과 물 없이 폴란드에서 체코슬로바키아까지 가야 했다. ”당시 눈이 오고 있어서 우리는 눈이라도 먹어야 했다. 체코슬로바키아에 도착하자 마침 길가의 여성들이 우리 모습을 보고 갖고 있던 빵을 기차로 던져줬다.”

도라-미텔바우 강제수용소에 도착한 직후 이전 수용소에서 알고 지내던 폴란드인 수용자 중 한 명을 만났다. ”그가 내게 말하기를, ’요셉, 나치 감독관들이 모든 서류를 잃어버렸어. 그들은 지금 누가 누군지 몰라’라며 정말 좋은 조언을 해줬다.” 그는 유대인이라는 표식을 폴란드인이라는 표식으로 바꾸라고 조언했다. 이후 아빠는 운이 좋게 수용소 병원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일한 덕분에 다른 포로들처럼 끌려가지 않을 수 있었다. ”아마 당시 끌려갔던 사람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을 거다.”

 

BARTOSZ SIEDLIK via Getty Images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

전쟁에서 독일이 패배한 후 미국으로 건너온 아빠는 의대를 나오고 나를 낳았다

그러던 어느 날, 독일 감독관들이 수용소에서 모두 사라졌다. 전쟁에 패배한 독일 군인 및 수용소 감독관들은 민간복으로 갈아입고 수용소를 탈출했다. 한두 시간  후 남은 수감자들은 수용소 안으로 탱크가 굴러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다. 미군이 수감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도착한 것이었다. 마침내 자유를 얻은 수감자들은 음식과 옷을 제공받았다. ”우리는 달려가 그들을 껴안았다.” 아빠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남은 사람 모두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과 드디어 해방된 걸 믿을 수 없었다.”

전쟁 후, 인생 3장을 살게 된 그는 독일에서 뉴욕으로 이주했다. 당시 19살이었다. 뉴욕에서 그의 이모, 삼촌 그리고 사촌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대학교를 졸업한 후 멕시코에서 의대를 나왔다. 그곳에서 28살 지금의 엄마를 만나 1년 만에 결혼했고, 미국으로 이사한 뒤 나를 낳았다. 나는 우리 집안의 첫 번째 ‘미국인’이다.  

Tim Robberts via Getty Images
미국 뉴욕

강제 수용소에서 해방 이후, 단 한 번도 화를 내지 않던 아빠는 사실 매우 강한 사람이었다

나치는 아빠의 팔에 강제로 숫자 문신을 새겼고, 그 문신을 지우는 시술을 받았다. 덕분에 문신은 흐려져 흐린 선만 희미하게 남았다. 79777이라는 숫자였다. 

나는 그와 세상을 떠나기 몇 달 전부터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었다. 내가 만난 적이 없는 친척들에 대한 일화, 새로운 나라에서 직면했던 도전, 그리고 그가 가장 좋아하는 주제인 가족에 대한 일화를 들려주곤 했다. 어린 시절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왜 이렇게 오랜 시간을 기다려서야 이야기를 해주는 거죠?”라고 물은 적이 있다. 그는 ”아무도 나를 동정하지 않길 바랐다”고 답했다. 다른 사람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기 힘들었을 거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그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용의자들이 심문을 받거나 피비린내 나는 싸우는 장면이 나오는 영화를 절대 보지 않았다. 나는 아빠가 화를 내거나 소리를 지르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어렸을 때는 그저 소심한 사람인 줄 알았다. 하지만 사실 누구보다 힘든 경험을 통해 인내심 있고, 미래를 위해 나아가는 정말 강한 사람이었다.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건 미래 세대를 위해서도 중요하다. 아직도 전쟁 중 수용소에서 아빠와 그의 가족에게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계속 난다. 이런 인생 이야기를 들려줘서 감사하고 매일 그립다. 그의 이야기는 뼈아픈 역사의 증거로 계속 이어질 거다.  

 

 

 

 

 

 

 

*저자 리사 카나렉은 프리랜서 작가다. 그에 대한 더 많은 정보는 공식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허프포스트 미국판에 실린 독자 기고 글입니다.